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7)
로판 속 공무원 527화(528/945)
페디가 태명을 의식한 것처럼 첫눈과 함께 우리 곁으로 찾아온 뒤, 장관을 대부로 삼은 세례식까지 마치자 얼추 12월이 되었다.마침내 고난의 아카데미 3년 행군도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12월에 돌입하자 하루가 지날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이제 정말, 정말 조금만 버티면 3년이라는 초-장기 파견 업무가 끝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세 개도 느그 나라로 귀국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페디하고도 집에서 놀아줄 수 있다.
‘요즘 자는 모습밖에 못 봐.’
서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른 아기들은 낮에 자다가 밤과 새벽에 각성해서 부모를 괴롭힌다고 하던데, 우리 착한 페디는 평범하게 자고 평범하게 일어난다.
다만 아기의 수면 시간은 성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지라 그 정상적 수면이 이른 저녁부터 늦은 아침까지라는 게 문제다. 재수가 없으면 자고 있는 페디를 보며 출근하고, 퇴근해서도 자고 있는 페디를 봐야 하니까. 매일 그런 건 아니지만 슬픈 일이지.
다행히 황제에게서 아카데미 졸업 이후로는 조금 쉬어도 된다고 확답을 받았으니 그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 요즘 페디가 옹알이도 제법 또렷하게 하더라. 넌 못 듣겠지만.
‘조금만… 버티자…’
며칠 전, 장관이 했던 도발을 떠올리며 더더욱 의지를 다잡았다.
근무지가 아카데미인 나와 달리 제도에서 근무하는 장관은 점심시간마다 저택에 방문해 페디와 놀아주고 간다. 하필 대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 저택에 있는 사람들은 장관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 상황.덕분에 장관은 툭하면 페디의 동향 보고라는 명목으로 온갖 놀림과 도발을 친부인 나에게 쏟아부었다.
이 이름만 대부인 망할 노친네. 하는 짓은 원수가 따로 없어.
‘그렇게 좋을까.’
순간 이가 갈렸으나 금방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나에게 상습적 도발을 날리는 것과 별개로 장관이 페디에게 쏟는 정성은 절대 가볍지 않다.
한 부서의 장관이라면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이나 마찬가지다. 말이 좋아 점심시간마다 찾아가는 거지, 그 시간에 다른 업무나 미팅을 본다면 얼마나 퇴근 시간이 단축되겠나. 장관은 그걸 포기하고 페디와 놀아주기를 택한 거다. 친부로서 고마울 따름이지.
이렇게만 보면 정말 좋은 대부인데, 친부한테 연락만 적당히 했으면 정말 좋겠다.
– 무슨 생각 중이길래 갑자기 한숨이야?
“각하가 급하게 식사하다가 체해서 사흘 정도 고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제발.
지금도 밥 먹는 도중에 통신구로 연락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 내가 왜 이 양반하고 원격 겸상을 해야 하는 건데.
‘어차피 연락할 거면 페디랑 같이 있을 때 하라고.’
오죽하면 그런 소망까지 가슴속에 품었다.그러면 페디가 깨어있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잖아.
오늘도 페디는 자고 있는 모습으로 아빠를 반겨주었다.
“…깨우면 화내겠지?”
“페디보다 제가 먼저 화낼 거예요.”
“미안해.”
새근새근 자고 있는 페디를 내려다보며 미친 발언을 입에 담자, 마르는 내 허리를 쿡 찌르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기에 빠르게 사과했다. 아니, 정확히는 반쯤 진심이기는 한데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절대 없다. 잘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것만큼 사이코패스 같은 행동은 없지.
그저 내 신세가 처량해서 서글플 뿐이다. 첫 자식과 소통도 제대로 못하는 아빠라니.
‘확 안아버릴까?’
어느새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괜히 페디를 건드렸다가 잠에서 깨면 곤란하다. 이 작고 귀여운 아기 천사가 우는 건 볼 수 없어. 그랬다가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죄책감과 마르의 미움을 동시에 받을 거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요즘 잠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더라고요. 조만간 깨어있는 페디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진짜?”
“진짜로요.”
그 와중에 내 표정이 너무 애잔해 보였는지 마르는 슬며시 내 손을 잡으며 기묘한 위로를 해줬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우리 페디가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를 반겨준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몸도 마음도 피곤한 상태로 어기적어기적 돌아온 집, 그리고 그런 아빠를 맞이해주는 아들.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로망이 아닌가.
‘조금만 더 버티자.’
그렇게 세상을 길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사실 어디 사는 모 장관과 달리 마르는 깨어있는 페디의 모습을 통신구로 보여주지만, 직접 보고 만지는 것과 원격으로 보는 건 다름 법이니까.
“우우…”
아무튼 마르의 말에 히죽거리는 사이, 페디의 옹알이가 들려 흠칫했지만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저 옹알이는 잠에서 깨려 한다는 경고가 아니다. 저러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자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페디는 직접 건드리는 게 아닌 이상 근처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든 평온하게 잘 수 있는 기적의 아기다.
‘얘도 평범하게 클 것 같지는 않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기지만, 두 발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때가 오면 저택과 가문을 뒤집어 버릴 것 같다고.
마르의 품에 있을 때 보였던 화려한 발길질, 변덕이 심했던 입맛, 지금 보이는 마이웨이 성향을 고려하면 분명 그럴 거다.
‘애들이 다 요란하게 크는 거지.’
물론 그렇게 자라도 아무 문제 없다. 어린아이들이 이런저런 사고도 치고, 장난을 치며 자라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반대로 예상을 벗어나 얌전히 자라도 상관없다. 그건 그거대로 귀여운 맛이 있을 테니.
페디는 그냥 착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면 충분하다. 네가 평생 먹고 살 돈은 이 아빠가 다 벌어뒀어.
‘너는 꼭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렴.’
이 아빠는 그러질 못했어요…
***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라테르가 더욱 공세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 화려한 공세 덕분에 나 역시 더더욱 진심으로 승부에 임하였다. 둘이 사이좋게 고문 선생에게 패배한 반 대항전 결과로도 2등, 3등을 나누는 놈인데, 만약 체스에서 한 번이라도 패한다? 그 결과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절대 질 수 없다.’
그렇기에 라테르가 단 한 번이라도 승리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원래도 없었지만 이제는 죽어도 승리를 넘겨줄 수 없다.
이제 이 승부는 단순히 승률이나 전적의 문제가 아니다. 내 정신과 자존심이 무너지느냐 마느냐가 걸린 중대한 문제다.
“뭐야. 아직도 하고 있었어?”
하지만 애석하게도 일개 귀족인 에리히는 왕족들의 고귀하고 중대한 승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예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작을 했다면 끝을 봐야지.”
“동감이다.”
하필 이럴 때는 뜻이 맞는 라테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검을 뽑지 않았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기사다. 그러나 검을 뽑았다면 내가 죽거나 상대가 죽어야 끝낼 수 있는 것도 기사다.
지금의 나와 라테르가 그렇다. 이 승부의 끝이 나의 무패냐, 라테르의 기적적인 1승이냐는 어디까지나 최종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물러서지 않는 진검 승부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어차피 류티스가 이길 텐데 뭘.”
그 말에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3자가 저렇게 말할 정도로 나와 라테르의 격차는 명백하다.
이미 나의 승리는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설령 라테르가 나에게 승리를 한다고 쳐도, 부원들은 라테르가 나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 내가 실수를 한 것이라 여길 터. 라테르가 완전히 나를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라테르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 같은데.’
최근 느끼는 거지만, 라테르의 목표는 자신의 우월함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나를 조롱할 명분을 확보하여 놀리는 것에 목숨을 건 것 같다.
‘반 대항전이 사람을 망쳤어.’
실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분명 반 대항전 이전까지는 조금 독특하기는 해도 괜찮은 친구였는데, 반 대항전 이후로 어딘가 뒤틀리고 말았다. 마치 객관적인 승리보다 주관적인 감정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처럼.
이게 다 고문 선생의 업보겠지. 고문 선생이 유벤의 왕실에 어마어마한 독을 뿌렸다.
‘…그러고 보니 고문 선생은 어디 있는 거지?’
체스에 집중하느라 이제야 눈치챘다. 다른 부원들도, 루이제도, 이리나도, 마종공도 전부 동아리실에 있는데 정작 고문 선생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 그렇다고 치기에는 다들 표정이 평온하다. 고문 선생에게 일이 터진 거면 루이제, 이리나, 마종공 중 한 명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
‘별일 아니겠지.’
빠르게 주변을 살핀 뒤, 다시 체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솔직히 고문 선생이 남의 걱정을 받을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나.
“체크메이트.”
“쯧. 1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하도록 하지.”
어떤 일에도 굳건한 사람이니… 아무리 늦어도 다음 체크메이트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교장의 연락에 교장실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조금 놀랐지만, 다행히 목소리나 표정을 보면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빌라르 경을 비롯한 삼국 전력의 주요 인물들에게 명예 교사증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3년 동안 아카데미의 원활한 행사나 교육을 위해 다양한 협조를 아끼지 않으셨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리고 예상대로 급하지 않은 소소한 사안이었다.
타국인에게 아카데미 명예 교사증을 주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나, 이미 빌라르 경을 비롯한 일부에게 명예 교사증을 주는 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일. 지금 교장이 하는 말은 반쯤 확정이었던 일이 최종 확정되었다는─
“헌데 명예 교사증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장관의 이름이 언급됐다고 합니다.”
“예?”
예상치 못한 언급이라 절로 반문이 나왔다. 삼국 애들 얘기하는데 나는 왜?
“장관이 비록 감찰관 업무를 위해 아카데미에 왔지만, 기존 감찰관들보다 과도한 업무와 책임을 짊어지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예?”
교장의 말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혹시, 나도 뭔가 받는 건가? 빈손으로 아카데미 3년이 끝나는 게 아니야?
‘명예 교사증인가?’
아니면 명예 졸업증?
어느 쪽이든 두근거린다. 예전에는 그런 거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진짜 없으면 서운할 것 같은 복잡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