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29)
로판 속 공무원 529화(530/945)
졸업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안색이 어두워지는 놈이 있었다.
“아카데미에 졸업 유예 같은 건 없지?”
“있겠냐.”
바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에리히였다.
다소 의외인 반응이었다. 저놈이 제과 동아리 부원들과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에 침울해 할 정도로 감수성 넘치는 놈은 아니다. 그냥 ‘기회가 되면 언젠가 다시 보자!’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쿨하게 헤어질 놈이지. 애초에 통신구가 있으니 단순한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런 에리히가 세라와 팔짱을 끼며 돌아다니면서도 수시로 한숨을 내쉬거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누가 봐도 시름에 잠긴 듯한 모습이라 형으로서 조금은 걱정하기도 했었다.
딱 시름의 원인을 알기 전까지만.
“왜 나한테는 동생이 없을까?”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에리히를 무시하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류티스와 라테르의 자강두천을 보며 낄낄거리던 놈이 저 지경이 된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저놈이 졸업하게 되면 제국의회 의원 대리직을 수행해야 하기에 저러는 거다. 조금이나마 걱정을 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의 사유.
‘공무원이 되는 건 크라시우스의 숙명이거늘.’
아직도 그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에리히가 가엽고도 한심할 따름이다. 자기 형이 20대에 장관 내정자가 되고,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제국의회 의원을 역임한 걸 보고도 자신은 멀쩡할 거라 생각한 건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멍청한 거지만, 에리히는 눈치가 없을지언정 머리가 없는 놈은 아니다. 아마 현실을 인정한 것과 별개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지.
이해할 수는 있다. 나도 가끔씩 내가 장관이라는 사실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빡침이 몰려오니까.
‘자기만 힘들 텐데.’
그런데 일개 노예들이 빡치면 뭐 어쩔 건데. 주인님한테 사표를 내도 수리가 안 되잖아.
진짜 야인으로 돌아가려면 자르지 않고는 못 배길 대형 사고를 쳐야 하지만, 고위직이 단숨에 잘릴 정도의 사고면 관직 모가지가 아니라 실제 모가지도 위험할 확률이 크다. 그 강도를 조절할 자신이 없으면 닥치고 일해야지 어쩌겠어.
‘어디 유능한 놈 하나 안 나오나.’
아니면 기존 고위직을 대체할 새로운 노예가 나오면 기존 노예는 물러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웃으며 물러날 자신이 있다. 내 자리까지 치고 올라올 새싹이 보이면 온 힘을 다해 밀어줄 자신도 있어. 까짓 1개월에 한 번 정도 승진시키면 1년 안에는 가능하겠지.
‘없어서 문제지만.’
씁쓸한 심정으로 쿠키를 입에 넣었다. 다른 부서에서는 승진에 눈이 멀어 의욕에 불타는 것들이 많다던데, 왜 감찰성은 이 모양일까. 보통 상사가 자기보다 조금만 어리거나 신분이 미천하면 잡아먹으려고 안달인 것들도 많─
‘아.’
그런 새끼들은 내가 다 죽였었지 참.
‘내 업보였어.’
역사적으로도 숙청을 너무 과하게 하면 업보로 돌아오는 법이었지.그걸 잊은 내 실책이다.
“형.”
“왜.”
과거의 업보와 마주하는 사이, 에리히가 말을 걸었다.
“페디가 성인이 되면… 페디가 형 대신 의회에 나가는 거지?”
그 말에 쿠키를 집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그렇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 창자가 끊어지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페디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와 가장 가까운 혈육은 페디가 되었다. 즉, 내 권리와 의무를 대행할 정당한 존재는 에리히가 아닌 페디라는 것.
그렇기에 에리히의 말처럼 페디가 성인이 되면 에리히가 짊어진 짐덩어리를 페디가 대신 짊어져야 한다. 이건 타일글레헨 백작위를 아예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게 아닌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망할 제국백.’
자식만큼은 부유한 백수로 지내기를 바랐던 아비의 희망은 제국백이라는 이름의 족쇄 때문에 무너졌다.
제국백이면 무조건 제국의회 의원이라니. 너무 가혹한 형벌 아니냐고.
“앞으로 17년 남은 건가.”
그 와중에 동생이라는 놈은 조카가 성인이 되는 날을 계산하고 앉아있다. 저딴 것도 삼촌이 맞나?
…
‘잠깐만.’
17년?
“야 이 새끼야!”
“어억!”
잠시 머리를 굴렸다가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에리히의 목에 초크를 걸었다.
17세면 제국법상 성인이 맞지만, 17세가 되자마자 제국의회 의원 대리직을 맡으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다. 페디도 나처럼 미취학의 길을 걸어야 하는 거다.
“어딜 남의 아들을 미취학으로 만들려고!”
“혀, 형도 아카데미 안 다녔는데 성공했잖아!”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에리히의 말을 무시하며 더욱 강하게 목을 졸랐다. 주둥아리를 열 힘이 있는 걸 보면 내가 덜 조른 모양이지.
‘3대 미취학은 안 된다.’
게다가 페디도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는다면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주는 연달아 3명이 미취학이라는 기적의 라인업을 과시하게 된다. 아버지도 아카데미 입학이 아니라 바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셨으니까.
“오, 오빠! 에리히 눈이 풀렸어요!”
“고문 선생. 제국에 더 있고 싶기는 하지만, 장례식 때문에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가문의 명예를 건 응징은 세라를 비롯한 부원들의 필사적인 만류를 받은 뒤에야 끝났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는 것이 인생.
– 신년하례식 때 정식으로 감찰성 출범을 선언할 예정일세.
하지만 내 인생은 그런 등가교환과 거리가 먼 것 같다.
정신이 아찔하다. 동생에게 ‘님 아들도 미취학.’ 이라는 신박한 도발을 들은 것이 방금 전의 일인데, 이번에는 황제한테 ‘너 이제 내정자 아님.’ 같은 말이나 듣고 있다.
– 물론 짐의 마음속에서 장관은 이미 장관이었으나, 공식 석상에서도 장관인 것은 다른 문제지 않나. 축하하네.
“실로 영광… 입니다, 폐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개소리하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내정자가 된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부 장관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문제기는 개뿔이 달라.
그나마 달라지는 게 있다면 봉급이 부장급에서 장관급으로 인상되고, 공식적인 의전 서열을 부여받는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둘 다 내 인생에는 큰 영향이 없는 것들이다.
‘의전 서열이라.’
그러고 보니 앞으로 내 서열은 어떻게 되는 거지?
지금은 부장들보다 위, 장관 중에서는 말단이라는 미묘한 위치이나, 감찰성이 정식으로 출범하면 그런 애매한 위치에서 벗어날 거다. 아무리 신생 부서라지만 감찰이라는 업무를 맡은 감찰성의 서열이 제일 아래일 리는 없잖아.
‘너무 높지만 마라.’
장관 서열이 높으면 유사시 행정부를 책임져야 할 확률도 높다. 당장 서열 2위인 재무성 장관만 해도 궁내성 장관직이 공석이자 행정부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고, 간혹 재무성 장관도 바쁘면 바로 아래 장관이 구른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려오다 보면 5위까지 구르는 건 금방이다. 상상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나오는 상황.
‘넉넉하게 11위, 12위 정도면 돼.’
진심 가득한 소망을 품으며 태양, 하늘, 초목에게 기도했다.
내가 분수에 맞지 않는 과분한 서열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딱 내 수준에 맞는 검소한 서열을 달라는 거잖아.
그러니 아무나 기도 좀 들어줘. 말로만 복자니 제사장이니 은인이니 하지 말고.
제발.
***
졸업식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확히는 졸업식 이후에 맞이할 새해가 기다려져 도저히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제 내 차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속 심호흡을 했다.
이제, 이제 내 차례다. 마르 언니와 스승님이 결혼했으니 다음은 세 번째인 내 차례야.
“…흐힣.”
나도 모르게 이상한 웃음소리가 나와서 괜히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나 혼자만 있는 기숙사 방인데도.
“흐히힛.”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나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몇 주 정도만 지나면 예비 부인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될 수 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고향에서.
“결혼식을 꼭 화려하게 하라는 법은 없긴 해. 고향에서 가까운 사람들만 부르는 것도 즐거운 법이지.”
우리의 결혼식을 아티니 남작령에서 올려도 되겠냐고 물어봤을 때, 오라버니는 잠깐 당황하면서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리제한테는 인생에 한 번인 결혼식이잖아. 생각 바뀌면 꼭 말해줘.”
만약 화려한 결혼식을 원하면 언제든 말하라는 말과 함께.
언제나처럼 배려심 넘치는 말이었지만 사양했다. 마르 언니는 성 파로나스 대성당에서 에넨의 축복을 받고, 스승님은 엘프 주거 지구에서 세계수의 부활을 목도했잖아. 앞의 결혼식이 연달아 기적을 선보였으니 그 다음 차례인 나는 어떤 결혼식을 꾸미더라도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담을 가지지 않고 평범하고 조용히 올리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 오히려 그게 옳다.
‘내가 이어가면 다들 부담스러워할 거야.’
나는 마지막이 아닌 세 번째다. 아직 내 뒤로는 세 번의 결혼식이 남았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내 결혼식 때도 앞선 두 차례의 결혼식처럼 이변이 생긴다면? 세 번이나 정상적이지 않은 결혼식이 일어나면 다음 신부는 얼마나 부담이 심할까.
그래서 아티니 남작령을 택했다. 유일한 제자의 결혼식을 화려하게 준비해주겠다는 스승님의 제안도 거부하며 그곳을 골랐다.
‘우리 자식에게 물려줄 곳이니까.’
언젠가 내가 물려받을 아티니 남작령. 그리고 나와 오라버니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에게 물려줄 아티니 남작령.
그런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면 영원히 좋은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두 분한테도 그게 좋을 거야.’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그게 좋다.
아티니 남작령은 우리의 고향이자 터전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힐다 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장소기도 하다.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장소다.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고 싶다. 새로운 행복으로 아티니를 덮고 싶다.
‘이제 웃으셔도 되잖아.’
더 이상 부모님이 힐다 언니가 뛰어놀던 언덕과 강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 웃음을 짓는 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