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
제 53화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했다네 – 1
제국군 대북방토벌전선 임시 사령부. 임시 사령부 내에는 설치와 해체의 용이성을 인정 받아 제국군도 종종 사용하는 게르가 널려 있었다.
“와, 이 새끼가 수석 팀장이라고?”
“말세네. 4과의 위상도 바닥에 떨어졌구나.”
그리고 한 게르 안에 일곱 남녀가 모여 있었다. 먼지 투성이의 검은 제복을 입고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하지만, 그래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낄낄거리는 모습.
“당연한 결과지.”
그 중심에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당당히 말했다. 그동안 정해지지 않았던 수석 팀장이라는 직함을 꿰차는 것에 성공했기에 그의 얼굴에는 다른 팀장들을 향한 비웃음과 업신여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개 팀장 나부랭이들 하고는 냄새 나서 겸상도 못하겠는데.”
“이 새끼 어쩔까?”
“일단 눕히자.”
그 말에 득달같이 수석 팀장에게 덤벼들어 바닥에 눕히고 온갖 물건으로 두들기는 여섯 팀장들.
“시발! 이거 하극상이야!”
“팀장 사이에 서열이 어디 있다고.”
“수석이라고 우리보다 위인 줄 아네? 야, 넌 그냥 짬처리 담당이야.”
수 분 정도가 지나자 두들겨 맞던 수석 팀장도, 신나게 매타작을 하던 여섯 팀장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맛에 4과 한다. 어디 가서 제국백 후계자를 패보겠냐.”
“더러운 붉은 피가.”
“또 눕힐까?”
그래도 일곱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한 채. 이 정도 장난은 언제나 있는 일이기에.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수석이 정해지긴 하는구나?”
“지금까지 팀장들이 워낙 빠르게 죽었잖아. 정해봤자 금방 골로 가는데 뭐하러 정해.”
“하긴.”
4과 팀장의 평균 생존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특히 북방에서 전쟁이 터진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기에 굳이 수석을 정하지 않고 방치 했었는데, 현 팀장들이 평균을 아득히 넘기는 기간 동안 살아 남았기에 드디어 수석도 정해졌다.
“이대로 쭉 종전까지 가자고.”
“전쟁 끝나면 이 개같은 감찰부 생활 때려치운다.”
“난… 고향의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고향의 그녀는 커녕 여자와 연이라고는 전혀 없던 팀장도 분위기를 타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종전이니, 전쟁이 끝나면 무얼 하겠다느니. 연극이라면 새드 엔딩의 복선일 것이다. 하지만 일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제도로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일곱은 거리낌이 없었다.
***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자 눈이 떠졌다.
“아.”
시발 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요즘 그 녀석들에 대한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꿈에서도 나와 버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썩 괜찮았던 기억이 꿈으로 기어 올라와서.
‘그때는 왜 그리 좋아했는지.’
당시에는 수석 팀장에 임명되고 은근히 기뻐했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 요즘이었으면 조금이라도 책임이 많아지는 일은 이 악물고 회피했을 텐데. 그때는 내가 그 녀석들보다 뛰어나다고 인정 받은 것 같아서 마냥 좋았다. 우스운 일이다.
정말 우스운 것은 당시 4과장, 4과 수석 팀장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나란히 장관, 부장이라는 거겠지만.
찌뿌둥한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문득 전쟁 끝나면 감찰부 생활 때려치우겠다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농담이나 주고 받던 자리에서 그 녀석이 갑자기 진심을 듬뿍 담아 말해버렸지.
갑작스러운 진실게임에 다른 녀석들도 고향의 그녀니 뭐니 같은 소리가 아니라 진짜 위시 리스트를 말하게 되었고. 하지만 정작 감찰부를 때려치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소망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나도, 그 녀석도, 모두도.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아리실로 출근하자마자 쿠키통의 뚜껑을 열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아무래도 박람회 기간 동안 쿠키통에 유입되는 것이 없어서 처음으로 바닥을 보인 모양.
“이런.”
안타까운 심정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만의 작은 인간 사료가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에서 혼자 쿠키를 먹는 것이 루틴이었는데 이렇게 깨져버렸네. 오늘은 루이제한테 좀 넉넉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쿠키통을 뒤로 하고 늘 앉던 의자에 앉아 동아리실을 둘러봤다. 재료도 많고 도구도 충분한지라 가끔 이렇게 혼자 보고 있으면 나도 제과나 할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혼자 동아리 시간까지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개월 단위로 이러고 있으니.
‘또 이상한 생각하네.’
이 유혹의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 내 요리 솜씨는 내가 잘 안다. 예전에 음식을 만들어서 간부들에게 먹일 일이 있었으니까. 물론 결과는 몹시 좋지 않았다.
애초에 살면서 직접 요리를 할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지.
‘책이나 가져다 둬야 하나.’
혹시나 밀가루 범벅이 될 수도 있어 조리 도구 외 다른 물건을 두는 것은 피하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오늘따라 유독 동아리 시간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그리고 몇 시간을 홀로 기다린 끝에 맞이한 우리 부원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성실한 애들이었다.
“당분간은 공부만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루이제의 말에 겉으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 시험 기간이기는 하지. 아카데미 일정을 누가 짰는지는 모르지만, 박람회로 분위기를 띄웠다가 시험 기간으로 처박는 솜씨가 실로 예술적일 정도다.
“입학하고 처음 보는 시험이니 열심히 하려고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모습에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런 부장을 향해 ‘필요 없으니까 쿠키나 만들어 줘, 현기증 난다고.’ 라고 하는 건 어지간히 글러먹은 어른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지금까지 본 루이제라면 부탁을 하면 들어주기는 하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애 앞길을 열어주지는 못할 망정 막는 어른이 되는 건 좀.
“그래, 열심히 해. 노력하면 좋은 결과 나오겠지.”
“네!”
결국 뻔한 말로 격려를 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일은 진짜 아침부터 도서관에나 들려야겠네.
“오히려 공부하기는 여기가 좋긴 하네. 우리밖에 없으니 조용하고.”
“서로 대화를 해도 상관 없으니 도서관보다 좋겠지.”
“아, 그러네. 도서관에서는 사서 눈치가 좀 보이지.”
한쪽에서 들려오는 에리히와 라테르의 대화가 확인 사살을 날렸다. 당분간은 동아리실에서 쿠키 냄새가 아니라 종이와 잉크 냄새만 나겠구나.
사실 아카데미 학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귀족 입장에서 성적은 큰 의미가 없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 더 상위의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취업을 할 것도 아니니 성적이 높을 필요가 있나.
물론 졸업 후에 행정부나 군부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학창 시절 성적을 보지 않고 따로 등용 시험이 있다. 심지어 시험보다는 추천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유용하고. 시험보다는 아직 추천이 더 위력을 발휘하는 세계다.
그럼에도 귀족 학생이 시험에 집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에 보이는 지표라 경쟁이 된다. 자존심 강한 푸른 피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지. 반면 평민 학생들은 재학 중 높은 성적을 받으면 귀족들에게 눈도장 한 번이라도 더 찍히니까 절실히 임한다.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시험 과목이 꽤 많네?”
“네? 예전보다 오히려 줄인 거라던데요?”
루이제가 줄줄이 꺼내는 교과서를 보다가 툭 내뱉으니 오히려 의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저게 줄인 거라고? 대학에서 최대 학점 꽉 채우면 대충 저런 양이 나올 것 같은데, 그 이전에는 고등학교 수준이었나?
멍하니 교과서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루이제는 아차 싶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오라버니 말씀처럼 많기는 하죠.”
살짝 떨리는 루이제의 동공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뒤늦게 떠올랐구나.
‘내가 미취학 어른인 걸.’
처음 루이제의 반응은 ‘오라버니는 학창 시절에 더 많이 배우시지 않았나요?’ 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더 심했다던데, 그 예전 졸업생인 네가 왜 그런 반응이냐는 뜻.
하지만 난 그 예전을 모른다. 아카데미 졸업은 커녕 입학도 한 적이 없으니까. 다행히 내 입으로 말하기 전에 루이제가 떠올려서 극히 어색한 순간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민망한 듯 시선을 교과서로 돌리는 루이제의 귀는 조금 빨간 상태였다. 탈룰라 학력 버전을 날릴 뻔했으니 아찔했겠지. 그래, 이해한다. 내가 특이한 케이스니까.
“아, 고문 선생은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았었죠?”
넌 이해 못해 이 탈룰라 새끼야.
갑자기 명치를 향해 훅 찌르고 들어오는 류티스의 말에 내 몸이 잠시 굳었고 루이제도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저 멀리 있는 에리히까지 흠칫해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그래, 그랬지.”
“이야, 사실 저도 아카데미 입학을 두고 고민 많이 했습니다. 졸업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먼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가리.’
저 말을 한 게 2과장이었다면 이미 한 대 팼다. 심지어 악의나 조롱이 섞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감탄이라 더 빡친다. ‘남들보다 빨리 적성을 찾아 일하니 대단합니다!’ 라는 말에 화를 내기도 애매하지 않냐.
“너도 아카데미에 오지 말고 다른 길을 찾지 그랬나.”
“글쎄요, 오고 나서 좋은 인연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겁니다.”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리는 류티스를 보며 나는 다른 의미로 웃음을 흘렸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그나마 개노답이 다섯에서 넷으로 줄어서 좋았을 것 같은데.
“그,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았어도 이미 대단한 분이잖아요. 전 그게 더 멋진 것 같아요.”
그래도 류티스가 악의 없이 칭찬을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파악한 루이제가 지원을 날렸지만, 애석하게도 딱히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난 아카데미를 다니지 못한 것 자체에 씁쓸해 하는 것이 아니다.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 이딴 길이라는 것에 미칠 것 같은 거다.
물론 류티스가 말한 것처럼 나도 이 길을 선택해서 여러 인연을 만나기는 했다. 그러나 가주에게 홀려 내 손으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도 마음 한구석에서 늘 미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고맙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쮸쀼쮸쀼 사태, 포켓몬스터 금 사태를 겪으며 제 나이가 본 나이보다 높게 평가 받고 있는 상황. 이 소제목을 결정하며 조금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한다네…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