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2)
로판 속 공무원 532화(533/945)
새해가 밝았다.
물론 새해라고 해봤자 어제까지는 작년이었으니 하루 사이에 극적인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굳이 변화를 찾자면 페디의 옹알이가 조금이나마 더 또렷해지고, 트릭시의 배가 더 부푼 것 정도일까.
‘크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트릭시의 배를 매만졌다. 무려 세쌍둥이를 품고 있어서 그런지 마르보다 3배는 빨리 커지는 느낌이다.
“힘들면 바로 말하고. 아무리 신년하례식이라도 임산부보다 중요하지는 않잖아.”
그렇기에 신년하례식 참가를 위하여 황궁으로 가기 전, 몇 번이나 트릭시에게 당부했다. 혹여나 몸이 불편하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신년하례식은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행사이니만큼 작위 귀족이 불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임산부라면 얘기가 다르다. 황권에 예민했던 역대 황제들도 작위 귀족이나 동반한 가족이 임신 중이라면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었지.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권위를 내세우려고 임산부를 가혹하게 굴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원망은 어떻게 감당하겠나. 권위를 세우려다 평판만 수직 하락하는 꼴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을 먼저 생각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아무튼 연이은 당부에 트릭시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눈치를 보느라 가만히 있을 입장은 아니잖니.”
“그건 그렇지.”
그것도 매우 설득력 넘치는 말과 함께.
확실히 트릭시는 황제와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신년하례식에 있을 짬이 아니다. 막말로 임신 중이 아니라 ‘마탑에 급한 일이 생겼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쳐도 누가 항의할 수 있겠나. 황제도 출튀 명분이라도 말해준 것에 고마워하며 보내줄 거다.
“주인님. 하디네르 남작이 왔습니다.”
그렇게 트릭시의 확답도 받았으니 슬슬 움직이려던 찰나, 집사가 다가와 에리히의 방문을 알렸다.
‘딱 맞게 왔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절묘한 시간대에 찾아와 만족스러웠다.
아니, 정확히는 에리히가 왔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저놈도 이제 굴러봐야지.’
당연하지만 아버지에게서 작위를 물려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내가 타일글레헨 백작이 되었듯 에리히도 하디네르 남작이 되었기에, 저놈도 신년하례식에 참가할 의무를 지니게 됐다.
게다가 에리히는 올해부터 제국의회 의원 대리직을 수행하게 되었으니, 신년하례식에 참가하는 수준을 넘어 다른 제국의회 의원들과 만남을 가져야 한다. 이제 제국의회 막내는 제노비아가 아닌 에리히지 않나. 가장 어린 신입이 어르신들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앞날이 꼬이는 법.
참고로 아버지조차 제국의원들 사이에서는 나름 젊은 편에 속했다. 제국의회는 에리히가 모셔야 할 어르신이 넘쳐나는 양로원이나 마찬가지다.
‘고생해봐라, 이 새끼.’
어두운 낯빛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에리히를 보며 흡족히 미소 지었다.
실로 인과응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반 대항전 때의 앙금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사람을 보고 여전히 원망을 가지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
‘…힘내라.’
이윽고 흡족함은 미세한 동정으로 변했다.
솔직히 나도 행정부에서 개처럼 구르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행정부가 아닌 제국의회에 갈 거냐고 묻는다면 온몸으로 거절할 자신이 있다. 그만큼 제국의회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다.
장관-부장-차장-과장이라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행정부와 달리 제국의회는 의원 전원이 동격으로 취급된다. 물론 의장이라는 직책이 있으나 그건 돌려가며 맡는 임기제 자리기에 사실상 조별과제 조장 같은 거고, 의원들 사이에서는 직책이 아닌 나이와 경력으로 암묵적 서열이 갈린다.
그런데 나이도 어리고 제국백 경력도 짧은 내가 제국의회에 입성해? 그나마 장관 대접받는 행정부와 달리 거기서는 진짜 막내 꼬맹이야. 죽어도 안 가지.
“어서 와라. 오는데 고생 많았지?”
그래서인지 내 앞까지 다가온 에리히의 어깨를 상냥하게 다독여줬다.
형의 명치에 죽창을 꽂은 79년도 시즌 에리히는 더 이상 없다.이 자리에 있는 건 형을 대신하여 지옥으로 들어간 80년도 시즌 에리히만 있을 뿐이다.
“그냥 텔레포트로 왔는데 고생은 무슨.”
봐라. 지금도 형이 부담스러울까 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나.
세상에 이런 훌륭한 동생은 두 명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저런 훌륭한 씹새끼는 두 명이나 존재하지 않을 거다.
“감찰성 창립은 상황 폐하께옵서 마지막으로 명하신 일이었다. 이는 제국의 안정과 관료들의 청렴함을 굳건히 하기 위한 뜻이셨으니, 그분의 뒤를 잇는 짐이 어찌 그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겠는가. 이에 짐은 지금껏 재무성에 속해 있던 감찰부를 감찰성으로 승격하며, 감찰부장이자 감찰성 창립 위원장이었던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백작을 정식으로 감찰성 장관으로 임명하겠다.”
신년사를 마친 황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감찰성의 공식적인 출범을 선언했다. 이건 황제에게서 누누이 들었던 얘기고, 짐작한 일이기도 했기에 노엽지 않았다.
“새롭게 탄생한 감찰성은 제국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이 될지니, 그 서열은 사법성 바로 다음에 두도록 한다.”
이 역시 납득할 수 있는 범위다. 제국 행정부서 서열 6위인 사법성 바로 다음이라는 건 감찰성의 서열을 7위로 두겠다는 뜻.
신규 부서치고는 높은 서열이지만 내 마음속 마지노선인 5위보다는 아래다. 예상보다 높은 것이 아쉬울지언정 분노를 표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또한 감찰성 장관은 부장 시절부터 감찰부를 훌륭하게 이끌었으니, 이는 오늘날 감찰성이 순조롭게 출범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것이다. 이 공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점차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공로가 가볍지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감찰부 운영이나 감찰성 창립 준비는 내가 아니라 차장이 다 했다고.
“짐은 그 공로를 고려하여 감찰성 장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 백작을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한다. 기사단원으로서의 봉토는 그라노에 백작령에 속한 제른일지니, 장관이 기사의 의무를 다하는 한 영원히 장관의 봉토가 될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물론 다른 귀족들도 할 말을 잃었다. 단순히 감찰성 출범만 선언하는 자리일 줄 알았는데, 감히 예상도 못한 화려한 타이틀이 붙어버렸다.
‘리시자리우네 기사단?’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리시자리우네는 에이만카 대제의 반려였던 전대 드래곤 로드의 이름. 둘 사이에서 태어난 드래곤이 리브노만 황가의 큰어른 대접을 받고 있으니, 그 모친인 전대 드래곤 로드에 대한 예우도 상당하다.
덕분에 리시자리우네의 이름을 딴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은 리브노만 백작과 버금가는 명예의 전당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인도 받을 수 있는 리브노만 백작과 달리 살아있는 자만 받을 수 있는 명예이며, 기사단원 임명 조건 중 하나가 귀족이어야 한다는 것.
‘…지금 단원은 네 명밖에 없지 않았나?’
그리고 현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의 단원은 고작 넷이다.
100년이 넘게 공작으로 군림하며 마법의 정점에 이른 트릭시.
동부 왕국들의 도전을 분쇄하여 제국의 천명을 굳건히 한 첫째 장인어른.
두 차례에 걸친 북방 원정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힌 전승공.
마지막으로 상황의 수족으로서 망해가던 제국을 재건한 일등 공신인 전대 궁내성 장관.
‘거기에 내가 낀다고…?’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저 망할 씹새끼가 대체 나한테 무슨 폭탄을 던지려고 이딴 짓을.
***
장관을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의 일원으로 임명하자 장관의 표정은 급격히 일그러졌었다.
이해한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이었다. 장관에게 리시자리우네의 이름을 내리는 건 느긋하게 20년 정도 후로 생각했었는데, 그걸 순식간에 앞당긴 것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어째 장관과 연관된 일이면 전부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다.
장관을 레온 왕국으로 파견하려면 아르메인의 사령관을 능가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륙 제일 검이라는 추상적인 명예로는 무인들에게 존중과 경외를 받을지언정 합법적으로 억누를 수 없다.
또한 레온에 파견을 간 장관이 정당하게 이권을 손에 쥐려면 제국의 귀족들도 고개 숙일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혼 중에 출장을 간 장관이 자기 주머니를 챙겨도 뒷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 황제가 직접 내린 이름. 그것이 장관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폐하, 감찰성 장관입니다.”
…물론 최선은 장관을 타국에 보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게 어려우니 이러는 거 아니겠나.
문밖에서 들리는 보고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이게 정답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성이 감정을 이기는 건 아니다.
“들라 하라.”
“예, 폐하.”
이제 장관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노력할 차례다.
***
2황자가 죽으면서 자동으로 리브노만 황가 제일의 개새끼가 되어버린 황제를 노려봤다.
“폐하, 송구하오나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분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여 다소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갑자기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 자리를 주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었더니,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올해 초에… 장관이 레온 왕국 원정군에 합류해야 할 것 같네.”
그리고 황제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민망했는지 은근히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민망한 걸 아는 새끼가 이런다고 생각하니 더 괘씸하다. 감히 신혼을 즐겨야 할 사람을 자국 출장도 아니고 타국 출장을 보내?
‘명치 쪽으로 한 대만 팰까?’
진지하게 고민된다. 혹시 이런 경우도 고려하여 미리 술 좀 마시고 왔으니, 법원에 끌려가면 심신미약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심신미약이고 나발이고 황제 시해다. 이건 술이 아니라 공업용 알코올을 들이마셨어도 감형이 되지 않는다.
“장관. 내 장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네.”
‘지랄하지 마.’
이해하는 새끼가 그딴 명령을 내려?
“막 태어난 자식을 두고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국경을 넘는 것이 쉬운 일이겠나? 심지어 장관이 파견을 갈 즈음이면 세 번째 결혼을 치른 직후겠지. 더더욱 발이 떨어지지 않을 걸세.”
구구절절 처맞는 말을 늘어놓는 황제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래놓고 ‘하지만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같은 말이 나온다면 진심 펀치를 날릴 각오를 다졌─
“하지만 장관. 난 장관의 신혼과 양육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네. 황제로서 마땅히 신하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어. 단지 상황이 따라주질 않았을 뿐이야.”
그렇게 말한 황제는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황태녀가 태어났을 때도, 황후와 결혼했을 때도 쉬지 못했네.”
듣는 이가 절로 흠칫할 발언을 한 황제의 표정은 굉장히 씁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