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3)
로판 속 공무원 533화(534/945)
갑작스러운 감성팔이 공격에 움찔하기는 했지만 다시 의지를 다잡았다.
황제도 휴식과 거리가 먼 인생이라는 건 인정한다. 본인 말처럼 황태녀가 태어났을 때는 양위가 임박한 상황이라 쉬지 못했을 테고, 황후와 결혼했을 때는 2황자에게 시달렸을 시기니 어떻게 쉴 수 있겠나. 그 두 경우 외에도 황제가 쉬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황제에게 휴가가 없다고 나까지 구르라는 법은 없다. 제국 공무원의 신혼, 양육 휴가는 법과 관례가 수호하는 공무원의 마땅한 권리니까.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권리가 없으면 그냥 노예잖아.’
이건 내 미래와 존엄이 걸린 문제다. 까딱 잘못하면 자조적인 농담을 담아 노예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소개를 노예라고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머리를 굴렸다. 황제가 감정 공격으로 나온다면 나도 논리적 항변이 아닌 감정에 호─
“물론 내가 쉬지 못한 것과 장관이 쉬지 못하는 건 다른 문제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안하다. 이 타이밍에 자신의 열악함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내 고통을 인정한다고? 대체 무슨 빌드업을 생각 중이길래 이러는 거냐.
“황제는 제국을 책임지는 자일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니 평범하게 쉬는 것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개인적인 욕망에 휘말려 서류를 손에서 놓는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고통스러워질 터.”
그렇게 말한 황제는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씁쓸히 쳐다봤다.
같은 공무원으로서 절로 가슴이 저려오는 눈빛이라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망할 새끼가 비언어적 표현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네.
“그러나 장관은 대체할 수 있네. 장관처럼 유능한 인재는 찾기 힘들지언정, 장관이 수행하는 임무를 남에게 맡길 수는 있어.”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라는 최고 사령탑과 달리 그 아래 장관들은 귀할지언정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 정도 자리를 비워도 제국의 인재풀과 관료제라면 얼마든지 공백을 메울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그걸 아는 새끼가.’
대체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새끼가 그동안 날.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르고 굴렸다고 해도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알고 굴렸다는 걸 공인 받았으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장관의 휴가를 보장하고자 했지. 아카데미 파견 중에도 방학 때는 최대한 쉬게 하고, 결혼식 이후에는 호출도 자제한 것처럼.”
그저 어디까지 지껄이나 두고 볼 생각으로 가만히 들었을 뿐.
휴가를 보장하기는 개뿔. 내가 휴가 중에도 일이 터져서 구른 게 한두 번이 아닐 텐데.
‘기억력이 안 좋나?’
혹시 2황자의 마차 테라스 와인 세트에 시달리던 시절에 뭘 잘못 먹었나? 그 부작용으로 이런 거라면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이해와 용서는 별개의 문제지만.
“애석하게도 언제나 보장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아니구나.’
뒤이은 발언에 황제의 청년 치매 가설을 폐기했다.
“허나 장관.”
“예, 폐하.”
“내가 장관의 휴가를 사적인 이유로, 가벼운 사유로 방해한 적이 있었나?”
“그건…”
순간 말문이 막혔다. 툭하면 휴가를 방해받은 건 나도 알고 황제도 인정하는 팩트지만, 별 같잖지도 않은 일이나 황제의 변덕으로 휴가가 깨진 적이 있었나?
‘없네?’
빠르게 머리를 굴렸으나 나오는 정보는 없었다.
‘왜 없지?’
시발, 이럴 리가 없어. 하나쯤은 있을 만한데?
혼란스럽다. 일단 가장 최근의 일이었던 공의회 사태는 교황의 초청이라 어쩔 수 없이 출장을 간 거지, 황제는 오히려 트릭시와 신혼여행이라도 즐기고 오라며 작은 배려를 해줬다. 딱히 황제가 작정하여 나를 엿 먹인 적은 없다.
심지어 귀국한 이후에는 출장으로 미뤄진 신혼 휴가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어차피 미뤄진 김에 조금만 더 일해줘.’ 같은 끔찍한 일은 없었다.
“에넨과 대제께 맹세코, 장관이 없어도 되는 일에 장관을 부른 적은 없다네.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장관이 아니면 안 된다는 판단이 내려져 부득이한 결단을 내린 것이야.”
그 혼란스러움에 쐐기를 박듯, 황제는 에넨과 대제를 들먹이며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다.
“장관. 아까 내가 황제는 대체할 수 없는 존재기에 편히 쉴 수 없다고 그랬었지.”
“예. 그랬사옵니다, 폐하.”
“그래,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오직 그런 경우에만 장관을 썼네. 장관이 없다면 제국과 신민이 고통에 빠질 때만 장관을 불렀어.”
어느새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이 새끼가 자기 입으로 자기 실수나 내 고통을 인정할 때는 무슨 생각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써먹으려고 복선 깔아둔 거였구나.
“내가 정당하다는 말은 아닐세. 황제가 오롯이 짊어져야 할 의무를 장관에게도 넘긴 꼴이니, 황제로서 어찌 당당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제국을 위해 충신의 정당한 권리를 내 손으로 뭉개버린 것인데.”
‘멈춰.’
이제는 손까지 떨렸다.
제발 닥쳐, 이 사악한 새끼야. 이번에는 대체 어떤 비수를 날리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
“그럼에도 나는 장관에게 완전한 휴가를 보장할 수 없다네. 황실과 제국을 위해서. 신민과 대륙의 평온을 위해서.”
황제의 양손이 자연스레 내 어깨에 올라왔다.
절로 소름이 돋았다. 내 어깨에 닿은 황제의 손길이 마치 소에게 쟁기를 씌우는 농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당장 오늘은 힘들 수도 있지. 1년 정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의 옹알이를 듣지 못해 괴로울 수도 있어.”
하지만, 이라고 덧붙인 황제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야 미래의 자식들이 행복할 걸세. 아르메인이 레온을 홀로 장악하면 훗날 아르메인이 다시금 제국에 도전할 거고, 레온이 불안정하면 동부 국경이 소란스러워질 거야. 우리가 지금의 평화와 행복에 취한 대가로 우리의 자식들이 미래의 고통을 감당해야 해.”
그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의지조차 들지 않았다.황제가 한 말은 단순히 자신의 편의나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닌, 미래 세대의 행복과 평온을 위해 부모인 우리가 희생하자는 말이다. 저런 명분을 어떻게 반박해.
아무리 초보 부모라도 부모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면 자식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자식의 미래가 언급됐는데 ‘그딴 거 알 바 아니니 휴가나 줘, 이 개 같은 놈아.’ 라고 할 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장관에게 휴가를 약속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황태녀에게 평화로운 제국을 물려줄 것이라고─ 장관의 자식들이 전선이 아닌 청사에서 근무할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실로 황송한 말씀입니다, 폐하…”
망할. 그 와중에 내 자식들은 청사에서 일하는 게 확정이냐.
게다가 이 새끼, 꼬박꼬박 자기를 짐이 아니라 나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니 황제가 아니라 같은 아빠로서 호소한 거였네.
‘지능적인 새끼…’
뒷배가 없던 시절에도 2황자한테 살아남은 괴물 같은 새끼…
내가 이 새끼를 지능이나 언변으로 이기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
분기 가득한 상태로 찾아왔던 장관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됐다.’
장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했다. 생각보다 말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장관을 무사히 설득하고 돌려보냈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
장관의 휴가가 깨진 경우는 잦았으나, 오늘처럼 분노를 표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장관은 단순히 휴가가 망가졌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분노한 이유를 알아채는 건 간단했다. 신혼을 즐기고, 아이를 낳고, 세 번째 결혼식을 앞둔 장관이 민감하게 반응할 일이라면 당연히 가족밖에 없다.
‘나도 같은 심정이니 알 수밖에 없지.’
이 세상 그 어느 남편이, 어느 아비가 가족을 두고 업무에 시달리고 싶겠나. 나도 같은 입장이기에 장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품은 사명감을 토대로 장관을 설득했다. 황후와 오붓한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마다 떠올린, 황태녀를 안고 산책을 하고 싶을 때마다 되새긴 다짐을 장관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야 미래의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장관도 가장이라서 다행이야.’
만약 장관이 미혼이었다면 먹히지 않았을 명분이다.
아니, 애초에 미혼인 장관이라면 휴가를 받았을 일도 없었나?
‘…결혼을 하면 짊어져야 할 게 많아지는 법이지.’
게다가 부인이 여섯이라면 여섯 배의 의무가 어깨를 짓누르는 법.
장관이 자초한 일이니 알아서 이겨낼 거라 믿는다.
***
연회장 구석에 처박혀 와인만 들이마셨다. 지금의 난 0.05 현명공 정도가 된 것 같다.
미치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뒤엎을 각오도 하며 찾아간 건데, 뒤엎기는커녕 완벽한 명분에 짓눌리고 왔잖아.
‘환장하겠네.’
심지어 태양전을 빠져나가기 직전, 온 김에 가져가라며 황제가 훈장 하나를 건네줬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국에서 단 네 명만 소유한 훈장이자, 제국 300년 역사를 통틀어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명예의 상징.
‘리시자리우네 기사단.’
내가 들고 있기에는 너무 과분한 물건이라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내가 현 실세라지만, 이 훈장은 실세라고 전부 받을 수 있는 훈장이 아니다.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 된 것을 빙의 전 세계로 비유하자면 대충 문묘 배향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니, 나는 무인이니 무묘 배향인가? 그런데 무묘라는 게 존재했던가?
‘알 게 뭐야.’
어차피 일이 대차게 꼬인 건 변하지 않는데.
‘…리제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새 와인병을 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결혼식을 앞둔 부인에게 ‘나 결혼 끝나면 타국 출장 가.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인생 시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부인을 울려야 하다니.인생이 너무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