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5)
로판 속 공무원 535화(536/945)
에리히의 조언 덕분에 인간 관계 속의 진리를 깨달았다.
바로 무언가를 말할 때는 말했다는 사실보다 말하는 시기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용서를 빌 때는 맨입이 아닌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 이게 진리가 아니면 무엇이 진리겠나.
“레온… 왕국이요?”
물론 빠른 자백과 두둑한 선물을 보장하더라도 상대가 충격을 받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올해 초에 타국으로 출장─ 이라는 이름의 군사 원정을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자, 리제는 멍한 얼굴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더니 나지막한 의문을 표했다.
“왜요?”
너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의문이라 흠칫하고 말았다.
차라리 내 말에 원망이나 분노, 슬픔을 보였다면 겸허히 받아들였을 거다. 리제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고, 나에게는 반드시 그러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리제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괜히 말했나?’
오죽하면 진리를 접한 나조차 잠시 후회할 정도였다. 그냥 결혼식 이후에 말하는 게 맞았나?
아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반응이 예상과는 다르지만 지금 말한 게 맞아. 까딱 잘못했으면 레온으로 가기 직전에 리제가 저런 모습을 보였다는 거잖아. 새 신부의 멘탈을 터뜨리고 먼 길을 떠날 뻔한 거다.
“오라버니는 감찰성 장관이잖아요. 장관이 왜 타국에 가요?”
허나 명치 쪽으로 날아드는 강한 팩트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외무성 장관이면 외교 문제로 타국에 갈 수 있다. 전쟁성 장관이면 군사적 조약이나 국경 긴장감 완화 등의 명목으로 타국 군부 대신과 만날 수도 있다. 만약 행정부 공무원이 아닌 군인이라면 원정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니 논할 것조차 없다.
그런데 국내 안정과 귀족들의 기강 유지를 담당할 감찰성 장관이 타국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갈 이유가 없다.
“그게, 감찰 업무로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유로 가는 거라서 그래.”
내가 순도 100% 감찰 업무만 하는 놈이라면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황제가 나를 레온으로 보낸 것은 실질적 업무가 아닌 위압용 토템으로 삼기 위해서다. 대륙 제일 검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얻은 이후로, 대륙 무인들은 나에게 은근한 존경과 경외심을 보이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내가 아르메인 왕국군 앞에서 팔짱만 끼고 있어도 제국군은 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 양국이 사이좋게 레온의 이권을 나눠먹자고 손을 잡기는 했지만, 정확한 분배 비율은 설정하지 않았으니 그 우위는 제국의 국익으로 직결된다.
요악하면 황제는 나를 레온으로 보내지 않을 이유보다 보내서 얻을 이득을 크게 여긴 거다. 개 같은 새끼.
“그래도 어려운 일은 아니야. 나는 자리만 지키면 되는 일이니 위험하지도 않고.”
슬슬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한 리제의 모습에 황급히 덧붙여 말했다.
“…원정군에 참여하는데 위험하지 않다고요?”
“진짜야. 원정군은 맞는데, 싸우러 가는 건 아니야.”
그리고 북방의 일이 떠올랐는지 믿을 수 없다는 리제의 눈빛에 더욱 열정적으로 혀를 놀렸다.
원정군이지만 싸우지 않는다.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라는 수준의 발언이나, 정말로 이번 레온 원정은 북방 원정 때처럼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다. 레온 왕국은 제국군의 진군을 막을 여력도, 의지도 없을 테니까.
약 30년 전의 패전 이후로 나날이 쇠락해가는 국력, 유일한 왕위 계승자의 사망으로 사실상 무너진 왕가, 양쪽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오는 국력 1, 2위의 승냥이들.이 기적적인 상황 속에서 이 악물고 제국과 대항할 귀족은 레온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귀족들은 지난 전쟁 때 전부 죽었을 테니.
‘전쟁이 아니라 여행이나 마찬가지지.’
내가 괜히 이번 출장이 확정되었을 때 ‘신혼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반발한 것이 아니다. 레온 왕국 원정은 전혀 위험하지 않은, 그저 타국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거슬리기 짝이 없는 업무라 그런 거다.
솔직히 제국군과 아르메인 왕국군이 나란히 레온에 입성하면 대다수 레온 귀족들은 앞다투며 협조할 거다. 걔네도 패전 이후로 기존 왕가에 불만이 많았다고 하니까. 기껏해야 외국이라는 존재에 학을 떼는 쇄국주의자, 혹은 타국의 간섭 없이 본인이 새로운 왕이 되고 싶은 제왕병자 정도만 반발하겠지.
그리고 그런 현실 감각 없는 머저리들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토벌이 가능하다. 근처 영주들에게 저 새끼 영지 나눠줄 테니 알아서 정리하라고 하면 기꺼이 찢어 죽일걸.
“그, 그래도, 결혼한 직후에… 오라버니만 타국으로 보내는 건…”
다행히 리제는 내 열정적인 설득에 이번 출장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리제가 내 안전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전부 해결된 거나 다름없다.
“매일 저녁마다 돌아올게.”
신혼 중에 떨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은 가볍게 무마할 수 있으니.
“…네?”
타국으로 원정을 간다는 놈이 매일 저녁마다 퇴근하겠다는 기적의 모순. 그 정신 나간 발언에 울먹이던 리제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이윽고 눈동자에 아주 미세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머리를 다치거나 정신에 병이 들었는지 걱정하는 것처럼.
평소라면 타당한 걱정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나는 매일 저녁마다 리제의 곁으로 돌아올 거다.
“텔레포트가 있으면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잖아.”
그런 리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말했다.
레온 원정 동안 난 현역이 아니라 상근이 된다. 다 망해가는 약소국의 국경 따위는 나와 리제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이게 정답이야.’
솔로몬 뺨치는 해결책에 스스로도 뿌듯했다.
사실 에리히의 조언을 들은 직후에는 단순히 영지만 선물로 들고 오려고 했는데, 리제의 성격상 부동산을 받는다고 기뻐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야망이 넘치는 사람이면 모를까 리제는 영지 대신 나와의 시간을 택할 순수하고 선량한 아내다.
그래서 리제가 진심로 좋아할만한 선물을 생각했다. 영지도, 나와의 시간도 전부 챙길 수 있는 방법.
‘까짓것 출퇴근하면 된다.’
어차피 이번 원정은 중요한 군사 작전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나는 아르메인이나 레온의 고위직을 상대할 때만 얼굴을 비치면 된다.
물론 막 떠올린 방안이기에 황제의 허락은 받지 않았다. 어쩌면 타국 원정 중에 텔레포트로 출퇴근한다는 희대의 방식에 기함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라고.’
기함이 아니라 졸도를 해도 알게 뭐야. 신혼 중인 사람이 타국으로 가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꼬우면 나 말고 다른 사람 보내든가.
‘다른 사람 보내면 나야 좋지.’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레 웃었다. 황제가 내 방법을 용납하든 기각하든 손해는 없다. 용납하면 신혼 중에 출근하는 것이 아쉽지만 평범하게 퇴근할 수 있고, 기각하면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드러누울 거다.
내가 그 새끼를 위해서 구른 세월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정당한 권리 요구다. 심지어 내가 일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퇴근만 제때 하겠다는 건데, 거절하면 개새끼지.
‘개새끼가 맞긴 하지만.’
적어도 선을 모르는 개새끼는 아니다.
리제를 달랜 후, 황제에게 보고를 가장한 통보를 했다. 레온 원정군에 합류하는 동안 나는 텔레포트 마법사를 통해 출퇴근을 하겠다고.
그리고 답변은 생각보다 빨리 날아왔다.
[ 허한다. ]구차하게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다면’이라거나, ‘급박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등의 조건도 붙지 않은 짧고 알찬 답변.
‘좋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라 흡족스러웠다. 역시 황제는 개새끼지만 선을 아는 개새끼다.
이제 종족이 사람으로 바뀌기만 하면 정말 좋을 텐데.
“뭘 보고 혼자 웃는 거냐.”
그렇게 입꼬리를 씰룩이는 사이, 맞은편에 앉은 첫째 장인어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런.’
그러자 어른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한 게 불편하신 듯,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장인어른의 모습이 보였다.
장인어른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실례가 맞다. 하지만 현역에서 상근이 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 않나. 솔직히 이건 장인어른도 인정하실 사안이다.
“폐하께서 제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바로 지금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불쾌한 기색을 보였던 장인어른은 감동적인 상근 전환 소식에 안색을 피셨다. 내가 상근이 된다면 마르와 페디 곁에도 남는다는 것이니, 장인어른 입장에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다.
“전장에 나선 군인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나, 너는 군인이 아니니 괜찮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뒤이은 장인어른의 말씀에 본능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군인도 아닌 내가 왜 타국에서 굴러야 하냐. 애초에 군부로 도망가려던 나를 감찰부에 박아넣은 건 황제잖아. 군인이었으면 기꺼이 종군했을 텐데 황제가 방해했다.
“대신 폐하께서 네 청을 들어주셨듯, 너 역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그를 위해 이것을 가져온 것이니 명심하거라.”
“아, 예.”
그 말에 내 시선이장인어른 손에 들린 ‘이것’으로 향했다.
‘저게 장인어른한테 있었네.’
조금 놀랐다. 장인어른이 내게 건네려고 한 물건은 인장이나, 당연히울켄 공작의 인장은 아니다. 그건 이미 반쯤 은퇴한 장인어른 손에서 벗어나 소공작인 형님 주머니에 들어가 있다. 정작 본인은 장인어른께 돌려드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것 같지만.
“가지고 있으면 제법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잘 보관해라.”
“물론입니다.”
신신당부하며 건넨 인장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당부를 듣지 않아도 당연히 잘 보관했을 거다.
‘전대 공작의 인장.’
정확히는 레온 왕국 유일 공작(이었던 자)의 인장.
저게 왜 장인어른 손에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