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6)
로판 속 공무원 536화(537/945)
폭풍과도 같던 신년하례식이 끝났다.
아니, 솔직히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감찰성 장관이라는 직책,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라는 명예, 타국 출장이라는 족쇄를 동시에 받았으니 폭풍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 같다. 이 정도면 거의 핵폭격 수준이 아닐까?
‘짜르봄바 같기도 하고.’
사자 모양으로 조각된 은빛 인장을 보며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앞선 세 가지 요소가 평범한 핵이라면 이 인장은 짜르봄바다.
골치 아프다. 당시에는 장인어른이 직접 주시는 거라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는 했는데, 이성을 되찾고 나니 너무 과한 걸 손에 넣고 말았다.
‘이거 국보잖아.’
물론 제국의 국보가 아니라 레온 왕국의 국보다. 그것도 레온 왕국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역사적인 보물.
그런 물건이 어쩌다 장인어른 손에 흘러가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30년 전에 레온 왕국을 영혼까지 털어버린 장본인이 장인어른이니, 그때 겸사겸사 파밍이라도 하셨나 보지. 마침 장인어른 손에 죽은 레온 왕국의 귀족 중에 공작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인장이 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역사가 깊어서 보물이 된 것도 아니야.’
손가락으로 툭툭 인장을 건드리다가 정보부장이 보내준 서류를 다시 잡았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짧고 간단했다. 제국의 공작이 다섯으로 고정된 것처럼 레온의 공작도 오직 한 명뿐이며, 초대 공작은 레온 왕국 건국기 때 누구보다 화려한 공적을 쌓은 둘째 왕자였다는 내용. 그리고 그 둘째 왕자는 자신의 존재가 형을 위협할까 두려워 스스로 변방으로 물러났고, 이에 감동한 첫째 왕자는 즉위하자마자 동생에게 공작위를 하사했다는 훈훈한 미담.
실로 감동적인 일화지만 공작위와 함께 하사한 인장이 내 눈앞에 있는 저 은빛 사자 인장이라는 게 문제다. 즉, 저 인장은 레온 왕실과 공작가가 나란히 연관된 특급 국보라는 의미.
‘레온의 공작위는 공석이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30년 전의 전쟁으로 인해 레온 왕국의 유일 공작가─ 디네루아 가문은 화려한 빛을 내며 소멸했고, 작위의 상징인 인장마저 장인어른이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덕분에 레온 왕국에는 아직도 공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작위를 주장할 만한 계승자들도, 공작의 권위를 상징할 보물도 사라졌는데 어떻게 공작을 자처하겠나. 아마 장인어른도 그걸 노리고 인장을 파밍한 게 아닐까 싶다. 레온의 공작령이 제국의 국경과 가까웠던 만큼 장인어른 입장에서도 제일 먼저 처리해야 할 존재였을 테니.
‘이걸 어디다 쓰지?’
아무튼 인장의 가치를 깨달을수록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사위를 믿고 보물을 넘긴 장인어른의 마음씨에는 감사하지만, 이 미천한 사위는 마땅한 활용법을 찾지 못했다.
이게 왕실, 공작가와 연관된 특급 국보기는 하다. 그런데 국보를 애지중지할 왕실은 무너지기 직전이고, 전 소유자인 공작가는 이미 죽었다. 인장 반환을 조건으로 권리를 뜯어내기에는 받아 갈 주체가 없다.
…
‘공작도 새로 세울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왕가를 교체하러 가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겸사겸사 공작을 새로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괴뢰를 세우는 거라면 하나나 둘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다행히 적임자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적당히 제국에 숙일 줄 알고, 덩치도 있는 놈한테 이 인장을 흔들어 보이면 알아서 자기 꼬리를 흔들 거다. 레온의 유일한 공작이 쓰던 인장이 자기 손에 들어온다? 공석인 공작위를 주장할 명분으로는 충분하지.
마치 전국옥새를 손에 넣은 꿀물좌처럼.
‘괜찮네.’
왕가는 아르메인과 합의를 보며 세워야 하지만, 이 인장을 활용하면 유일한 공작을 제국의 의향대로 세울 수 있다. 무려 30년 전에 제국이 확보한 전리품을 활용하는 것이니 아르메인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다.
좋아.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지만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더 고민해 봤자 이것보다 쓸만한 활용법은 떠오르지 않을 거다.애초에 사람을 줘패는 것밖에 못 하는 감찰쟁이한테 고도의 지능 플레이를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일이야.
‘이 문제는 넘어가고.’
게다가 현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의 나라 공작위 따위가 아니다.
‘…하객 범위는 어디까지 잡아야 하지?’
조만간 아티니 남작령에서 진행할 리제와의 결혼식.
망국을 눈앞에 둔 약소국의 공작위 따위보다 이게 더 중요하다.
리제는 자신의 고향이자 훗날 물려받을 영지이기도 한 아티니 남작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를 원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난감했다. 남편으로서 부인의 한 번뿐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려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앞선 마르와 트릭시도 성대한 규모의 결혼식을 치렀으니, 리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허나 리제는 앞선 두 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뒤에 있는 세 명을 염려했다. 자신마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면 뒤에 결혼할 사람들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자신은 평범하고 소소하게 진행하고 싶다 말했다.
“고향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결혼식도 즐겁잖아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히히 웃는 리제의 말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지. 결혼식의 주인공이 작은 결혼식을 원하는데 뭐 어쩌겠어.
다만 결혼식이 작다고 하객도 대충 고르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작게 올리는 만큼 철저히 소수 정예 컨셉으로 하객을 선정해야 한다.
“청첩장도 세 번이나 쓰니까 손에 익네.”
“앞으로 세 번 더 쓰셔야 합니다.”
그렇게 심사숙고하여 작성한 수필 청첩장을 집사에게 건네니, 집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 농담을 받아줬다.
하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나 이러다가 제국 제일의 청첩장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내 자식들이 결혼하면 청첩장은 내가 작성해야 할 것 같은데.
“저기, 그런데 주인님.”
“응?”
“셋째 마님은 조용한 결혼식을 원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 이분들께 보내도 되겠습니까?”
집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픽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결혼식 규모에 비하면 하객들은 하나하나가 거물이었으니, 집사가 그런 의문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조용한 것과 누추한 건 다르지.”
그러나 조용한 것은 하객의 숫자가 적은 것으로 해결했다. 하객의 숫자가 아니라 마땅히 초대해야 할 사람들도 걸러낸다면 그것은 누추하고 부족한 결혼식으로 전락해버린다. 리제의 추억을 그렇게 망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중에서 누구를 빼기도 애매하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다시 청첩장 수신자를 확인한 집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하객들의 격이 거의 동등한지라 한 명을 빼면 전부 빼야 할 수준이고, 하나를 넣으면 전부 넣어야 형평성에 맞는다. 축하받아야 할 결혼식 때 뒷얘기가 나올 바에는 거물들의 사교장으로 만드는 것이 옳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난데없이 자신의 영지가 핫-플레이스로 변할 셋째 장인어른인데…
‘이 참에 내성 좀 쌓으셔야지.’
조금 잔인한 말이지만 셋째 장인어른은 충격요법을 받으셔야 한다. 이미 첫째 장인어른과 트릭시를 만나며 많은 내성을 쌓으셨을 수도 있으나, 그 둘은 남남이 아닌 가족으로서 만난 것 아닌가.
나와 정식으로 장인-사위 관계가 된다면 셋째 장인어른은 남작이라는 작위가 무색할 정도로 사교계의 중심에 서게 될 거다. 지금까지는 장인어른이 영지 밖으로 나가지를 않아서 별 소란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장인어른에게 붙어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것들이 직접 영지까지 올 터.
평범한 소영주로 지내신 장인어른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다. 작정한 승냥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얼마나 귀찮은데.
‘평범에서 벗어나셔야 한다.’
그러니 장인어른은 평범한 소영주에서 비범한 소영주로 각성해야 한다. 승냥이 따위가 아닌 진짜 거물들을 대하는 게 익숙해지면 승냥이가 몰려와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며, 거물들을 인맥으로 삼으면 어쭙잖은 것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책상 한구석에 둔 하객 명단을 바라봤다.
[ 황제, 황후, 현명공, 철혈공, 전승공, 황금공, 이드라펜 후작, 이오네스 후작… ]‘화려하긴 하네.’
이 화려함이 장인어른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절대 장인어른 영지에 불을 질러놓고 변명을 하는 게 아니다.
정말로.
***
새해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정확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리제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날부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나뿐인 딸을 도둑놈에게 넘길 수 없다, 같은 고전 소설 이야기는 아니다. 딸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런 딸을 부족함 없이 아껴줄 수 있는 예비 사위를 만났으니 어찌 그런 마음을 품을까.
그저 늘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아이가, 밝고 명랑하여 가문과 영지의 자랑인 아이가, 부족한 부모 때문에 아픈 유년기를 보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보.”
“부인.”
홀로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부인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역시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부인도 리제의 어미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잘 알─
“남들 보여주기 부끄럽게 왜 궁상을 떨고 있어요? 리제가 어디 팔려가는 것도 아니고.”
아니었다.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는 날은 빠르든 늦든 찾아오는 법이에요. 그럴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웃으며 보내주는 거고요.”
차가운 말이었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부인의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
부인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나를 위로하기 위해 덤덤한 척을 하는 거다. 그렇다면 계속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보내야지.’
그래, 자식은 언젠가 부모의 품을 떠나는 법이다. 가문의 후계자인 리제가 영지 밖으로 나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좋은 남편을 만난 것이니 슬퍼할 일은 아니다.
리제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갈 것도 아니지 않나.
‘너는 꼭 행복하렴.’
우리의 부족함으로 떠난 네 언니 몫만큼.
‘꼭 행복하게 해주길.’
그리고 우리의 뒤를 이어 너와 함께할 남편에게 기도했다. 우리의 몫만큼 너를 행복하게 해달라고.
며칠 후, 내 기도가 닿았는지 예비 사위에게서 연락이 왔다.
–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확답을 보낸 분들 명단입니다.
“…….”
다만 기도가 조금 이상하게 닿은 것 같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게 아니라면 이런 명단이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