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7)
로판 속 공무원 537화(538/945)
하객 명단을 들은 셋째 장인어른은 크게 감동하신 듯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셨다. 조용하고 아담한 결혼식을 원하는 리제의 뜻에 부응하여 정말 소수 정예 컨셉으로 선별했으니 당연한 일. 전체적인 하객 숫자는 적을지라도, 하객 하나하나는 일기당천이나 마찬가지인 거물들이었다.
물론 어느 행사에 거물이 참석하면 그 거물을 중심으로 소란이 생기나, 그건 거물에게 잘 보이기 위한 소시민들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다. 전부 거물만 모이면 그럴 걱정도 없다.
‘완벽하다.’
유일한 변수를 꼽자면 현명공이기는 한데, 그마저도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아무리 몸속에 피 대신 알코올이 흐르는 사람이라도 ‘현명’공이지 않나. 어떤 극한의 상태에서도 사리분별이 가능하기에 현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애초에 마르랑 트릭시가 결혼할 때도 박수만 치다 돌아갔잖아. 그 사람은 친척의 결혼을 격하게 축하할지언정 방해를 할 사람은 아니다.
‘술만 덜 마시면 완벽한 사람인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나. 에넨이 현명공을 과도한 지능캐로 만든 게 아차 싶었는지, 급히 넣은 페널티가 알코올 중독인 것을.
아니, 마음만 먹으면 취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니 중독은 아닌가? 그런데 그러면 중독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퍼마시는 미친 사람이라는 건데.
…
“그럼 결혼식 전날에 미리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하려고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존재를 애써 머리에서 지우며 입을 열었다.장인어른의 영지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것이니 당일에 쓱 나타나는 게 아니라 미리 방문하겠다고.
– 그래? 이거 사용인들이 귀한 손님을 맞이하느라 고생 좀 해야겠어.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다소 어두웠던 장인어른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지금까지 장인어른은 리제에게 영지로 오라는 재촉이나 권유를 하지 않으셨다. 리제가 스스로 오는 것만을 기다리셨지. 하지만 유일한 딸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딸을 떠나보내기 전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으셨을 터.
그럼에도 리제를 영지로 부르지 않은 건 장인어른 나름의 배려이자 걱정이었을 거다. 다른 부인들이 내 곁에 있는 상황에서 자기 딸만 거리가 멀어지면 혹시 마음도 멀어지지 않을까─ 같은 걱정.과한 걱정이지만 상대적으로 가문의 격이 낮은 장인어른으로서는 온갖 가능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장인어른이 걱정할 필요 없는 완벽한 명분과 함께.
“이미 무엇보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가볍게 준비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장인어른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네.’
보는 사위가 절로 흐뭇해지는 표정이라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은 인상을 수시로 심어야 장인어른 마음속 내 이미지가 감찰성 장관에서 완전한 사위로 바뀌겠지.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목표다. 장인이 어려워하는 사위가 될 생각은 절대 없다.
‘이 세상 모든 장인어른이 첫째 장인어른 같았으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창문 밖으로 던져질 사위도 많아지겠지만 알 바 아니다.
일단 나는 던져질 일이 없으니까.
***
발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하얀 들판과 매끄러운 강이 보였다.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내 고향 아티니, 내가 사랑하는 아티니의 모습이다.
“하얗네요.”
“그러게. 여기는 눈이 많이 왔다.”
오라버니의 말처럼 아티니는 제도와 달리 눈으로 가득했다. 제도는 눈이 많이 오는 편이 아니고, 오더라도 원활한 통행을 위해 금방 치워버리니까.
반면 아티니는 겨울을 그대로 간직했다. 차가움이 아닌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새하얀 겨울을.
“아티니는 1년 내내 아름답지만, 이상하게 전 겨울인 아티니가 더 좋았어요. 정작 제가 태어난 건 봄인데… 봄을 관장하는 천사가 있다면 서운해 할 일이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봄이나 가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이 순백의 아티니를 좋아했다.
내가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 태어나서 겨울에 미련을 가진 건지, 아니면 봄이든 겨울이든 육체적으로 일할 일이 없어서 편한 소리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눈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다거나 강이 얼어 물고기를 잡기 어렵다고 말하는 걸 보면 후자 같기는 해.
그래도 사랑하는 오라버니와 사랑하는 아티니를 보고 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어쩌면 에넨께서 나를 만드실 때, 내 결혼식이 겨울이 될 거라고 미리 정하신 거 아닐까? 그래서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신이 정한 운명.’
눈을 깜빡이다가 쿡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신의 축복을 받은 복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정말 신이 정한 결혼 같잖아.
“리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오라버니랑 같이 오니 좋아서요.”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놀란 오라버니에게 살며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신이 정한 결혼이라고 하면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별로다. 나는 누군가의 개입이 아닌 나 자신의 의지로 오라버니를 사랑하게 된 거다. 내 의지로 오라버니에게 고백을 하고, 오라버니의 아내가 된 거야.
그 과정에서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다. 설령 운명이 있다면 행정부 관료인 오라버니가 아카데미에 온 기적과도 같은 확률이지, 내가 오라버니에게 느낀 감정은 온전히 내 의지야.
“오라버니.”
“응?”
“저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오라버니는 픽 웃으며 나를 껴안아줬다.
“나도 고마워. 나를 좋아하고 곁에 있어줘서.”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늑한 품이라 한동안 눈을 감으며 오라버니의 온기를 느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직접 마중을 나온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계속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자 사용인들이 맞이해줬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세상에! 그새 더 예뻐지셨어!”
특히 하녀들이 유독 요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익숙한 반응이기에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동안의 경험상 이 다음에 이어질 말은 뻔하다.
“역시 멋진 연인을 찾으셔서 그런 건가요?”
그 말에 하녀들은 물론 다른 사용인들도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라버니와 연인이 된 이후로, 영지에 들릴 때마다 하녀들은 내 연애를 언급하며 놀림 섞인 축하를 건네기에 바빴다. 약혼자는커녕 친한 이성 친구도 없이 성인이 된 내가 갑자기 아카데미에서 연인을 만들었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럼… 저분이 감찰성 장관님?”
오늘은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오라버니도 같이 왔다는 것.
내 또래 하녀들의 대장 격인 제나의 말에 성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라버니에게 몰렸다. 지금까지 사용인들은 오라버니에 대해 듣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오라버니를 향한 시선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오라버니는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심복이자 감찰성의 수장인 실세 중의 실세잖아. 고위 귀족들도 무서워하는 오라버니를 남작가의 사용인들이 편히 대할 수는 없─
“멋진 연인이라니. 이상한 말을 하네.”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던 오라버니가 시선을 느꼈는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멋진 연인이라는 말을 했던 하녀의 몸이 떨렸다. 자기가 한 말을 제국의 실세가 직접 부정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오라버니의 표정을 보니 하녀를 탓하거나 불쾌감을 표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닐 테니까.
“이제는 멋진 남편이지. 이 차이가 중요한 거니 틀리면 곤란해.”
작게 웃음을 터뜨린 오라버니의 모습에 사용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리거나 어색한 눈빛 교환을 나눴다.
“…재미 없었나?”
“전 좋았어요.”
아주 조금 기가 죽은 듯한 오라버니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아직 사용인들은 소문 속 오라버니와 현실 속 오라버니 사이의 괴리감을 모를 테니 내가 아니면 받아줄 사람이 없다.
***
전쟁고아인 피네를 제외하면 내 부인 중 가장 가문의 격이 낮은 사람은 리제다. 다른 부인들의 가문은 고위 귀족으로 분류되는 백작가 이상인 반면, 리제만 홀로 남작가니까. 이 때문에 셋째 장인어른이 은근히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가주이자 작위 귀족인 장인어른조차 그러니 나이어드 가문의 사용인들은 말할 것도 없을 터. 그렇기에 사용인들과도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기 위해서 나름 친밀한 표정과 농담을 꺼냈다. 나는 앞으로 나이어드 가문의 사위어야지, 윗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허나 의도만 좋았지 결과는 별로였다.
‘망할.’
잠시 잊고 있었다. 평소 내 근처에는 연인이나 부하들밖에 없어서 무슨 말을 꺼내도 반응이 좋았지만, 내 객관적인 유머 감각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나와 연관 없는 사람들에게 회심의 농담을 해봤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다.
“전 좋았어요.”
심지어 리제의 위로에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내가 아니면 웃어줄 사람이 없으니 자제해.’ 라는 확인 사살로 들렸으니까.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지, 나이어드 가문의 성을 돌아다니다가 사용인들과 마주치면 나름 평온한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물렁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다.
‘이거면 됐어.’
그래, 이거면 됐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 첫 만남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응?’
그렇게 나이어드 가문의 성을 배회하는 사이, 품 속의 통신구가 짧게 진동했다.
요즘 문자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느긋하게 통신구를 꺼냈다. 이번에도 결혼 축하 문자겠지.
[ 상황 폐하께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작년에 수확한 농산물을 선물로 보내겠다고 하시는데, 밀하고 사과 중에 뭐가 좋은가? ]‘이게 뭔.’
그리고 통신구를 꺼내자마자 황제가 보낸 기괴한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축하 문자기는 했다. 축하 인사를 하는 주체와 그 수단이 조금 독특해서 문제일 뿐.
[ 사과로 부탁드립니다. ]멍하니 통신구를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준다는 걸 거부할 생각은 없다.
‘상황이 직접 기른 사과…’
하나 정도는 마법으로 영구 보관하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