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38)
로판 속 공무원 538화(539/945)
결혼식 전날인 오늘만큼은 리제의 시간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양보했다. 소중한 딸을 허락해 주신 두 분께 하루의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으니까.
허나 리제가 두 분과 같이 지내면 내가 외톨이가 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되나?’
아티니 남작성의 정원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오는 처가, 처음 보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멀뚱히 혼자 있으려니 너무 눈치가 보인다.
정확히는 사용인들이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져 슬쩍 정원으로 나왔다. 괜히 방에 있으면 불편한 점은 없냐고 10분 단위로 확인하는 사용인들에게 시달리겠지. 그건 나도 머쓱하고 사용인들도 고역인 일이다.
물론 귀한 손님이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긴장되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산책하는 손님에게 필요한 게 없냐고 달라붙지는 않는다. 그거면 충분해.
‘다섯 바퀴만 더 돌아야지.’
그렇게 정원을 한 바퀴 돌자마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실 꽃들도 진 겨울 정원에서 뭐 볼 게 있겠냐마는, 저녁 먹기 전까지 가볍게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다.
***
“아직도 돌고 있구나.”
창문 밖을 내다본 아버지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오라버니가 한 겨울에 바깥을 어슬렁거리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저렇게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데.”
어머니도 오라버니의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다가가셨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어머니의 얼굴에는 희미한 흐뭇함도 깃들어있었다. 가문의 사용인들을 배려하는 오라버니가 기특한 것처럼.
“마음 같아서는 편히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봤자 지금은 서로 어색하겠지. 이건 시간이 해결할 문제겠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자주 봐야 해결될 문제죠.”
두 분의 대화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말로는 오라버니와 사용인들 사이의 거리감을 위한 논의였으나, 그 속내는 나에게 ‘집에 좀 자주 와라.’ 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 은근한 부탁 겸 압박에 민망하고도 죄송했다. 확실히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부터 영지에 얼굴을 비친 횟수는 극히 적었잖아. 말로만 사랑하는 고향, 정겨운 고향이라고 했지─ 정작 내가 선택한 건 사랑하는 오라버니 옆이었다.
“앞으로는 오라버니랑 자주 찾아뵐게요.”
그렇기에 헤헤 웃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아니, 이건 항복이라기보다 당연한 의무 수행이 아닐까? 딸과 사위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바쁜데 무리해서 오지는 말고. 통신구로도 충분─”
“온다는 걸 굳이 만류하진 마세요.”
“어억!”
살며시 고개를 젓는 아버지의 옆구리를 어머니가 빠르게 찌르셨다.
저 광경도 오랜만에 본다. 아버지가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거나 주춤거리면 어머니는 저렇게 응징하셨고, 강렬한 자극으로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의 제안대로 일을 진행하셨다.
‘저렇게 할 정도였어?’
그런데 망설임 없이 응징하실 정도로 나랑 오라버니의 방문은 중요한 안건이었구나. 진작에 자주 찾아오지 않은 내가 절로 죄송스러울 정도다.
“리제야.”
“아, 네.”
잠시 그동안의 행적을 반성을 하는 사이, 빠르게 회복한 아버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나도 네 엄마처럼 너와 사위를 자주 보고 싶기는 하단다. 이 세상 모든 부모가 같은 심정이겠지.”
하지만, 이라고 덧붙인 아버지는 조심스레 나를 껴안으셨다.
“언제 어디서나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야. 부모 때문에 자식이 고생할 필요는 없어.”
그 말에 전투 태세였던 어머니의 표정도 누그러들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는 단순한 배려가 아닌, 과거부터 이어진 한과 슬픔이 담겨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무슨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시는지 알 것 같기에 나도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스스로 이런 말을 꺼낸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렇게까지 하며 나를 생각하는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해서.
“전 언제나 두 분 덕분에 행복했어요.”
“그러면 앞으로도 행복해야지.”
“네, 꼭 그럴게요.”
아마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금쯤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거다. 우리의 소홀함으로 인해 우리 곁을 떠난 가족을. 두 분은 당신들이 부족해서 잃었다고 생각한 딸을.
그럼에도 우리는 굳이 그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으니.
“아버지.”
“말하렴.”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일까요?”
내 말에 아버지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작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 사위가 양보해 준 귀한 시간이니 좋은 곳에 써야지.”
조금 딱딱해질 뻔한 분위기가 다시 풀렸다.
‘…오랜만에 보러 갈게, 언니.’
우리와 홀로 떨어져 있는 가족을 떠올리며 슬며시 포옹을 풀었다.
둘도 없는 경사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그렇기에 가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언니를 향한 우리의 유일한 노력이니까.
***
세 번째 결혼식 날이 밝았다.
이렇게 말하니 세상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 된 기분이지만, 일부다처가 당연한 세계에서 세 번이면 평균이지 않겠나. 오늘 하객으로 올 누군가는 열두 번째 결혼식까지 했으니 평균보다 아래일 수도 있다.
물론 여섯 번까지 가면 평균보다 위가 되겠지만.
“오, 칼 군. 오늘도 예복이 잘 어울리는군.”
“과찬이십니다, 각하.”
아무튼 날이 밝자마자 심사숙고하여 선별한 하객들이 하나둘 아티니 남작성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마중 인사는 내가 맡았다. 내 앞에서도 눈치를 보기 바쁜 사용인들에게 공작이나 후작 수준의 하객들을 맡긴다? 나이어드 남작가의 경사가 나이어드 남작가의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다. 게다가 소수 정예니 뭐니 하면서 거물들을 부른 당사자가 나니, 책임도 내가 지는 것이 맞다.
“그보다 바쁘신 와중에도 불구하고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칼 군의 결혼을 다른 업무보다 아래에 둘 수 있겠나. 전쟁 중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와야지.”
내 어깨를 토닥인 전승공은 남작성을 둘러보더니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하고 조용해서 좋군. 황후 폐하의 결혼식이 생각나서 그리울 정도야.”
나름 당당한 작위 귀족이자 영주의 성이 순식간에 아담한 곳으로 전락해버렸지만, 전승공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공작의 눈에는 백작이 진심으로 지은 저택 정도는 되어야 ‘좋은 별장이군.’ 같은 반응이 나올 테니까.
“작은 결혼식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 칼 군도 시간이 지나면 오늘 결혼식이 어떤 결혼식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걸세.”
“다른 결혼식이 워낙 화려해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 그도 그렇군. 내가 실언을 했어.”
내 말에 마르와 트릭시의 결혼식을 떠올린 전승공은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렸다.아무리 오늘 결혼식이 기분 좋게 진행되더라도 신이 개입한 결혼식을 이기는 건 좀 힘들─
“죠오오오오옷까아아아아아!”
“아.”
“그럼 이만 가보겠네. 이따 보세나, 칼 군.”
저 멀리서 들리는 혼돈의 목소리에 전승공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완벽한 회피 기동이라 미약한 배신감을 느끼고 말았다. 솔직히 나였어도 피할 수 있으면 피했겠지만, 아무 망설임 없이 도망가는 건 너무하잖아.
그보다 기분 탓인가. 조카와 조까 사이에 미묘하게 걸쳐졌던 발음이 점점 후자로 치우쳐지는 것 같다.
“으헤헿! 죠오오까아아! 외슉모와써!”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양손에 술병을 든 채로 달려오는 현명공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물론 내가 초대한 사람이기는 한데. 친척이라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한데… 막상 저 모습을 보니 ‘미아네죠카! 오눌속이 안죠아셔모깔거 가타!’ 같은 연락을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럴 일은 없다. 현명공은 알코올을 지배하는 자지,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니까.
“델. 남의 성에서 소란 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야.”
“히이잉, 아라써…”
다행히 현명공의 유일한 억제기인 외숙부 덕분에 현명공의 샤우팅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정말 다행이다. 현명공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사용인들이 여러 의미로 떠는 게 보였거든.
“오자마자 소란을 피워 미안하구나.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지는 말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외숙부는 그렇게 말하며 선물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외숙모께서는 목소리가 조금 크신 거지, 마음이 따뜻한 분인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고마운 말이지만 델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않게 조심하렴. 괜히 우쭐해져서 더 시끄럽게 굴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소름이 돋는 말이라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거보다 강력해진 현명공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참, 리리도 어서 인사하렴.”
‘아.’
뒤이은 외숙부의 말에 뒤늦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그러자 맑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다부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소공작이 보였다.
미안하다. 오자마자 현명공이 어그로를 미친 듯이 끌어서 이제야 봤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타일글레헨 백작님. 이번 장관 영전과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 된 것, 정말 축하드려요.”
그래도 또박또박 유창한 발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소공작을 보니 미안함 대신 기특함이 몰려왔다.
그래, 해가 지났어도 너는 여전히 살론 공작가의 희망이구나. 너는 더 발전할 필요 없이 그대로만 자라도 제국의 칭송을 받을 거야.
“오빠한테 할 말이 있다고 열심히 연습하더니, 연습한 보람이 있었구나.”
“아, 아빠!”
다만 소공작의 다부진 모습은 외숙부의 칭찬에 무너지고 말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외숙부,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고의로 애 취급하고 있어.’
어쩌다 가끔 보는 내가 봐도 소공작은 어떻게든 어른 행세를 하기 위해 안달인 아이다. 그래서 사촌인 나에게 꼬박꼬박 장관이니 백작이니 하는 직함을 붙이는 것 아닌가.
그러나 외숙부는 그럴 때마다 이 악물고 오빠라는 칭호를 들이밀었다. 마치 파들파들 떠는 소공작의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외숙부도 정상은 아니야.’
사실 현명공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정상인으로서는 힘든 일이지.
“…저, 그런데, 장관님.”
“말씀하십시오, 소공작.”
“언니는 어디 있어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도 외숙부도 미소를 지었다.
아빠한테 놀림을 받자마자 상냥히 놀아준 언니를 찾는 걸 보면 애가 맞기는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