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
제 54화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했다네 – 2
류티스가 날린 화끈한 죽창 공격에 명치가 찔려 잠시 스턴에 걸렸지만, 딱 그 정도 충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악의 없는 발언에 발작할 정도로 정신 나간 놈은 아니니까. 만약 그랬다면 파견 첫날에 교장실부터 뒤엎었겠지.
애초에 북방 얘기가 아니라 공무원 루트를 밟은 것 자체는 나도 자학 개그로 자주 사용하니까 괜찮다. 나에게 공무원 진출은 대학원 진학과 비슷한 느낌이니. 단지 예상 못한 타이밍에 예상 못한 놈의 입으로 학력 탈룰라를 당해 정신이 가출했을 뿐.
‘왕족만 아니었으면.’
왕족이 아니라면 정말 울대 정도는 진즉에 세게 한 대 후렸다. 하필 류티스가 제국 다음 가는 국력을 지닌 아르메인의 왕자라 더욱 높은 인내심이 요구되니 미칠 노릇이지.
만약 류티스를 합법적으로 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금화 다섯 닢까지는 지불할 생각이 있다. 닥치고 내 돈 가져가.
“너희 모습을 보니 아카데미에 가지 않은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아직 눈치를 보는 몇 명이 보이길래 먼저 자폭을 했다. 이 고문은 화가 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제서야 마음이 놓인 듯 표정이 풀린 루이제와 에리히를 보니, 이 중에 내 마음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싶어서 조금은 감동했다. 다른 셋은 워낙 표정 변화가 적은 것들이라 봐도 모르겠고. 류티스는 논할 것도 없다. 개새끼.
“잡담이 길었군. 나는 신경쓰지 말고 다들 하던 거 해.”
류티스의 입을 자유롭게 두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두려워 화제를 돌렸고, 다시 공부에 열중하는 부원들을 보니 썩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올랐다.
“자리는 알아봐뒀다. 몸만 가면 할 일은 그쪽에서 알려줄 거다.”
아카데미 얘기를 꺼내서 그런지 기억 깊은 곳에서 만악의 근원이 솟아올랐다. 4년 전 가주가 했던 희대의 망언. 자리를 알아봐? 몸만 가면 할 일은 알려줘?
‘믿은 내가 병신이었지.’
자리는 나락행 편도 VIP석이었고, 할 일을 알려줄 팀장은 내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심지어 중견 취급 받던 인물들도 사이 좋게 떠나서 팀은 개판이 났었지. 더 개판인 것은 가문의 격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내가 팀장에 올라버렸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억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에게 할 일을 배우기도 전에 팀 지도부의 사망으로 혼란에 빠진 팀을 수습해야 하는 중책을 맡아버렸다.
물론 막 공무원이 된 병아리에게 그런 중책을 감당할 능력은 없었다. 덕분에 당시 과장이었던 장관이 적극적으로 도와줬지. 그때는 마냥 고마웠는데, 지금은 시발.
‘한 번 이상하게 승진했더니 대차게 꼬였네.’
팀원에서 팀장이 된 이후에도 팀장에서 4과장, 4과장에서 감찰부장. 3번 겪은 승진 중에 정상적인 승진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운이 꼬이면 이렇게나 꼬이는구나.
참담한 심정에 아직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부원들을 바라봤다. 직업 같은 거 가질 필요가 없는 높으신 분들이 과반수지만, 만약에 취업 할 일이 생기면 너희는 꼭 정상적인 직업 가져라.
시간이 지나니 조금 독특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역천자가 죽으며 개인은 집단을 이길 수 없다는 명제가 굳건히 유지됐다. 제 아무리 강한 개인이 전투에서 활약해도, 결국 전쟁은 국가라는 집단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사례가 늘어났지.”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평소보다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는 라테르와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듣는 루이제. 유벤 연합왕국의 왕자가 크펠로펜 제국의 귀족에게 크펠로펜 역사를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시험 범위도 넘은 것 같은데. 어디까지 가르치는 거야.
‘이게 맞는 건가.’
보통은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제국사가 대륙 귀족들의 교양이라지만, 그래도 자국 귀족이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진지한 표정의 루이제를 보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래, 2년 전 일이니 자세히 모를 수도 있지. 제국사는 사건 전개보다 그 사건의 여파를 중점으로 보는 편이라 제대로 파고 들면 어려운 점이 많다. 후대의 판단이고 뭐고, 철저히 황실 위주의 판단을 중시하는 제국이기에 2년 전 사건도 교과서에 때려박기도 하고.
“음?”
다소 특이한 역사 강의를 보는 사이, 막힘 없이 설명을 하던 라테르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6검? 처음 보는 내용인데.”
아.
“올해 개정된 내용이다. 작년 서적을 봤다면 모를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헛공부를 했나 조금 걱정했습니다.”
라테르의 의문에 대신 답해줬다. 그동안 제국은 녀석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밝히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언급이 이루어진 개정이니 나도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나하고도 연관이 있는 일이라 교육성 쪽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고.
나에게 있어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2년 전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가려졌던 이름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는 거니까. 영원히 이름이 묻힌 사람도 많은 걸 생각하면 2년 기다림 정도는 양호하지.
“중요한 내용이니 잘 보는 게 좋을 거다.”
타국의 왕자가 기억하는 이름이라. 그 정도면 출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칼을 바라보던 라테르의 시선이 다시 교과서로 향했다.
‘6검이라.’
교과서에 길게 언급된 이름은 아니다. 겨우 몇 줄 적혔을 정도지만, 그 짧은 내용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6검. 대북방 전쟁, 제국은 대토벌 전쟁이라고 칭하는 2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목숨을 바쳐 역천자 척살에 기여한 여섯 영웅.
‘이상하군.’
유벤 연합왕국에서도 역천자, 카간에 대해 철저히 주시한 편이다. 루이제에게 설명한 것처럼 카간의 사망은 개인이 집단을 이길 수 없음을 다시 증명한 사건이었으니까.
제국이 카간을 죽이기 전까지 대륙 열국에는 국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초인이 국가를 뒤흔들 수 있지 않겠냐는 불온한 여론이 퍼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 여론은 제국의 손으로 카간을 죽이며 종식되었지만, 어찌나 아찔한 순간이었던지.
그 아찔했던 감정과 비례할 정도로 카간에 대한 정보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자부했다.
‘분명 카간을 죽인 건 고문일 텐데.’
최후의 전투에서 제국군을 이끈 것은 전승공이며, 카간을 죽인 것은 칼이다. 그 중 제국이 대대적으로 공표한 것은 카간이 전사한 전투에서 전승공이 제국군을 지휘하며 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
제국이 칼의 업적을 없던 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전승공의 활약을 더 띄우기 위하여 입을 다문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제국 내에서도 하위 귀족과 민간 내에서는 카간 살해자에 대한 소식이 널리 퍼지지 못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6검이라는 존재를 끌어올린다? 살아있는 카간 살해자도 대대적으로 공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혹시 6검 중에 칼이 포함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있다.’
이제와서 전승공의 업적을 희석시킬 수 있는 6검이 언급된 것. 그리고 정작 카간을 죽인 당사자는 그 6검에 포함되지 않은 것. 분명 무언가가 있지만, 제국이 무슨 의도로 한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확히는 현 황제의 의도겠지만.
설마 올해 개정된 교과서에 이런 폭탄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아국에서도 제국의 개정은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을 텐데.
“라테르? 왜 그래?”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계속 하지.”
루이제의 부름에 겨우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정보가 들어와 조금 당황한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아카데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 일은 아국에 알려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지.
라테르의 시선이 창 밖을 바라보는 칼에게로 향했다. 황제의 사냥개이자 전승공과 친밀한 관계라고 알려진 존재. 칼이라면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
라테르의 시선이 따갑다. 지금쯤 머리 꽤나 굴리고 있겠지. 이번 개정에 무언가 노림수가 있을 거라 생각 중일 거다.
‘실제로 있긴 하지.’
날이 갈수록 황권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환자의 의향이 듬뿍 들어간 개정이다. 외척도 거리낌 없이 날릴 정도로 황권에 집착하는 것이 현 황제니까. 이제는 슬슬 황태자의 장인인 전승공에 대한 견제도 날려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6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면 카간 살해에 대한 전말도 조금씩 풀리게 되고,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전승공의 위세가 조금은 희미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까지 전승공이 독식하던 위명이 분배되기 시작한다는 것.
‘하여간 번거롭긴.’
정치가의 행보 하나하나는 무언가 의미가 담겨 있어 머리가 아프다. 나는 2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 녀석들이 양지로 올라온 것에 만족스럽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전승공이 입을 피해.
하지만 황제도 적당히 견제만 하려는 것이니 괜찮을 거다. 정말 작정하고 전승공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면 이런 소소한 견제구를 날리지 않았지. 이 견제는 ‘내가 널 주시하니 알아서 사려라.’ 라는 정중한 인사나 다름없다.
평소 황제의 행보를 생각하면 정말 단순하고 잔잔한 견제구다. 라테르도 조금만 쉽게 생각하면 자력으로 알아낼 수준. 그래도 다음에 전승공을 보면 안부 인사는 전해야겠다. 그 분한테는 워낙 신세를 많이 졌으니.
시험 기간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모든 세계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동아리실에 모여 공부하는 부원들을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론 시험이 끝났다.
그래, ‘이론’ 시험은 말이다.
“여러분이 계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저희야말로 감찰관님의 배려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론 시험이 끝난 다음날. 중대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빌라르를 동아리실로 불렀다.
“아카데미도 삼국의 협조에 기꺼워했습니다. 혹여나 귀하신 분들이 다치면 곤란하니까요.”
이론 시험이 끝나면 무엇이 시작되겠는가. 당연히 실기 시험이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에서 실기란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살벌한 대련을 의미한다.
다행히 마법과 신성력의 힘으로 어지간한 부상 정도야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심지어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나 사제라면 잘린 사지도 다시 붙이고, 죽기 직전에 숨통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되살릴 정도. 겪어봐서 잘 안다.
하지만 어느 미친 작자가 왕족에게 ‘팔이 잘리셔도 다시 붙일 수 있으니 안심!’ 같은 마인드를 들이밀겠는가. 일단 그 인간 모가지가 먼저 잘리겠지.
“저는 대련장을 돌아다니며 특이 사항을 확인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고 있다. 실기 시험이 시작되는 다음날부터 대련장 곳곳에 상주하여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하는 것.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련을 주시하며 부상을 막는 것은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에서 짬 좀 먹었다 하는 양반들은 거의 하는 일이니까. 하필 대련자가 왕족이라 긴장감이 하늘을 찌르는 거지.
“이거 참, 대련 상대가 될 학생이 불쌍하군요.”
정말 어려운 것은 왕족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거나 마법을 날려야 할 이름 모를 학생이다. 대진표를 보면 오열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어쩌겠나. 대진표 운도 실력의 일종인 것을. 게임 캐릭터창을 봐도 능력치에 LUK이 있는 것처럼 운도 세상살이 평가 요소 중 하나다.
아무튼 그렇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 학생에게도 편할 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예상은 했지만 소제목으로 인해 정말 예상한 반응이 그대로 나와서 마음이 조금 아팠습니다. 독자님들, 1998년 드라마 드립을 안다고 그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본 건 아닙니다…
이번 회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