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0)
로판 속 공무원 540화(541/945)
누군가의 축복 없이, 누군가의 강림 없이 무사히 결혼식을 끝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그 당연함을 상실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렀다. 세 번째 결혼식이 되어서야 정상적인 결혼식을 치르다니.
‘역시 하늘의 신은 다르다.’
태양처럼 신도를 내려다보지도, 초목처럼 감싸지도 않는 자유로운 하늘. 언제나 같은 곳에 있지만 신도들에게 관여하지 않고 고고히 떠있는 존재.
결심했다. 오늘부터 난 명예 제사장이다. 여명 교단의 교황도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판국에, 복자가 명예 제사장을 겸하는 게 대수일까.
‘조만간 신앙 복원 작업이라도 하자.’
너무 거창한 계획 같지만 실제로는 별거 아니다. 이미 나에게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흔과 신물이 있으며, 신과의 소통도 가능하다.
심지어 정식 제사장이 내 파벌원이지 않나. 북방의 고유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전을 세우겠다 선언하면 호응할 사람은 많다.
…
‘나 진짜 제사장인가?’
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 나열해서 생각하니 명예 제사장에서 명예라는 단어를 떼도 무방할 것 같다. 신앙을 다시 세울 명분과 권한이 내 손에 있잖아.
이윽고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동안 나한테 명예 제사장 운운했을 때는 신도들이 죽어서 맛이 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철저히 이성적으로 판단한 거였다.
‘신앙을 부순 장본인이 신앙을 다시 세울 제사장…’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미친 문장이라 슬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대체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
“부케 전달할게요!”
허나 해맑은 리제의 목소리에 도로 눈을 떴다.
그러자 어느새 린의 앞까지 간 리제가, 네 번째 주인에게 향하는 부케가 보였다.
‘아무렴 어때.’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이라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솔직히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을 부순 건 아니다. 당시의 나는 그럴 이유가 있었고,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러니 이건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닌 정당한 거래다. 영원한 푸른 하늘이 내게 평온한 결혼식을 주었으니, 나는 그 답례로 신앙을 돌려준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리제의 위상은 남작 영애라는 신분과 달리 제법 높은 편이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부인.”
“한 해의 시작을 두 분의 경사를 축하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어 기쁠 따름입니다.”
그 증거로 결혼식이 끝난 후, 하객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 위해 결혼식장을 배회하자 고위 귀족들의 정중한 인사가 리제에게 쏠렸다.
아무리 리제가 귀족이라지만 작위 귀족도 아닌 남작 영애다. 자작과 남작을 손가락으로 부리는 고위 귀족들이 깍듯하게 대할 상대는 아니다.
허나 리제에게는 ‘남작 영애’ 외에도 다른 신분이 있다.
“마종공 각하께서도 밝은 얼굴로 사회를 보셨지요. 유일한 제자의 결혼은 그분께도 다시 없을 경사였나 봅니다.”
바로 ‘트릭시의 제자’라는 신분.그 신분 덕에 고위 귀족들은 리제에게 최선을 다하여 덕담을 쏟아냈다.
리제의 신분이 고작 남작 영애에 불과하다고? 마법사 마종공의 유산을 독식할 유일한 제자인데 그딴 게 대수냐. 막말로 리제가 트릭시에게 ‘저 사람 이상해요.’ 라고 한마디만 속삭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반대로 리제가 ‘저 사람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하면 그 귀족은 마탑의 최우선 지원을 받을 터.
“마종공께 경사인 일인 건 맞으나, 누구보다 행복한 건 장관이겠지요. 이런 아름다운 부인을 얻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도 그렇군요!”
그래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남 부러울 것 없을 양반들이 리제 앞에서 혼신의 재롱잔치를 하고 있다.
좀 미묘한 광경이지만 이해한다. 트릭시랑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같은 공작이 아닌 이상 힘드니, 이렇게 우회적으로 청탁을 하는 거겠지.
다만 하객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오라버니가 아름다운 부인을 가진 게 아니라, 제가 멋진 남편을 가진 거예요.”
순수하고 해맑은 리제는 고위 귀족들의 접근보다 나와 정식으로 부부가 된 것에 집중했다.
‘우리 리제가 많이 해맑지.’
직설적인 애정 과시에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순수한 리제를 뚫는 자만이 트릭시에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
하객들의 축하를 받을수록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깨가 으쓱거렸다.
행복하다. 접점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축하를 받는 것이, 엄숙하고 진지한 고위 귀족들도 웃으며 박수를 쳐주는 것이.
‘나도 오라버니의 부인.’
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오라버니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까지, 전부.
분명 꿈 같은 일이지만 꿈은 아니다. 훌쩍이며 눈가를 닦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아버지, 자기 일처럼 환호하는 사용인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행복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라버니의 팔을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첫 만남은 갑작스럽고도 신비하게 이루어졌다. 스물이 넘은 오라버니가 감찰관으로서 내 앞에 나타났으니, 절대 평범한 만남은 아니다.
물론 처음부터 오라버니를 마음에 품은 건 아니었다. 당시 오라버니는 그저 친구의 형, 딱 그런 위치였으니까.
‘처음에는 그랬었지.’
하지만 그랬던 내가 어느새 오라버니를 보고 있었다.
동아리 고문을 찾지 못해서 허둥거리는 나에게 손을 뻗은 오라버니기에, 다른 부원들은 먹지 못하는 쿠키를 홀로 먹어주는 오라버니기에, 마르 언니에게 지적을 당하고 울던 나를 다독여준 오라버니기에.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언니의 죽음으로 마음의 문을 닫은 나에게상냥히 노크를 해준 오라버니기에.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그저 친구의 형이었던 오라버니를, 멋지고 좋은 어른이라 생각했던 오라버니를 완전히 이성으로 보기 시작한 때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었던 내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대를 보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생각한 내가 남의 시선에 떨리기 시작한 때가.
‘반할 수밖에 없었어.’
다른 후작과 인사를 나누는 오라버니를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라버니의 행동은 이러고도 안 반하냐고 압박하는 수준이었지.
그러고도 오라버니가 마르 언니와 가까워지고 나서야 내 마음을 깨달은 것이 부끄러…
‘아니야.’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오라버니에게 진심이 된 기념비적인 순간이잖아.
정말 부끄러운 건 내 마음을 알고 나서도 한동안 고백하지 못했던 때지.
‘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과거라 몸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오라버니를 좋아한 사람이 나 혼자였다면 계속 어물쩍거리다 졸업했겠지?
“리제?”
너무 끔찍한 미래인 나머지, 팔짱을 낀 오라버니마저 내 떨림을 눈치챘다.
민망하다. 이 좋은 날에 혼자 망상하는 걸 들켜버렸어.
“미안해, 피곤하지? 귀하게 모신 하객들이라 설렁설렁 대할 수는 없거든.”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런 나에게 상냥히 웃어주었다.
내가 반한 오라버니의 모습이지만 조금, 아주 조금 서운했다. 우린 정식으로 부부가 됐는데 어린 여동생을 대하는 것 같잖아.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는 오라버니가 더 피곤하겠죠.”
그렇게 말하고는 오라버니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먹을 장어도 잔뜩 준비했어요.”
“…어?”
내 속삭임에 얼이 빠진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흡족한 반응이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기세를 잡으면 쭉 이어가야 한다고 에리 언니가 그랬어.
“정말 많이 준비했으니까아… 바로 효과도 나타나겠죠?”
“효과…?”
다 알면서 굳이 반문하는 오라버니 모습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내가 이어나갈 생각이었으니까.
“저, 페디랑 생일이 같은 아이를 갖고 싶어요.”
여보.
***
리제의 선전포고는 짧고도 강렬했다. 핑크 카피바라가 아니라 핑크 폭스였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강렬한 선전포고에 걸맞게 장어의 수도 엄청났다.
‘근처에 템즈강이 있나?’
산업혁명 덕분에 폐수 집결지가 되었음에도 무수히 많은 장어를 품은 기적의 강. 아무래도 아티니 남작령은 런던이었던 모양이다.
‘…전부 먹는다.’
아무튼 가득 쌓인 장어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순수한 리제가 용기를 내어 그런 선전포고까지 했는데, 연장자이자 남편으로서 발을 뺄 수는 없다.
“아티니의 장어는 제법 좋지. 나도 자주 먹는다네.”
게다가 하객석을 빛내던 황금공은 결혼식이 끝난 후,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정말 좋은데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군.”
절대 잊을 수 없는 조언이었다.
“사위.”
“아, 예, 장인어른.”
장어 젤리를 제외한 모든 장어 요리가 식탁에 쌓이는 걸 보는 사이, 셋째 장인어른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셨다.
“나도 겪은 일이니 부담 갖지 말게.”
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이어드 가문과 연관된 남자들은 가혹한 운명을 짊어졌구나.
일주일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리제야.”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리제의 등을 토닥였다.
허나 반응은 없었다. 실로 익숙한 패턴이다.
‘이럴 거면서 왜.’
결국 앞선 두 사람의 전철을 밟을 거면서 왜 선전포고를 했던 걸까.
만약 리제가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버텼다면 모를까,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었다. 혹시 장어 때문에 졌다는 명예로운 패배를 노린 건가?
“으, 흐으윽…”
“오.”
축 늘어져있던 신체에 생기가 깃들었다.
과연. 무작정 선전포고를 한 건 아니었구나.
‘사흘만 더 있을까.’
슬쩍 리제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흠칫하는 떨림이 느껴졌다.
물론 거절은 없었다. 그런 건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