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1)
로판 속 공무원 541화(542/945)
형이 세 번째 결혼식을 치른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니, 둘째 형수는 세르베트 공작령에서 한 번, 엘프 주거 지구에서 한 번 결혼식을 올렸으니 네 번째 결혼식이라고 해야 하나? 엄밀히 따지면 그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1년 사이에 네 번.’
정신이 아찔해지는 문장이다. 형이 첫째 형수와 결혼을 한 것이 딱 작년 이맘때니, 한 사람이 고작 1년 사이에 네 번의 결혼식을 진행한 셈이다. 황금공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이걸 반대로 말하자면 나는 1년 사이에 네 번이나 하객으로 참석한 거다.
‘그때 뭔가 기운을 받은 건가?’
문득 실없는 생각이 떠올라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형의 넘치는 결혼운이 흐르고 흘러서 동생에게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그게 아니라면 이럴 리가 없다. 인생 첫 짝사랑이 깨진 이후로 평범한 삶을 보내던 내가 순식간에 두 명의 약혼녀를 얻게 됐다. 형이 여섯 형수들과의 결혼을 마치면 그 다음은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면 당연히 전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부족해서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깨닫게 되었고, 나 홀로 발버둥쳤다면 몇 년 후에나 이루어졌을 인연이 빠르게 맺어진 것 아닌가.
‘…좋은 일이지.’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분명 좋은 일이다. 반어법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일이다.
형에게 자극받아 짝을 찾지 못했다면 이 지옥 같은 일터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빌어먹을 의회.’
신경질적으로 서류에 서명을 한 후, 다음 서류를 거칠게 낚아챘다.
‘빌어먹을 의원직.’
아까까지만 해도 올라갔던 입꼬리가 거짓말처럼 내려갔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터질 것 같다.
고통스럽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아무리 제국백 가문의 일원이라지만 일개 차남인 나는 적당히 남작위를 물려받고, 한적한 영지에서 소소한 영지 업무만 보며 살아갈 팔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형이 장관이라서 생긴 일이다. 아니, 장관과 제국의회 의원 겸직을 불법으로 막은 제국의 잘못이다. 이미 장관 업무도 수행 중인 사람이 의원 업무도 맡는다면 얼마나 잘하겠나. 그걸 막은 제국은 효율적인 업무를 스스로의 손으로 막은 꼴이다.
‘누나하고 같이 법안이나 하나 발의할까.’
책상 한 쪽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제국의회 의원은 반드시 제국백 당사자가 맡아야 한다는 법안. 보다 아름다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법안이 아닐까?
– 똑똑
“에리히, 나야. 들어가도 돼?”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맑은 노크소리와 함께 제노비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마침 누나 생각 중이었는데 공교롭기도 하지.
“어, 들어와.”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누나는 이 지옥 같은 의회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니까.
제국의회 의사당 후원. 평소에는 인적이 드물어 남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장소기에누나의 무릎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단순히 누워있는 것이지만 포근하다. 영지에서는 세라, 의회에서는 누나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기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겠지.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혀 깨물고 죽었어.
“많이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누나의 말에 단호히 대답했다. 솔직히 누나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빈말로라도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나가 존경스럽다.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누나가 최연소 의원 겸 막내 의원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버틴 거지? 누나를 보고 버티는 나랑 다르게 누나는 버팀목도 없었잖아.
‘제국백은 일반인하고 다르구나.’
최연소 의원인 누나, 최연소 부장─ 이었다가 장관이 된 형.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둘이지만 현직 제국백이라는 단 하나의 접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제국백은 작위를 짊어지거나 짊어질 예정인 사람에게 초월적인 능력을 주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그게 아니라면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가 이렇게 다를 리 있겠냐고.
‘늦게 태어나서 다행이다.’
물론 초월적인 능력을 대가로 초월적인 업무를 감당할 바에는 평범한 귀족으로 사는 게 이득이기는 하다.
게다가 난 페디가 장성하면 완전히 해방되잖아. 아무리 늙어도 40대면 은퇴할 수 있으니, 60대가 되어서도 일하고 있을 게 확실한 형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이건 누나도 마찬가지인데.’
슬며시 눈을 뜨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누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사실 형이 고생할 때는 안타깝다는 감상이 전부였다. 그 이상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걱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 애초에 형은 입으로는 욕을 중얼거리면서도 일은 열심히 하더라고.
하지만 누나가 고생하는 건 다른 문제다. 상식적으로 어떤 남자가 형제의 고생과 예비 부인의 고생을 동일선상에 둘까.
“누나.”
“응?”
“우리 자식 낳으면, 적당한 때에 작위 물려주자.”
내 말에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리 아이가 더 고생할 텐데?”
“걔는 손주한테 물려주면 되지.”
조금 무책임한 말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제국백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제국의회 의원직을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젊을 때 작위를 받고 중년 때 내던지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나. 적어도 늙어서까지 일하는 것보다는 젊을 때 고생하는 게 낫잖아.
이제는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야 할 게오르크 아저씨도 백수로 지내는 거에 만족하시는 것 같으니까. 누나도 딱 장인어른 나이 정도에 은퇴하면 좋─
“은퇴는 뭐 하고 싶다고 하는 줄 아느냐.”
갑작스레 들리는 뚱한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의, 의장님.”
“됐다. 나도 쉬러 온 거니 앉아있거라.”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누나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의장의 손짓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나 역시 누나처럼 다소 어색한 자세로 벤치에 앉았다. 설마 다른 의원들도 잘 오지 않는 후원에서 의장을 보게 될 줄이야.
‘출퇴근 할 때 말고는 건물 안에만 있는 사람인데.’
현 제국의회 의장, 카도르 백작은 막 의장직을 승계하여 한창 업무에 치여 지내는 상황이다. 그런 사람이 점심 시간에 후원까지 나왔다고?
‘…무슨 일 있나?’
불안하다. 아직 의회 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나조차 ‘의원들은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라는 진리를 깨달은 상태다. 황제 폐하의 수족으로서 정계에서 구르고 구른 의원들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담겨있으니, 의원들의 대표인 의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오후에 조금 복잡한 일이 있을 예정이라 잠깐 바람 좀 쐬러 왔다. 마침 젊은 친구들이 먼저 와있으니 활력을 얻어 가는 기분이야.”
입으로는 웃는 소리를 내었지만 눈은 초췌하게 가라앉은 의장의 말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무래도 오후에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의장에게 사기를 당했다.
“오후에 조금 복잡한 일이 있을 예정이라 잠깐 바람 좀 쐬러 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레온 왕국의 왕세자가 죽었습니다. 이제 레온의 아스투리아 왕가는 그 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단에 오른 텔노스 백작의 발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조금이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나?
“300년 전, 아펠스의 발렌트 황가는 연이은 폭정으로 인해 천명을 잃었습니다. 이에 에이만카 대제께서 비탄에 빠진 대륙과 신민들을 구원코자 결연히 군을 일으키셨으니, 그 위용에 아펠스의 말제인 이그나스조차 두려워하여 새로운 천명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새하얘지는 머리와 달리 텔노스 백작은 30명의 의원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심상치 않은 발언을 이어나갔다.
“그날 이후로 고귀한 리브노만 황가는 타락한 발렌트 황가와 달리 천명의 수호자가 되었고, 그 대표이신 열일곱 분의 황제 폐하께서는 제국을 넘어 대륙의 평온을 위해 자비와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텔노스 백작은 연단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리고 오늘!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다스릴 수 없는 무력한 왕가가 무너졌습니다! 황제 폐하의 현명하고도 너그러운 통치를 바라는 가여운 백성들이 애타게 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텔노스 백작, 발언에 유의하십시오. 아스투리아 왕가는 엄연히 푸른 피들의 합의하에 군림한 레온의 왕가입니다.”
“죄송합니다, 의장 각하. 제가 경솔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의장이 텔노스 백작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의장도 백작도 딱히 분노하거나 머쓱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
의장의 지적을 몇 번이나 곱씹고 나서야 의장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무력하다는 말은 반박하지 않았네.’
게다가 아스투리아 왕가는 온전히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귀족들의 합의와 지지 덕분에 왕가가 된 가문이라는 비꼼도 있었고.
“의원들이 하는 말은 그냥 반대로 생각해. 꼬아서 말하는 게 습관인 사람들이니 그게 편할 거야.”
문득 내가 처음 의회에 출근하던 날, 형이 해줬던 조언이 떠올랐다.
형이 한 말처럼 단순한 한마디에도 다른 뜻이 있네. 진짜 있는 그대로 듣기보다는 한 번 뒤집어서 듣는 게 편하겠어.
“허나 의장 각하. 리브노만 황가를 대리하여 레온의 신민들을 평온케 할 의무가 있는 아스투리아 왕가는 그 힘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레온의 신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정당한 통치자의 그늘에서 평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백작의 발언에는 동의합니다. 제국은 이 대륙의 변방까지, 가장 비천한 노예까지 배부르게 할 의무가 있으니, 이웃 국가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의장이 텔노스 백작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다른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직 나 혼자만 그 흐름 속에서 따라가지 못했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으니까.
‘제국의 의무?’
그런 게… 있었나?
‘이웃 국가의 비극?’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하지만 굳이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연기에 동참하지 못하면 연기를 방해하지나 말아야지.
“그러니 친애하는 의원 동지 여러분 앞에서 감히 주장합니다! 우리 제국은! 레온 왕국과 신민들의 비극에 단호하고도 적극적인 대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급진적인 방안일지라도, 다른 국가들이 제국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동의합니다!”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어느새 몇몇 의원들은 기립박수를 시전했다.
어쩌지 이거. 나도 같이 해야 하나…?
“이 라이탄 포르니오 오브 텔노스! 명예로운 제국의회 의원의 자격으로 레온 왕국 원정을 위한 임시법을 제안합니다!”
그 외침에 그나마 앉아있던 의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텔노스 백작이 발의한 임시법은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제국의회를 통과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