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2)
로판 속 공무원 542화(543/945)
리제와 결혼을 치르고 약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한 달 동안 위풍당당한 선전포고를 했던 리제가 빠르게 패배하고, 페디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몸을 뒤집는 기염을 토하여 저택이 환호성에 뒤덮이고, 트릭시의 품속에 있는 세쌍둥이는 벌써부터 운동이라도 하는지 수시로 발길질을 했다.
게다가 더 이상 개노답 부원들을 관리하러 아카데미에 갈 필요도 없고, 유일한 동생은 어딜 가도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번듯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올해는 시작부터 경사가 이어진 아름다운 해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당당히 그렇다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딱 오늘까지만.
‘…이 정도면 오래 버텼지.’
통신구로 날아온 문자를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평화를 깨트릴 폭풍이 오고 말았다.
[ 레온 왕국 왕세자 사망.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의미마저 짧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국 고위 공무원 전원에게 일제히 발송된 문자니까. 별 의미가 없는 문자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진짜 올해 초네.’
그 와중에 황제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게 밝혀져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황제가 레온 왕국 파견을 언급했을 때는 올해 초가 될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2월에 왕세자가 죽어버렸다.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한 제국의 정보력에 감탄이 나올 것 같았다.
‘4월이면 좋았을 텐데.’
진심으로 안타깝다. 4월은 리제와의 신혼을 3개월 정도 즐기고, 린과의 결혼식까지 4개월이 남은 시기잖아. 파견을 가기 딱 좋은 시간대─
“아니 시발.”
끔찍한 발상에 황급히 뺨을 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세상에 파견 가기 좋은 시간대 같은 건 없다. 내가 괜히 이 악물고 레온 왕국 파견을 출퇴근 형식으로 바꿨겠나.
‘이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거구나.’
이윽고 얼얼한 고통과 함께 미묘한 씁쓸함이 몰려왔다. 한때는 파견이고 출장이고 지랄하지 말라며 발광하던 내가 ‘좋은 시간대’ 운운하며 정신 승리를 시전하고 말았다. 높고 두터운 공무원의 벽 앞에서 무릎 꿇고 타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지.
실로 슬픈 일이지만 그 감정조차 느긋하게 느낄 시간이 없었다.
[ 바로 태양전으로 오게. ]황제가 단체 문자와 별개로 개별 소환령을 내렸다.
태양전으로 소환당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와.’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전승공과 외무성 장관, 제국의회 의장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라인업이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황제의 수족인 의장이야 그렇다 쳐도, 제국군 최고 책임자와 외교 수장이 나란히 있는 건 이번 레온 왕국 사태에 전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 아닌가.
‘군단 몇 개는 가겠네.’
그리고 전승공을 참모로 부를 정도면 황제가 군단 하나만 동원할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못해도 4개는 움직일 생각이겠지.
그 정도면 거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이다. 하필 제국이 북방과의 캐삭빵을 위하여 수십만을 동원한 전적이 있어 그렇지, 원래 전쟁은 군단 몇 개 정도로 진행하는 게 국룰이니까.
“장관도 왔군. 얘기가 길어질 테니 서있지 말고 앉게.”
“예, 폐하.”
일단 상석에 앉아있던 황제의 말에 조심스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말석에 앉는 건 오랜만이네.’
기분이 묘하다. 나도 이제는 행정부서 서열 7위의 장관이라 어딜 가도 상석에 앉아야 할 입장인데, 하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황제, 공작, 행정부서 서열 3위 장관, 입법기관 책임자다. 7위 따위는 얼마든지 말석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거물들만 모였다.
하지만 언짢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나보다 위인 사람들이 많다는 건 이번 레온 사태에 대한 내 지분도 적다는 거잖아. 나 대신 책임져줄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올 사람은 전부 모였으니 시작하도록 하지.”
절로 마음이 평온해지려던 찰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의장.”
“폐하의 충성스러운 의원들은 레온 왕국의 비극을 좌시할 생각이 없습니다. 1시간 전에 레온 왕국 원정을 위한 임시법이 발의되었고,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의회의 기민함에 레온 신민들의 신음은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황송한 말씀입니다, 폐하.”
이미 제국이 레온에 개입할 명분을 마련했다는 의장의 보고에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명분이라고 해봤자 급조한 명분이고, 명분을 만든 제국의회가 황제의 수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제국은 제국의 법에 따라 타국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는다.’ 라는 체면치레가 중요한 것.
“전승공. 원정군 편성은 어떻게 되어가는가?”
“동부 방면군 소속 6군단을 중심으로 총 4개 군단을 원정군으로 편성했습니다.”
“6군단장을 원수로 임명하겠다. 레온 원정 기간 동안 6군단장은 동부 방면군 사령관이 아닌 짐에게 바로 보고할 수 있도록 하라.”
“실로 영민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딱 예상한 수치가 전승공의 입에서 나왔고, 황제 역시 적당하다 여겼는지 덤덤히 6군단장을 원수로 임명했다.
‘6군단장이라.’
낯익은 이름이라 빠르게 머리를 굴려 6군단장에 대한 정보를 되짚었다.
그리고 금방 잠들어있던 정보가 떠올랐다. 국경을 지키는 입장이라 내 결혼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매번 누구보다 빠르게 축하와 양해의 편지를 보낸 인물. 언제 한번 직접 만나 인사라도 나누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조만간 승진하겠네.’
그래도 6군단장 입장에서는 좋은 일로 만나는 것이니 다행이다. 군단장이 원수라는 직함을 받고 해외 원정 경험도 쌓는다면 방면군 사령관 승진은 확실시된 거나 마찬가지다.
“외무성 장관.”
아무튼 제국이 명분을 갖추고 움직일 준비까지 마쳤다는 보고에 흡족해진 황제는 다소 부드러운 시선으로 외무성 장관을 바라봤다.
“예, 폐하.”
그러나 황제의 시선을 받은 외무성 장관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저 양반이 장관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니 긴장해서 저러는 건 아닐 테고, 넉살도 좋은 편이라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석에서 푸념을 늘어놓는 정도지.
‘그런 사람이 황제 앞에서 저런다고?’
장관 입장에서도 ‘아, 이거 존나 귀찮은 일이네.’ 같은 일이 터졌다는 거다.
“…타국의 동향은 어떠한가.”
황제도 그 이변을 눈치챘는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쿼로노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황제가 표정을 바꾸었다고 보고까지 바뀌는 일은 없었다.
***
쿼로노스 왕국. 레온 왕국 동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북서쪽으로는 아르메인, 남동쪽으로는 유벤과 접한 기적의 입지를 가진 국가.
게다가 30년 전만 해도 레온은 아르메인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의 군사 강국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과거의 쿼로노스는 세 강국에 둘러싸인 비운의 국가였다. 조금만 삐끗해도 순식간에 국토가 조각날 그런 국가.
허나 절박함은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 강국 사이에 낀 쿼로노스는 희대의 외교력을 발휘하여 국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국체 보존을 넘어 레온 왕국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대륙 중부의 신흥 강자로 부상하였으니, 한때 대륙 외교가에는 ‘인생은 쿼로노스처럼.’ 같은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그것들인가.’
그리고 그 외교 천재 신흥 강자가 제국의 행보를 방해할 걸림돌로 등장하였다.
예상한 일이기는 하다. 아르메인이 남부 총군 사령관이라는 거물을 내세울 정도면 쿼로노스를 의식하는 것이고, 그 점을 외무성 장관에게 언급하며 쿼로노스의 동향을 특히 주시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럼에도 외무성 장관은 쿼로노스가 심상치 않다고 말하였다. 이전부터 그들의 개입을 기정사실화했음에도 그런 발언이 나올 정도라면…
“쿼로노스 내부에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단순 개입을 넘어 그 이상을 노리고 있다는 것.
“강경파?”
“이상한 일이로군. 쿼로노스는 점령지 동화 작업으로도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다고 들었네만.”
외무성 장관의 말에 장인어른과 의장이 의아함을 표했다.
쿼로노스는 30년 전, 레온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대량의 영토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영토를 관리하는 건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의장의 말처럼 점령지 동화 작업에 상당한 국력을 쏟아부으며 대륙 외교가에서 침묵하였다. 우선 내부부터 정리해야 바깥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헌데 그랬던 쿼로노스에서 강경파가 득세한다?
‘먹은 걸 토하려고 작정한 건가.’
이해할 수 없다. 국토 절반가량이 구 레온령인 쿼로노스인 만큼 레온 왕가 교체라는 희대의 사태에 이 악물고 덤비는 건 당연하다. 아마 새로운 왕가에게 ’30년 전에 상실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 영구 포기’를 요구하고 싶을 테니, 적당히 쿼로노스를 안달나게 한 다음에 대가를 받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강경파가 득세한다면 다시 영토 확장을 노리는 것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는 그딴 짓을 할 수 없다. 이미 위장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물도 조심해서 마셔야 하는데.
“폐하.”
“말하게.”
상식을 벗어난 현상에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외무성 장관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과거 쿼로노스를 지탱한 관료들은 30년의 침묵 동안 은퇴하거나 사망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자들은 국제 경험이 부족한 자들이온지라…”
“현실 감각 없는 애송이들로 세대 교체가 되었다?”
“…예. 현재로서는 그렇게 판단 중입니다.”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으나 도로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외교 방침이 그딴 식으로 망하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지금 쿼로노스가 보이는 행태를 생각하면 가능성 있는 일이다.
“어쩌면 쿼로노스는 자신들이 전쟁도 불사한다는 움직임을 보이며 아국과 아르메인의 양보를 이끌어내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허.”
외무성 장관의 추측에 장인어른이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나도 장인어른과 같은 심정이다. 그런 협박은 전쟁을 피하고 싶은 상대에게나 통하는 거지, 우리는 군사 활동을 전제로 원정군을 편성했다. 쿼로노스가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두들겨 패면 그만이다.
‘내가 아는 쿼로노스가 맞나?’
혼란스럽다. 역사책에서 보던 외교 강국이, ‘인생은 쿼로노스처럼’ 이라는 말을 만든 승리자가 30년 사이에 이 정도로 맛이 갈 줄이야.
‘…제국도 30년 사이에 바뀌긴 했지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뀐 두 국가를 보니 헛웃음이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