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3)
로판 속 공무원 543화(544/945)
말석에 앉은 자는 조용히 책상 무늬나 관찰하며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의무다. 이는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기록된 당연한 상식이다.
허나 눈이 책상으로 향했다고 귀까지 닫는 건 곤란하다. 회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내용 자체는 빠짐없이 듣고, 갑자기 윗사람이 질문을 하면 즉각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적힌 사회인의 도리다.
그렇기에 황제와 외무성 장관의 대화를 들으며 쿼로노스 왕국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미친놈들인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놈들이라고.
물론 쿼로노스 입장에서 레온의 왕가 교체가 심각한 위기라는 건 이해한다. 쿼로노스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던 소국에서 대륙 중부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건 레온에게서 뜯은 영토 덕분이고, 제국과 쿼로노스에게 연달아 털린 아스투리아 왕가는 상실한 영토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쿼로노스는 외부적 위협 없이 점령지 동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서열 정리가 끝난 아스투리아 왕가가 사라진다?
‘겨우 소화했던 영토를 다시 토할 수도 있지.’
그리고 외교 지식이 부족한 나조차 바로 떠오른 생각을 쿼로노스가 하지 못했을 리 없다.
레온의 새로운 왕가가 어떤 가문이 될지는 모르나, 적어도 수백 년 동안 왕가로 군림한 아스투리아보다는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권위를 세우기 위해 발악할 텐데, ‘전 왕가가 무력하게 잃은 영토를 탈환한 유능한 현 왕가’ 라는 타이틀은 권위를 세우기 딱이지 않나.
그래, 그러니 쿼로노스의 눈이 뒤집힌 건 이해한다.난데없이 영토 절반이 분쟁 지역으로 격하될 위기에 처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당연한 일인데…
‘제국이랑 아르메인까지 적으로 돌린다고?’
눈앞에 있는 목적에 홀려서 그 뒤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대륙 열강 1, 2위가 개입한 사건에 강경 대응하는 건 카간이 두 명 정도 있는 게 아닌 이상 미친 짓이야.
아니면 뒤에 있는 걸 보고도 그러는 건가? 상대가 1, 2위라도 자기들은 나름 대륙 중부의 강자라서?
‘상대도 강자인 나라잖아.’
기가 막혀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르메인의 제5제국이 정권을 잡았다면 대충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감찰성 장관.”
“…예, 폐하. 하명하소서.”
엄청난 문화 충격 때문에 황제의 지목에도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외교를 또라이 같이 하는 국가라면 빙의 전 세계에서도 보고 온 것 같은데.
“하늘을 보지 못하여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마땅히 가르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직 정신이 아찔하지만 황제의 말에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그 와중에 ‘뭣도 모르는 것들이 까부니 줘패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고급스레 포장하는 황제의 언변이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쟤도 나랑 같은 심정일 것 같은데.
…
‘잠깐만.’
너 이 새끼, 그 말을 왜 나를 지목해서 하는 거냐?
군사적으로 팰 거면 전승공에게, 외교적으로 죽일 거면 외무성 장관한테 하는 게 맞잖아. 나는 그냥 아르메인이랑 레온 귀족들 앞에서 팔짱만 끼고 있을 토템이라고.
“허나 충용무쌍한 장병들이 타지에서 헛되게 피를 흘리는 건 가혹한 일이지. 짐은 대륙의 질서와 평온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나, 먼저 무지한 자를 핍박하고 장병들의 피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내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지 황제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쿼로노스가 먼저 제국군에게 선공을 걸지 않는 이상, 제국이 먼저 공세를 펼치지는 않겠다는 전제 조건을 명시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언짢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다행히 ‘가서 싸우고 와.’ 같은 미친 명령을 내리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 장관. 장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어느새 상석에서 일어난 황제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놈들이 있는 방향으로 하늘을 가르게.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제발 대화로 풀자고 빌 때까지 계속.”
“받들겠습니다.”
직설적이고 명확한 지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명령이라면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이제 하늘 좀 갈랐다고 팔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몸에 무리가 오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쿼로노스를 과하게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 하늘 베기를 자제하라고 했다면 실망했을 거다.
“그리고 대화를 청해도 순순히 어울려 줄 필요는 없네.”
“예,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정신 나간 외교로 제국을 귀찮게 한 쿼로노스를 확실히 길들이라는 발언.
평소의 황제를 생각하면 과격하고 포악한 방식이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먼저 미치광이 전술을 쓴 것은 쿼로노스고, 황제는 상대가 분수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하필 건드려도 발작 버튼을 건드렸네.’
애석하게도 쿼로노스 왕국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황제의 발작 버튼 위에서 탭댄스를 추고 말았다.
황제는 가진 인성에 비해 과분한 권력을 쥔 2황자에게 미친 듯이 시달렸으니까. 아마 쿼로노스의 행동에서 2황자의 그림자를 보지 않았을까.
‘이러면 멸망해도 자연사지.’
그래도 자연사에 도달하기 전에 주제를 깨달으면 타박상 정도로 끝날 거다.
국경과 접하지도 않은 국가를 쥐어패봤자 얻을 것도 별로 없어.
태양전에서 물러나자마자 전승공과 추가 회담을 가졌다.
“변방 소국의 만행이 폐하의 심기를 거슬렀군.”
“그럴 만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저도 제가 들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런가? 사실 나도 그렇다네.”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전승공은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칼 군. 어떻게 할 생각인가?”
“1주에 한 번 정도 힘쓸 생각입니다. 그것보다 자주하는 건 무리기도 하고, 그럴 필요도 없겠죠.”
맥락없는 질문이었지만 덤덤히 대답했다. 전승공이 황제의 귓속말을 들었다는 것쯤은 집무실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야 제국에서 손꼽히는 무인인 전승공이 고작 같은 방에서 한 귓속말 따위를 듣지 못했겠나. 아마 황제도 ‘저 새끼 조져.’ 라는 지시를 신하들 앞에서 당당히 하기 민망했기에 귓속말이라는 형태를 취한 걸 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꼴받는다. 다른 신하들 앞에서는 자제하면서 왜 나한테는 필터가 없는 거지? 우리 사이에도 나름 예의와 체면이 필요할 것 같은데.
“쿼로노스 왕국은 중부의 강국으로 평가받으나,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외교력이었지. 쿼로노스 왕국군은 강인함과 거리가 멀었어.”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전승공은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자신의 기억을 공유했다.
“애초에 제국과의 전쟁으로 빈사 상태가 된 레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승리한 것 아닌가. 그 역시 전략 중 하나이니 문제될 건 없으나, 아무래도 현 쿼로노스의 수뇌들은 그 승리를 온전히 자신들의 역량으로 이루었다 착각한 모양일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건 진심이다.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국력을 과대평가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당사국 입장에서도, 타국 입장에서도.
“그러니 황제 폐하의 말씀처럼 칼 군의 역할이 커.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고도 만용을 부리지는 않겠지.”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칼 군이라면 금방 해낼 거라 믿네.”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전승공의 얼굴에는 어떠한 수심도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타국과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생겼는데, 제국군 최고 책임자인 전승공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내가 쿼로노스의 자신감을 꺾고 평화로운 결말이 나올 거라 생각 중이다.
‘쿼로노스는 대체…’
도대체 군사력이 얼마나 괴랄했길래 전승공이 이러는 거야.
대충 이탈리아 같은 것들인가?
***
레온의 왕세자가 사망했다.
수백 년 역사의 아스투리아 왕가는 사라지고, 새로운 보랏빛 제관이 탄생할 날이 머지 않았다.
“동생.”
“…예, 전하.”
맞은편에 앉은 네르카프 백작을 부르자 네르카프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꾸준함이 답이다. 어찌 일개 신하에게 동생이라는 영광된 호칭을 붙이냐 난색을 표하던 백작이었으나, 수십 년을 노력하니 이제는 겉으로나마 수긍했다.
“레온을 노리고 던진 돌에 쿼로노스도 맞을 것 같군.”
그런 백작을 향해 심드렁히 입을 열자 백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쿼로노스의 개입을 견제한 건 맞다. 어쭙잖게 포크를 들이밀면 목에 포크가 꽂힐 각오를 하라는 암묵적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협박에 굴하기는커녕 도리어 강대강 대치를 노리고 있다.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지만,
“이 참에 제대로 길들여야겠어.”
“실로 영민하신 판단입니다.”
최근 들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들을 합법적으로 밟을 절호의 기회다.
요 5년 동안 쿼로노스가 얼마나 시끄러웠던가. 한때 아르메인을 위협한 레온을 자신들이 꺾었으니, 자신들은 아르메인 다음 가는 강자라며 떠들고 다녔다. 언젠가는 아르메인도 능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쿼로노스의 실체를 알면 실소도 안 나오는 발언이다. 아국 내부의 초강경파가 아르메인 제국 운운했을 때, 제국이 느꼈을 심정을 그대로 느끼기도 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기분이라 끔찍했지.
그러니 지금이 기회다. 쿼로노스라는 미친개를 제국과 함께 두들겨 팰 기회.
‘…미친개가 연달아 나오다니.’
이쯤되면 슬슬 경이롭다. 옛날에는 레온이 외교를 극악으로 했는데, 이제는 외교 강국이던 놈들이 발광 중이다. 대륙 중부에는 가장 강한 국가가 맛이 가는 저주라도 있는 건가?
그래도 경쟁자라는 것들이 알아서 맛이 가니 썩 나쁜 일은 아니다.
***
레온 출근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개판이 된 대륙을 에넨이 안타깝게 여겼는지, 새로운 생명이 크라시우스 가문의 품에 안겼다.
“형.”
“어, 왔냐?”
저택으로 찾아온 에리히를 반겨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에리히를 보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이 증폭됐다. 딱히 에리히의 잘못은 아닌데…
“그, 어떻대?”
“3주라더라.”
그 말에 에리히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대충 3주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물론 아무리 생각해봤자 나랑 리제의 결혼밖에 없다. 정확히는 리제의 선전포고가 처참히 무너진 시기지만.
“일단 가자. 경사인데 얼굴은 보여야지.”
“어, 응, 그래야지.”
에리히의 어깨를 토닥이자 에리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나도 같은 심정이야.
‘이 나이에 동생…’
설마 어머니가 임신하실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