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5)
로판 속 공무원 545화(546/945)
어머니의 임신에 이어 리제의 임신이라는 겹경사를 겪은 후, 레온 출장이 시작되었다.
물론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것을 출장이라고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기존 근무지 외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면 출장은 출장이지 않겠나. 이건 출장 수당을 따로 받아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6군단장 요제프 레너입니다. 장관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지 레온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 6군단장도 결연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 역시 사령관 각하와 합을 맞추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만간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그런 6군단장에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자 6군단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 입에서 군단장이 아닌 사령관이라는 칭호가 나왔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아마 머릿속에서는 레온 원정군 사령관이라는 임시직이 아닌, 정식으로 방면군 사령관이 되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행히 그 미래는 조만간 현실이 될 예정이다.
‘어차피 승진 예정이었더만.’
6군단장은 이번 해외 원정 경력을 계기로 사령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사령관이 될 예정인 인재라 해외 원정을 맡긴 거다. 황제와 전승공의 대화를 주워들어 보니 6군단장은 방면군 사령관으로 승진할 예정이더라고.
비록 동부가 아닌 남부 방면군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사령관은 제국 군인들이 간절히 바라는 실질적 최종 직급이다.
“원정 동안 저도 원정군 소속으로서 노력할 테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그건 제가 드릴 말씀 같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아무튼 졸지에 진급이 확정된 6군단장은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보면 조금 의아한 광경이기는 할 거다. 지휘권을 견제해야 할 원정군 감찰관과 견제에 시달릴 원정군 사령관이 사이좋게 웃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견제를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설령 진짜 견제 목적이더라도 나름 고위직인 사람들끼리는 다리를 조금만 건너면 전부 아는 사이다. 되도록이면 웃으며 지내는 게 최고다.
원정군의 분위기는 6군단장의 표정과 비례하여 매우 밝았다.
본래 상사의 기분이 안 좋으면 아랫사람이 긴장하고, 상사가 기침을 하면 아랫사람이 자지러지는 것이 집단의 숙명. 헌데 최고 상사인 6군단장이 사령관(진)이 되었으니 원정군의 분위기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곧 국경을 넘을 군대의 분위기가 느슨한 건 좋지 않지만, 레온 왕국 원정군은 동부 방면군 소속 군단으로 편성되었다. 훈련도와 사기를 따지면 제국 제일가는 병력이니 군기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달리하텐 변경백이 항복했습니다. 길을 잃은 변방 귀족들에게 다시금 이정표를 세워주시려는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며 무조건적인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바로셀 후작, 토미아나 백작, 호센 백작도 동일한 뜻을 보였습니다. 왕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국군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번 원정은 무력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원정이다.
그야 레온 왕국이 제국군의 대규모 입국을 저지하려면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현 레온 왕가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렇다고 일개 귀족이 왕가를 대신하여 총대를 멘다? 아무리 행복회로를 돌려도 귀족들의 전력만으로 제국을 막기는 무리고, 괜히 반항했다가 제국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목숨과 재산이 위험하다.
그러니 어쩌겠나. 100% 몰락이 확정된 선택지를 고를 바에는 고개를 숙이는 걸 감수해야지. 마침 제국도 레온 왕국 정벌이 아닌 새로운 왕가 옹립이라는 명분을 들고 온 덕분에 ‘제국이 두려워 고개 숙인 겁쟁이’가 아닌 ‘새로운 왕가를 세운 충신’으로 이미지 세탁이 가능하다.
‘버티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네.’
생각하면 할수록 레온 왕국의 귀족 중 제국에 대항하는 놈이 나타나면 죽어도 자연사다. 제국이 명분도 실리도 다 마련해 줬는데 안 먹을 정도면 뭘 해도 죽을 팔자지.
“그들의 작위와 영지의 보장을 약속하며 정중히 대우하라. 비록 타국의 귀족이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큰 결단을 내린 자들이다.”
“예, 각하.”
실제로 6군단장은 참모의 보고에 즉각 온화한 대처를 명했다. 뜸을 들이지 않고 투항자들이 간절히 원할 대답을 들려줬으니, 아마 황제나 전승공에게서 따로 지침을 들은 모양.
“국경이 열렸으니 진입하도록 하지. 다들 준비하도록.”
그리고 약 30년 만에 일어난 제국의 동부 국경 돌파를 마치 점심 식사 메뉴를 논하듯 덤덤하게 언급했다.
기분이 묘하다.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들쑤시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린 기분이었을까? 분명 큰일을 하는 건데 위기감이 없어.
‘이게 국력 차.’
뒤이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흡족함도 느꼈다. 압도적인 국력으로 밀어붙이면 이런 일도 가능하구나.
하필 유일하게 싸워본 상대가 카간이니 팔준마니 하는 것들이라 제국의 국력을 체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치사하게 동부 방면군 지휘관들은 이런 경험을 매번 했겠네.
‘…이런 국력을 상대로 미치광이 전술을 쓴다고?’
문득 레온 동쪽에서 달려오고 있을 어느 국가가 생각났다. 영토가 털릴 당사자들조차 치욕을 감수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그것들은 대체 왜.
인간 다섯이 모이면 하나는 쓰레기라고 하던데, 대륙에 국가가 많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 같다.
***
제국의 군단기 네 개가 당당히 국경을 통과했다.
비참한 일이다. 같은 국가가 두 번이나 레온의 국경을 돌파한 것도, 국경을 지켜야 할 달리하텐 변경백으로서 의무를 다하기는커녕 스스로 국경을 개방한 것도.
하지만 어쩌겠나. 변경백 하나가 분투한다고 막을 만큼 제국은 나약하지 않다. 귀족들이 힘을 합한다고 이겨낼 만큼 레온은 강하지 않다.
‘마지막 불꽃은 화려히 피우고 싶었건만.’
쓴웃음을 지으며 변경백의 인장을 매만졌다. 아무리 못난 나라라도 그 나라를 위해 죽는 충신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민심을 잃은 왕가라도 곁을 지키는 시종은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 못난 충신, 민심을 잃은 시종이 되고자 했다. 지금의 레온과 아스투리아 왕가가 나약하고 무력한 것은 맞으나, 우리의 선조가 이 나라, 이 왕가에게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 하나 정도는 아스투리아와 함께 죽은 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의지를 꺾은 건 거창한 다짐이 아닌 사소한 일상이었다.
‘내 죽음이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날 수는 없지.’
국경의 요새로 이동하기 위해 사병을 소집하기 직전, 대대로 가문을 섬긴 호위대장이 손주를 보았다. 아들이 허약해서 걱정이라고 늘 한숨을 내쉬던 호위대장이 밝게 웃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미 왕세자가 죽으며 명이 다한 왕가와 같이 순장될 생각이니, 당장 가신들과 사병들을 소집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변경백으로 군림하는 건 국경을 수호하기 위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영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헌데 왕가와 명운을 함께하겠다는 다짐은 과연 내 사명에 부합하는가?
아니, 전혀. 그 다짐은 변경백이 아닌 개인의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부끄럽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웠던 머리가 식으니 내가 얼마나 추한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일이 끝나면 물러나야겠어.’
그러니 새로운 왕가가 군림하게 되면 깔끔히 물러나자. 미수로 그쳤다지만 현 왕가와 함께 죽겠다 다짐한 주제에 새로운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건 뻔뻔한 일이다.
게다가 감정에 먹혀 영지와 영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한 자는 변경백의 자격이 없다. 다행히 나와 달리 아들 녀석은 신중한 편이니, 오히려 나보다 훌륭한 통치를 보일 수도 있다.
– 똑똑
“각하.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은퇴를 결정하고 난 뒤, 노크 소리와 함께 호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가야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놈이 점령군을 맞이하는 장소에 빠질 수는 없지.
‘…부디 자비로운 점령군이기를.’
부디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처럼 레온의 신민들을 가엽게 여기기를.
귀족들은 점령군에게 이권을 상납해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신민들은 터전을 약탈당하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
달리하텐 변경백령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무혈입성이다 보니 적의 요새에 진입했다기보다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에 들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IC에 진입한 걸 수도 있고.
“변방 소국의 미천한 귀족이 황제 폐하의 뜻을 대리하는 위대한 장군께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원정군 수뇌부를 맞이한 달리하텐 변경백은 극도로 낮은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6군단장이 황제의 명을 받은 사령관이라지만, 작위 귀족이자 고위 귀족인 변경백이 저렇게까지 숙일 줄은 몰랐다.
‘처신… 은 아닌가?’
난데없이 타국의 군대가 입성하자 멀찍이서 사태를 지켜보던 영민들은 변경백의 굴복에 씁쓸한 표정을 짓거나 눈물을 보였다.
반응을 보니 나름 영민들에게 사랑받는 영주인 것 같고, 그렇다면 단순히 제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아부성 그랜절은 아니다. 보통 아부를 잘 하는 사람은 선정과 거리가 멀지.
“고개를 드십시오. 변경백께서는 황제 폐하의 존귀하신 뜻을 이해하여 제국의 위대한 여정에 동참한 동지이지 않습니까.”
6군단장도 변경백의 입지와 성격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는지, 우호적인 어투로 변경백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영민들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진짜 사랑받는 영주였나 보네.
‘다른 영주들도 이러려나?’
조금은 아쉽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귀족들이 많으면 제국 입장에서도 이득이나, 적당히 대들고 뻗대는 놈, 민심을 잃은 놈도 있어야 합법적으로 영지를 뜯어갈 수 있다.
물론 왕실 직할령이 있으니 빈손으로 가지는 않겠지만,그래도 이왕이면 귀족령을 가져가는 게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