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7)
로판 속 공무원 547화(548/945)
리잔슈타트가 영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도시 연합체가 된 것은 정당한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었다.
리잔슈타트를 지배하던 공작가의 대가 끊기고, 그 뒤를 이어 공작위를 차지한 가문도 나오지 않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국왕마저 화끈한 패전으로 인해 위신이 나락으로 갔으니 대책이 있겠나. 덕분에 리잔슈타트는 고만고만한 애송이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 시간부로 리잔슈타트 지역의 치안은 제국군이 담당하며,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지엄한 제국법으로 처벌할 것이다.”
하지만 제국군이라는 알기 쉬운 권위와 무력이 입성하자 30년 동안 혼란스러웠던 리잔슈타트는 거짓말같이 평온을 되찾았다.
제국군 입장에서는 실로 다행인 일이다. 만일 리잔슈타트가 하나의 지휘 계통을 따라 움직였다면 공작령을 상대해야 할 제국군도 거슬리는 피해를 입었겠으나, 리잔슈타트는 제국군이 입성하는 그 순간까지 힘을 합하지 못했다. 오히려 경쟁하듯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지.
박쥐처럼 보이는 행동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춘추전국시대를 열 때만 해도 투항자들은 공작령의 실권자가 될 야망에 불타올랐을 거다.
그러나 30년이나 이어진 경쟁은 야심가를 소시민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실권자고 나발이고 자기가 가진 도시, 혹은 소영지의 안전을 보장 받으며 평온한 말년을 보내고 싶었을 터.
“허나 리잔슈타트 각지의 관리는 현지인의 조언을 통하여 현지 관습을 존중할 것이니, 두려워 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
그렇기에 6군단장은 현지인의 조언을 운운하며 투항자들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암시했다.솔직히 우리는 공석인 공작만 채우면 되는 거지, 그 아래는 관여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싸그리 갈아버리면 그걸 다시 채우는 것도 일이다. 그러면 친제국 괴뢰 영지가 되어야 할 리잔슈타트가 제 역할을 하기는커녕 골골거릴 수도 있잖아. 기껏 장악한 보람이 사라지는 상황이다.
‘이걸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허나 투항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장점만 가득한 일은 아니다. 새로운 리잔슈타트 공작은 30년 동안이나 개처럼 싸운 미치광이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거니까. 한동안 공작이 아니라 조별과제 조장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작은 죄책감이 머리를 뒤덮었다. 북방에서 후작을 고를 때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는 꼴이라 미안할 필요가 없었는데, 여기서 공작위를 주는 건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과 비슷하다.
‘못 버티고 탈주할 수도 있어.’
게다가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기껏 고른 공작이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탈주한다는 최악의 상황을.
그게 세속에서의 탈주든, 이승에서의 탈주든 말이다.
‘…역시 그 양반밖에 없나.’
거칠게 머리를 헤집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에게 협조적이고, 억지로나마 공작에 오를 권위도 있고, 혼란스러운 리잔슈타트를 수습할 능력도 있고, 꼽다고 탈주하지 않을 책임감이나 이유가 있는 사람.
‘변경백.’
열심히 원정군에 종군 중인 달리하텐 변경백. 현재로서는 그 양반이 최선의 적임자다.
제국에게 국경을 연 공로와 종군 공로를 생각하면 공작의 인장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능력도 달리하텐 변경백령에서 영민들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봤으니 굳이 체크할 필요는 없고.
“귀족으로서 왕국을 이끌어 갈 왕가를 세울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걸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일이 끝나면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줄 생각입니다.”
심지어 며칠 전 대화를 나눠보니 변경백은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줄 생각으로 가득했다.
‘어딜 나도 못 하는 걸.’
괘씸… 아니, 너무 욕심이 없는 순수한 모습에 더욱 가산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변경백에서 물러난다고? 그럼 공작할 시간은 충분하겠네. 아들에게 변경백 작위를 물려줘? 제국 국경과 가까운 곳에 아들이 있는데 도망치지는 않겠지.
그러니 변경백밖에 없다. 아직 레온의 수도에도 입성하지 못한 만큼 모든 귀족들을 본 건 아니지만, 첫째 장인어른 공인 ‘싹수 보이는 놈은 다 죽였다.’를 생각하면 변경백보다 괜찮은 인재가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다.
‘조만간 독대라도 해야지.’
물론 공작의 자리를 당사자의 동의 없이 무작정 넘길 생각은 없다.
문명인다운 토론을 통하여 서로 만족할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 옳다.
지브로야 강을 넘어 레온의 수도에 입성했다.
사실 아카데미에서 네르카프 백작과 맺은 조약을 따르면 제국이 지브로야 강을 도하할 필요는 없다. 지브로야 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제국, 이북은 아르메인이 담당하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새로운 왕가를 세우겠다며 타국에 진입한 원정군이 그 나라의 수도에 발도 들이지 않는 건 이상한 일. 수도만큼은 예외를 두어 양국이 철수하기 전까지 공동 관리 구역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메인 왕국군 소속 레온 원정군 사령관인 메이너드 클러스 오브 이스케르탈입니다!”
그렇게 수도에 입성하자 거구의 남성이 쾌활한 웃음을 보이며 반겨주었다.
“성대한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크펠로펜 제국군 소속 레온 원정군 사령관, 요제프 레너입니다.”
이스케르탈 후작의 인사에 아주 잠깐 얼굴을 굳힌 6군단장은 금방 표정을 가다듬으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역시 늦었네.’
아르메인보다 굼뜰 수 없다며 빠른 행동을 보인 6군단장이었으나, 애석하게도 레온의 수도는 북쪽에 치우친 곳이다. 아르메인이 네 발로 기어오는 게 아닌 이상 아르메인이 먼저 입성하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6군단장이 이 악물고 달린 이유는 간단하다. 작위 귀족이자 고위 귀족인 이스케르탈 후작과 달리 6군단장은 남작가 출신이다. 두 사령관이 만난다면 압도적 신분 차이로 인해 다소 짓눌릴 수 있으니 수도라도 먼저 선점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게다가 아르메인의 분위기를 보니 얘네도 방금 막 입성한 것 같다. 간발의 차이로 우위를 놓쳤으니 6군단장 입장에서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겠지.
“원정군 감찰관, 칼 크라시우스 오브 타일글레헨입니다.”
허나 그건 6군단장 혼자서 이스케르탈 후작을 상대해야 할 때의 일. 다행히 이스케르탈 후작을 담당할 사람은 따로 있다.
“오.”
그리고 이스케르탈 후작도 처음부터 나를 염두에 두었는지, 내 인사에 작은 감탄을 내뱉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거 참, 설마 제국도 아닌 레온에서 대륙 제일 검을 뵙게 될 줄이야. 조금 놀랐습니다.”
“저 역시 총군 사령관까지 지낸 후작께서 이곳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범한 덕담이 오고 갔지만 나와 후작의 눈은 웃지 않았다.
방금 후작이 한 말은 ‘제국 실세라는 놈이 이런 변방까지 오는 건 반칙 아니냐?’ 라는 은근한 항의였고, 나는 ‘사령관까지 지낸 후작이 남작가 애를 괴롭히는 건 괜찮고?’ 라고 들이받은 거니까.
“하하, 저도 몰랐지만 어쩌겠습니까! 군인으로서 국왕 전하의 명을 수행할 뿐입니다!”
짧은 침묵 후, 이스케르탈 후작이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은 오직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마 제일 검께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싶은데…”
너도 나와 마찬가지냐는 말과 함께.
“관료나 군인이나 거기서 거기기는 하지요.”
“크흐, 그거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 대답에 이스케르탈 후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악수를 풀었다.
그래, 이 정도 탐색전이면 충분하다. 이것보다 치열하게 아가리 파이팅을 하기에는 우리가 적대 관계로 만난 것도 아니잖아.
“일단 이렇게 서있지 말고 왕성으로 갑시다. 왕세자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위문 사절단으로서 마땅히 그래야지요.”
“위문 사절단이요?”
순식간에 군대를 위문 사절단으로 만들어버린 발언에 후작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는 위문을 위해 온 것이지요, 아암!”
그래도 마음에 든 발언이었는지 다시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분이 조금 묘하다. 장관과 비슷한 덩치에 비슷한 나이대인 인물이 저렇게 웃으니, 꼭 장관한테 비웃음 당하는 기분이야.
이 치밀한 아르메인 놈들. 설마 그걸 노리고 보낸 인선인가?
원정군 수뇌부는 레온 국왕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대전으로 향하는 동안 레온의 대신들, 왕성의 시종과 호위병들을 보았지만 그들은 전부 시선을 피하거나 우리를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들이 충성하고 지켜야 할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물론 아직 국왕은 살아있다. 온 대륙이 아스투리아 왕가의 종말을 얘기하고 있지만 이번에 죽은 건 국왕이 아닌 왕세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지난 패전 이후로 반쯤 실성하여 국정에 손을 떼고, 30년 동안 무력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던 노인이다. 타국의 군세가 국경을 넘는 걸 막지 못하고, 수도까지 털린 지도자다.
“귀한 손님들이 왔군.”
그래서인지 타국의 국왕을 봤음에도,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음에도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런 가치와 의지가 없는 마네킹처럼 보였다.
“레온과 아스투리아의 비극에 애도를 표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혹 저희가 전하의 시간을 방해했는지요?”
이는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는지 6군단장은 군주에 대한 존중을 보이지 않고 편하게 입을 열었다.
“내 시계는 멈춘 지 오래지. 신경 쓸 것 없네.”
“다행이로군요.”
허나 늙고 무력한 군주는 그 무례를 지적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러니 자네들 편한 대로 있다가 편할 때 돌아가게나. 곧 죽을 노인의 눈치를 보느라 대의를 망칠 필요는 없으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저 타국의 의향대로 자국의 왕가가 세워지는 꼴에 눈을 돌릴 뿐.
아니, 저 노인 입장에서 레온을 더 이상 자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권리도 의무도 의욕도 없는 왕이 과연 국가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게 군주라.’
상황과 황제를 보고 지내서 그런지 낯설다. 이 세계의 군주는 전부 인간을 벗어난 심성과 능력을 가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미묘한 심정으로 레온 국왕을 보다가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딱히 말을 섞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저 양반을 상대할 일이 생기면 그냥 6군단장에게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