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8)
로판 속 공무원 548화(549/945)
왕성을 지휘 통제실로 삼은 양국 원정군 수뇌부는 군인이 아닌 행정 공무원이 된 것처럼 구르기 시작했다.
“각지의 영주들이 투항 의사를 밝혔습니다.”
“수도의 민심이 동요하고 있었으나, 밀가루를 다소 풀어 진정시켰습니다.”
“대신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 선언했습니다만, 군부대신과 농부대신은 사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6군단장과 이스케르탈 후작이 머무는 집무실에는 거의 10분 단위로 레온 왕국을 좌지우지할 보고들이 휘몰아쳤다.
왕국을 구성하는 영주들의 동향, 일국의 중심인 수도의 분위기, 행정을 담당하는 대신들의 행보까지. 국왕에게 닿아야 할 모든 것들은 국왕에게 닿지 않고 새로운 주인인 원정군에게 향했다.
아니, 솔직히 이쯤 되면 점령군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사임?”
“뭐, 받아들이도록 하죠. 어차피 군부대신과 농부대신은 은퇴를 코앞에 둔 노인이지 않습니까? 괜히 붙들고 있다가 노인 학대라는 헛소문이 퍼지면 곤란합니다.”
“그도 그렇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아무튼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보고에 6군단장과 이스케르탈 후작은 머리를 맞대며 원만한 합의점을 도출했다.
실로 다행인 일이다.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두 결정권자가 기싸움을 하면 아래 실무진만 죽어나간다. 하지만 결정권자들이 기싸움은커녕 빠르게 결론을 내리니, 실무진들 입장에서는 이상적인 상사라고 할 수 있겠지.
아마 사이좋게 이권을 나눠먹는 자리에서 괜한 불화가 생기기를 원치 않은 황제와 아르메인 국왕의 인선일 수도 있다. 가문의 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만 빼면 6군단장과 이스케르탈 후작은 그럭저럭 성향이 맞았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이런 사소한 일이 아니지요.”
‘아니.’
그 와중에 이스케르탈 후작은 방금까지 처리한 안건들을 사소한 걸로 치부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왕국을 좌지우지할 보고라고 평가한 내가 뭐가 돼.
“슬슬 차기 왕가를 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허나 이어지는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그렇지. 차기 왕가를 세우는 것과 비교하면 나머지는 사소한 일이지.
“아르메인은 세 가문 정도를 찾았습니다만.”
“제국은 둘입니다.”
“다섯이면 금방 추려낼 수 있겠군요.”
진지한 얼굴로 대화 중인 둘을 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막 퇴근 시간이 지났다. 차기 왕가고 나발이고 내 퇴근과 비교하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레온 왕성에서 저택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오늘도 수고 많았다.”
“가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늘 신세를 지고 있는 마법사의 어깨를 토닥이자 군기가 바짝 든 대답이 돌아왔다.
흡족한 대답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보너스라도 넉넉히 챙겨줘야겠어. 얘가 없었다면 이런 초-장거리 출퇴근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오라버니.”
그리고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정문에서 어슬렁거리던 리제가 밝게 웃으며 반겨줬다.
“추운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저도 막 나온 거예요. 오라버니는 딱 이 시간에 오잖아요.”
히히 웃는 리제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러서 정시 퇴근에 더욱 집착하고 있는 거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으면 홑몸도 아닌 리제가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리제야.”
“네?”
“왜 여보라고 안 불러줘?”
그 말에 리제의 몸이 빳빳하게 굳더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언제 봐도 귀여운 리액션이라 흐뭇하다. 정식으로 부부가 된 데다 뜨거운 시간을 보내서 아이도 가졌는데, 정작 여보라는 호칭 때문에 바르르 떨다니.
심지어 리제는 이미 결혼식날에 나를 여보라고 불렀었다.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지.’
타의가 아닌 자의로 여보라고 불렀으면서, 정작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다. 아무래도 그때는 결혼식이라는 기세에 밀려 내지른 모양.
“그, 그게, 3년이나 오라버니라고 부르다 보니까 습관이 돼서…”
“난 꼬박꼬박 애칭으로 불러주잖아.”
“그으, 건…”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는 리제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맞췄다.
더 놀리면 고장 날 것 같으니 자제하자. 스트레스 받으면 안에 있는 벚꽃이한테도 안 좋아.
“벚꽃이가 태어나면 여보라고 해줄 수 있지?”
“네, 네! 꼭 그전까지는 그렇게 할게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제를 보며 확신했다.
요 몇 개월 동안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아, 맞다. 나 오늘 선물 하나 가져왔어.”
그렇기에 호칭 논란에서 벗어나 다른 화제를 가져왔다. 여보라는 호칭이 탐나기는 하지만, 부인에게 줄 선물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선물이요?”
“이거.”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제를 향해 품속에 있던 인장 하나를 꺼내 보였다.
“백작령 하나 주워왔어.”
“…네?”
정확히는 수도 근처에 있던 왕실 직할령 중, 백작령 정도 크기의 땅을 하나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6군단장도 이스케르탈 후작도 딱히 눈치를 주지는 않더라. 오히려 그거 가지고 되겠냐며 더 챙기라고 하던데.
물론 리제와 벚꽃이가 다스리게 될 영지니 수도 근처에 있다면 썩 입지가 좋은 땅은 아니다. 아무리 텔레포트가 가능한 세상이라지만 월경지는 관리하고 싶지 않다.
‘국경 백작 하나 꼬드겨야지.’
그러니 국경에 있는 백작 중 괜찮은 놈하고 영지를 교환할 생각이다. 그 백작은 수도권으로 터전을 옮길 수 있어서 좋고, 나는 제국과 붙어있는 땅을 얻어서 좋지 않나. 서로 만족스러운 쿨거래가 될 수 있다.
‘나이어드 백작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가문을 고위 귀족가로 올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테니.
내 이름은 영원히 나이어드 가문에 남을 거다.
출근을 하자 어제보다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의 지휘 통제실이 반겨주었다.
그래도 참모들의 표정을 보니 극심한 위기가 닥치거나 두 사령관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냥 딱 ‘귀찮은 일’이 발생했을 때의 실무진들 표정이었다.
‘터질 일이 있나?’
그런데 이상하다. 어지간한 안건은 이미 처리했고, 우리의 행동에 그나마 제동을 걸 수 있는 레온 국왕조차 모든 걸 놓고 해탈한 상태다. 이 상황에서 현장도 아닌 수뇌부가 귀찮아 할 사태가─
“쿼로노스 왕국군이 국경을 돌파했습니다.”
있구나.
내 시선을 받은 한 참모의 속삭임 덕분에 귀찮은 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솔직히 제국도 아르메인도 전부 수도에 입성한 판국에, 이제야 국경을 돌파한 애송이들이 기억에나 남았겠냐.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잊고 있었다.
‘쿼로노스가 약한 건지, 레온이 강한 건지.’
명쾌한 해답 없는 의문에 한숨이 나올 뻔했다.
우리는 레온 왕국군과 교전을 벌이지 않아서 현 레온 왕국군의 전투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레온이 군사 강국으로서 쌓아온 전통과 교리를 생각하면 허수아비 수준까지는 아니겠다만, 30년이나 나라가 맛이 간 걸 생각하면 강군이라고 하기도 애매할 거다.
그리고 쿼로노스 왕국군은 그런 레온 왕국군을 상대로 이제야 국경을 돌파했다. 제국을 담당하는 서부 전선군, 아르메인과 붙어있는 북부 전선군도 아닌 동부 전선군을 상대로.
“국경을 넘었다면 수도까지는 금방이겠군.”
허나 국경에서 얼마나 발이 묶였는지는 상관없다. 동부의 영토를 대거 상실한 레온은 동부 국경에서 수도까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 오히려 제국, 아르메인보다 가까울 정도니까.
“그것이, 저희도 그렇게 예측했습니다만… 수도로 오고 있지 않습니다.”
“뭐?”
의외인 말이라 다시 되묻고 말았다.
“현재 쿼로노스 왕국군은 레온 동부를 배회 중이며, 저항하는 영주들을 제압하고 있습니다.
…
“하.”
이 새끼들이 미쳤나.
***
저 대가리에 밀가루만 찬 새끼는 미친 게 틀림없다.
“부관.”
“예, 각하.”
“군단장이 전투 중 사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상대가 철혈공인 게 아닌 이상 1%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고.
‘미친 새끼.’
입술을 잘근거리며 자칭 선배, 타칭 개새끼를 씹었다. 하필 많고 많은 군단장 중에 저딴 새끼가 원정군 사령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혹시 포커로 사령관 자리를 딴 건가? 다른 건 몰라도 정치질에는 능한 새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시발.’
그리고 원정군의 운명이 카드 쪼가리 따위로 결정됐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저 미쳐도 제대로 미친 새끼가 왜 이딴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현재 제국군과 아르메인군은 수도에 나란히 입성했고, 두 맹수는 수도라는 좁은 공간에서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건 이번 레온 사태에 대하여 두 국가가 공동 대응 하기로 합의했다는 말이다.
레온이라는 소국 정도는 홀로 독점해도 과하지 않은 대국이 손을 잡았으니, 그 외의 경쟁자는 원치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반으로 준 지분이 또 줄어드는 꼴이니까.
그런데 제국, 아르메인과 비교하면 약소국인 우리가 이번 일에 개입했다? 심지어 두 국가와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레온 동부 영지를 점거하고 있어?
‘누가 봐도 싸우자는 꼴이잖아.’
제국과 아르메인의 합의 따위는 알 바 아니니 우리는 우리의 이득을 챙기겠다는 패기. 강대국이 이러면 정당한 권리 행사지만, 약소국이 이러면 자살이다.
그래, 우리는 자살 행동을 하고 있는 거다. 레온에 발을 들인 이상 대가리를 박고 싹싹 빌어야 할 대상에게 도발을…?
“…부관.”
“예… 각하. 저도 보고, 있습니다.”
내가 묻기도 전에 부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나와 부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걸 보고 있을 거다.
“하.”
이윽고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면 정신이 나간다던데, 지금의 난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좆됐다.’
마치 신이 분노한 듯 처참하게 찢어진 하늘을 보며 직감했다.
제국은 이미 제대로 분노했다고.
그 분노를 대행할 자는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