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49)
로판 속 공무원 549화(550/945)
사람의 심리 중에는 그런 게 있다. 내가 내 가족, 내 학교, 내 직장, 내 나라를 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내 공동체의 머저리 같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앞장서서 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래서 눈을 뒤집으며 쌍욕을 내뱉고, 사지를 비틀며 부당함을 토로하는 것이 사람이다. 솔직히 욕이라도 안 하면 버틸 수 없으니 그런 거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욕을 하며 병신 같음을 인지하고 있어도 내가 아닌 타인이 내 공동체를 욕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욕을 해도 결국 내가 속한 공동체다. 아무리 치가 떨려도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다.그런데 감히 아무 연관도 없는 제3자가 나와 우리를 욕해?
‘죽여도 무죄.’
당장 쿼로노스 놈들을 죽여도 살인이 아닌 정의로운 도덕 집행에 불과하다. 감히 대륙에 널리고 널린 국가 주제에 위대한 제국을 욕보였다. 내 인생과 청춘을 바치며 지탱한 조국을 모욕했다.
이건 제국을 넘어 내 인생을 무시한 처사다. 감히 변방 소국 주제에 대국의 실세를 무시했다.
‘1일 1베기 간다.’
그렇기에 다짐했다. 황제가 말한 것처럼 쿼로노스 놈들이 제발 대화로 풀자며 대가리를 박을 때까지 하늘을 베겠다고.
물론 매일 하늘 베기를 쓰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늘 베기의 원조인 카간조차 1주에 1회로 그쳤으니까. 마이너 카피 주제에 원조보다 자주 사용하는 건 내 몸을 갈아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허나 그건 작정하고 쓸 때나 통용되는 말. 적당히 위력을 조절하고 치료를 빵빵하게 받으면 1일 1회도 어떻게든 가능하다. 중요한 건 하늘 베기의 위력이 아니라 하늘이 찢어진다는 퍼포먼스다.
‘괜히 쿨타임을 두면 기고만장할 새끼들이야.’
제국과 아르메인이 버티고 있는 걸 알면서도 자기들 이익을 챙기겠다며 뻗대는 것들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상대로 1주라는 쿨타임을 둔다? 잠깐의 위협이었다며 금방 머리에서 지우고 남을 놈들이다.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게 정답이다. 하루에 한 번, 조금씩 쿼로노스 왕국군이 있는 동쪽으로 나아가며 하늘을 벤다.
과연 그것들이 며칠 만에 사태 파악을 하고 대가리를 박을지 기대된다.
***
하늘이 찢어졌다.
자연재해도, 신의 분노도 아닌 인간의 손에 하늘이 찢어졌다.
“으하하핫!”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이미 검으로 하늘을 벤 타일글레헨 백작의 위용은 질리도록 들었고, 아티팩트에 녹화된 장면도 몇 번이나 봤다.
하지만 한 다리를 거쳐 접한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 몸을 짓누른 경이로움과 위압감은 고작 전해 들은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가, 각하.”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내 곁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던 참모들이 미쳤냐는 듯 쳐다봤다.
실로 불경한 시선이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늘을 찢어지는 걸 보고 웃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봐도 미쳤다고 생각할 테니.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것이 검의 끝.’
단순히 정점이라는 수준을 넘어 끝에 도달한 인물. 산의 정상에 오른 수준을 넘어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존재.
‘대륙 제일 검.’
이 대륙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검사들 중에서 당당히 제일임을 자처할 수 있는 무인.
같은 무인으로서 자극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저 경지에 도달할 거라는 자신감은 들지 않지만, 검의 한계가 무한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검 한 자루로 하늘조차 베는데 다른 일이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나. 노력하면 산과 강 정도는 베겠지.
‘적으로 만난 게 아니라 다행이야.’
터져 나오던 웃음을 멈추고 찢어진 하늘과 백작을 번갈아봤다.
진심이다. 대륙의 무인이 아닌 아르메인의 귀족으로서는 백작과 적으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저런 무인을 전장에서 적으로 만난다면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름 남부 총군 사령관까지 역임한 군인이지만 이렇게 막막한 적은 처음이다.
‘역시 국왕 전하의 혜안은 틀리는 법이 없군.’
이윽고 현재 아르메인과 제국의 관계가 역사 이래 가장 양호한 상태라는 것에 안도했다. 국왕 전하께서 제국에게 다소 굴욕적인 평화를 청하실 때는 언짢아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저 광경을 보면 전부 국왕 전하의 뛰어난 판단력과 지혜를 칭송할 거다.
그래, 국왕 전하께서는 치욕과 불명예를 감수하며 왕국과 신민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이신 거다. 국익을 위하여 최선의 판단을 하신 거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철혈공의 악몽이 재현됐겠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당시의 나는 사령관은커녕 일개 지휘관에 불과했으나, 그만큼 철혈공이 선사한 공포를 현장에서 절절히 체험하였다. 뛰어난 무인이 제국군을 이끌면 무슨 참사가 터지는지 두 눈으로 목도했다.
그리고 만약, 만약 양국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면─ 은퇴한 철혈공 대신에 누가 그 자리를 메울까. 누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흉터를 새길까.
‘…이 시대에 태어나줘서 고맙소, 백작.’
이 역시 진심이다. 백작이 30년 일찍 태어났다면 아르메인은 하늘을 베는 검사와 맞붙었을 터.
어쩌면 아르메인도 지금의 레온처럼 처참하고 비루한 국가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하하! 이 나이에 먼 타국까지 오게 되어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무인으로서 좋은 광경을 보게 됐군! 고맙습니다, 백작!”
그렇기에 빠르게 웃는 얼굴을 만들며 백작에게 다가갔다.대항할 수 없는 자와는 친분을 만드는 것이 살아남는 법이다.
아르메인의 기사는 용맹과 만용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어느 미친 나라와는 다르게.
***
미치광이에게도 최후의 이성은 남아있던 모양이다.
“쿼로노스 왕국군에서 사절을 보냈습니다.”
하늘 베기 챌린지가 2일차에 돌입한 날, 쿼로노스에서 사람을 보냈다.그것들도 나름 원정군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집단이니 2일차에 반응을 보인 건 제법 기민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버틸 생각이었는데, 이틀 연속으로 하늘이 찢어진 뒤에야 부랴부랴 움직인 걸 수도 있다. 그것들의 전적을 고려하면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돌려보내게.”
“그것들을 쉽게 만나줄 필요는 없지.”
그리고 참모의 보고에 두 사령관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이미 먼 길을 가버린 쿼로노스에게 순순히 마음을 열어줄 정도로 두 사령관은 물렁하지 않았다.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사절의 방문을 알린 참모도 예상한 대답이었는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제국과 아르메인 양국에 엿을 먹인 걸 생각하면 쿼로노스는 더 애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처음부터 만남을 허락해주기에는 그것들의 업보가 너무도 짙다.
“자, 그럼 저희도 슬슬 움직여보지요.”
그렇게 참모가 물러나자 이스케르탈 후작이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동부의 신민들이 해방을 간절히 원하고 있을 테니 서두르도록 합시다.”
6군단장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스케르탈 후작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쿼로노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들의 멘탈을 산산조각 내는 방법은 사절을 물리는 것에만 있지 않다.
손님이 가게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배달원이 자택으로 방문하는 것이 시대의 흐름. 그 흐름에 발 맞추어 우리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다가가는 방법도 있다.
‘아주 두근두근하겠지.’
하늘을 찢어버리는 검사와 대륙 1, 2위 국가를 동시에 상대하기. 설령카간이라 할지라도 고개를 저을 미친 난이도다.
물론 며칠 전의 쿼로노스라면 정신 못 차리고 덤볐을 수 있으나, 하늘 베기라는 극강의 빨간약을 처방받은 쿼로노스는 우리의 진군에 정신을 놓아버릴 터.
동부로 가는 길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두근거린다.
“쿼로노스 왕국군 소속 레온 원정군의 군단장, 알폰소 카르데나라고 합니다.”
흐음.
“변방 소국의 미천한 자들이 천명을 수호하는 제국과 대국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저희가 무슨 염치로 용서를 구하며 자비를 청하겠습니까.”
흐으으음.
“허나 미천하고도 무지한 자들의 명에 이끌린 자들은 죄가 없으니, 부디 병사들만큼은 가엽게 여겨주시기를 간청 드릴뿐입니다.”
흐으으으으음…
‘합격.’
제국군과 아르메인군이 쿼로노스가 점거한 지역에 진입한 직후,경계 지역에서 대기 중이던 한 남성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마음에 든다. 귀족의 예복이나 지휘관의 제복이 아닌 죄수복을 입은 것도, 병사들이 아닌 소수의 기사들과 함께 온 것도, 변명의 말을 늘어놓지 않고 냅다 대가리를 박은 것까지 전부.
‘얘가 최후의 이성이었네.’
실로 정상적인 반응이라 확신했다. 쿼로노스군이 간헐적으로 보이던 지성은 아무래도 이 알폰소라는 군단장 덕분에 나온 거라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원정군 사령관이 아닌 일개 군단장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건데,
“사령관은 운신이 불편하여 현 시점에서는 제가 원정군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휘관들도 사령관이 아닌 제 명을 따르고 있으니, 자격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한다.
멀쩡했던 사령관의 운신에 제약이 생겼다는 것은 이 군단장이 좀 심한 하극상을 했다는 거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았다. 양국에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미친 사령관보다는 이 군단장이 협상 상대로 어울릴 테니까.
지성도 있고 양심도 있고 눈치도 있고 결단력도 있는 군단장. 하필 이 따위로 만나지만 않았다면 제법 마음에 들었을 인재다. 역시 맛이 간 국가에도 인재 하나 정도는 나오는 법이구나.
그래서인지 더욱 아쉽다. 이 가여운 인재에게 온갖 핍박을 가해야 한다는 사실이.
“건방지군.”
일단 아쉬움을 뒤로하고 알폰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미안한 짓을 하는 입장이니 이 양반만큼은 이름으로 기억해 주자.
“어딜 감히 일개 군단장이 자격을 운운하느냐.네놈에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건 본작이다.”
영 익숙하지 않은 말투지만 어떻게든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나는 제국의 실세이자 쿼로노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저승사자여야 한다. 아주 깐깐하고 괴팍한 씹새끼여야 한다.
“본작은 위대한 리브노만 황가의 은혜를 받아 타일글레헨과 위리디아를 다스리는 백작이요, 명예로운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의원이다. 또한 무수히 많은 군단에 대한 감찰권을 지니고, 타락한 황가를 응징하는데 일조한 리시자리우네의 이름을 허락받은 기사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내 타이틀도 길어졌네. 앞으로 황제가 어디 왕, 어디 공작, 어디 후작이라고 할 때 비웃지도 못하겠어.
“그런데 네놈은 어떻지? 변방 소국의 군단장이라는 알량한 이름 따위로 본작과 대등한 대화가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 것은…”
“네놈들은 어디까지 제국을 능멸할 생각인가.”
그 말에 알폰소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직 안 끝났다.
“본작은 황제 폐하의 대리자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황제 폐하의 군대가 대륙의 평온을 위해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지 감독하고, 찬란한 천명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러고는 최대한 딱딱한 표정으로 알폰소를 노려봤다.
“언제부터 군단장 따위가 황제 폐하의 대리자와 맞먹는 직책이 됐는지 모르겠군.”
맹렬한 공세에 알폰소는 떨림조차 멈췄다.
아무래도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다.
‘미안하다…’
하지만 국왕을 잘못 만난 네 잘못도 아주 조금은 있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