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51)
로판 속 공무원 551화(552/945)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쿼로노스 왕국은 진심 어린 대가리 박기를 선보이며 군을 물렸다.
정확히는 물린 게 아니라 갖다 버린 수준이기는 한데, 아무튼 이번 레온 사태에 쿼로노스가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황제 폐하께서 차기 레온 국왕으로 히메니시아 가문의 게스티야 백작을 택하셨습니다.”
“역시 폐하의 지혜는 대륙을 덮을 정도로군요.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도 게스티야 백작을 높게 평가하셨습니다.”
덕분에 제국과 아르메인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새로운 레온 왕가를 택할 수 있었다.
히메니시아 가문. 레온 왕국 중부에 위치한 가문으로, 고위 귀족에 속하는 백작위 하나와 여러 남작위를 들고 있는 평범한 가문이다. 딱히 못난 건 없지만 특출난 것도 없고, 당대 가주도 무능하다는 평가는 없지만 국왕이라는 자리를 차지할 만큼 유능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기에 양국은 히메니시아 가문의 게스티야 백작을 택한 것이다.
‘괜히 유능한 놈 골랐다가 설치면 귀찮기만 하지.’
제국과 아르메인이 원하는 인물은 간단하다. 적당히 왕좌를 지키고, 양국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항하지 않는 인물. 그렇다고 너무 한미한 가문을 택하면 다른 귀족들이 반발할 테니 백작이 적당하다.
게다가 히메니시아 가문에는 아스투리아 왕가의 피가 조금은 흐른다. 약 150년 전, 아스투리아 왕가의 공주가 당대 히메니시아 가주와 혼인을 했다고 하니까. 솔직히 섞였다고 하기도 민망한 과거의 일이나 명분으로 내세울 정도는 된다.
“두 국가의 뜻이 일치하니 게스티야 백작의 덕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앞으로 레온 왕국에는 평화와 번영으로 가득하겠군요.”
“하하! 그동안 레온 왕국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이제 빛을 볼 때가 되긴 했습니다!”
그렇게 차기 국왕, 새로운 왕가가 결정되자 6군단장과 이스케르탈 후작은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다.
‘평화와 번영.’
거창한 단어가 오고 갔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단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레온은 더 이상 제국과 아르메인의 허락 없이 군사조차 일으키지 못할 것이기에 강제로 평화를 유지할 것이고, 영토 곳곳이 해외 자본을 통해 개발될 테니 번영을 이루기는 할 것이다.
그 평화와 번영이 레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
“자, 그럼 이제 새로운 국왕 전하를 뫼시러 갑시다.”
이스케르탈 후작의 제안에 집무실에 있던 참모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적법한 왕가를 잃고 혼란에 빠질 레온의 신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타국까지 온 원정군이다. 당연히 새로운 국왕을 맞이하는 것도 원정군이 먼저 하는 것이 옳다.
이 과정에서 레온의 귀족들이 낄 필요는 없다.
게스티야 백작령에 진입한 원정군 수뇌부는 당당히 백작성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천명이 전하의 즉위를 원하고 있습니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지엄한 명이구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게스티야 백작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수뇌부는 현 레온 국왕에게도 보이지 않는 정중함과 예우를 게스티야 백작에게 표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레온의 정당한 지배자는 게스티야 백작─ 아니, 앞으로 엔리케 1세라고 불릴 국왕이니까.
“이 부족한 놈은 국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 천명이 그걸 원한다면 기꺼이 짊어지리라. 내 몸을 나의 것이 아닌 대의를 담는 그릇으로 여기겠소.”
“실로 아름다운 말씀이십니다.”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너희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겠다.’ 는 선언에 6군단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 선언에 마음이 편해졌다. 주제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사람이 왕좌에 버티고 있다면 레온에 소란이 터질 확률은 줄어든다. 이미 대다수의 귀족들은 우리에게 협력한 공범들이며, 유사시를 대비하여 양국의 병력이 레온에 주둔할 테니.
그리고 원정군이 새로운 국왕을 정했다는 소식은 왕성에 있던 노인에게도 들어갔고,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왕국과 신민들은 끝없이 울부짖었다. 허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노인이 여태껏 왕좌에 앉아있던 것은 정당한 계승자를 찾지 못하였음이니. 마침내 과인의 마지막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할 따름이다.”
원정군이 레온에 진입한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 왕명을 내렸다.
“아스투리아의 마지막 국왕으로서 히메니시아의 가주께 제관을 바칠지니. 부디 새로운 국왕께서는 신민들을 덕으로서 보듬어주시기를 엎드려 청하오.”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기력한 명령을.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한 늙은 군주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한을.
***
모든 것이 끝났다.
국왕 전하… 아니, 이제는 전 국왕이 되어버린 아스투리아 가주께서는 새로운 가문에게 레온의 왕관을 넘기셨다.
예상한 일이라 그런지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아스투리아 왕가와 명운을 함께 하겠다며 죽음을 각오한 것치고는 놀랍게도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왕가가 교체되는 과정이 평온하고 고요했기 때문이겠지. 타국의 군세가 자국에 진입한 것을 평온하다고 하는 건 이상하지만, 공석이 된 왕좌에 앉기 위해 귀족들이 죽고 죽이는 일은 막지 않았나.
‘이 역시 순리인가.’
왕성의 관료들이 양위식을 준비하는 광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것이 순리일 수도 있다. 국운을 건 전쟁에서 패하고,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죽은 가문이 물러나는 것은 순리다. 새로운 왕가가 제국과 아르메인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반대로 생각하면 레온은 그 두 국가의 비호를 받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니 이를 거스른다면 그것이 역리다. 비탄에 빠진 신민들에게 왕가가 누구고 어느 국가의 간섭을 받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나도 물러나야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혼란을 틈타 레온을 침공한 쿼로노스도 물러났고, 새로운 왕가도 무사히 옹립되었다. 내가 봐야 할 것들은 전부 보았으니 조용히 물러날 일만 남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서 오게, 변경백.”
타일글레헨 백작의 호출을 받기 전까지는.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 그동안은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각하께서 아무런 연관도 없는 레온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신 것을 아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히려 각하의 부름을 받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런, 더 민망한 말을 하는군.”
웃음을 터뜨리는 백작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하늘을 찢어버리고 쿼로노스의 군단장을 압박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내 앞에는 백작 나이대의 청년이 앉아있는 것 같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백작이 나를 압박했다면 내 심장이 버텼을지 의문이다.
“사실 변경백과는 진작에 대화를 나누고 싶었네. 레온의 평화를 위하여 제국군에 협조했다는 오명을 감수했으니, 제국의 귀족으로서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나.”
“각하의 말씀대로 레온을 위해서이니 감사를 받을 일은 아닙니다.”
“거 참, 겸손이 과하면 듣는 사람이 민망한 법이야.”
픽 웃은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반에 있던 다과를 직접 가져왔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지. 내 부인이 만들어서 하는 말은 아닌데, 내가 이것보다 맛있는 건 별로 먹어본 적이 없어.”
애처가스러운 말이지만 흠칫하고 말았다. 백작이 신혼 중임에도 타국까지 온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감히 백작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거다. 신혼을 방해받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가 분노를 뒤집어쓰는 것도 두렵지만, 황제가 신혼 중인 신하를 타국으로 보낼 정도면 얼마나 그 신하를 신뢰하는 것이며, 그 명에 따를 정도면 얼마나 사이가 돈독한 것이겠나.
“영광입니다.”
본능적인 아부와 함께 백작이 가져온 과자를 하나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기는 했다. 전문 제빵사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괜찮지?”
“아, 예. 수도의 카페에서도 이 정도 과자는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백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애처가스러운 모습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인 것 같다. 정략 결혼이 아닌 연애 결혼이라 그런가.
“부인이 홑몸이 아님에도 매일 만들어준다네.”
“좋은 분이시군요. 매일매일 행복하시겠습니다.”
“하하, 딱히 그렇지는 않아.부인을 두고 타국에 가는 것도 미안한데 선물까지 받으니 오죽하겠나. 덕분에 나도 부인에게 줄 선물을 이러저리 챙겼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백작이 왕국 서부를 중심으로 영지 수집 중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백작의 영지 쇼핑은 누구도 막지 않았다. 제국과 아르메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레온의 귀족들이 제국의 실세에게 어찌 이의를 제기하겠나. 심지어 주인 있는 영지가 아닌 왕실 직할령을 가져가거나, 그도 아니라면 거래를 통해 가져갔으니 반발할 명분도 부족하다.
“가장이라면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선물을 챙기는 게 도리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변경백도 하나 가져가게. 누구보다 공을 세웠으니 변경백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뜬금없는 말을 꺼낸 백작은 품속에서 인장 하나를 꺼냈…
‘잠깐.’
사자 모양으로 조각된 은빛 인장을 보자마자 머리가 굳었다.저거 굉장히 익숙한 모양인데.
‘설마.’
이윽고 찻잔을 잡고 있던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레온의 귀족이라면 모를 수 없는 생김새다. 직접 본 사람은 없어도 들은 사람은 넘쳐나는 전설의 물건이다.
“변경백의 공은 하나하나 언급하기 버거운 수준일세. 새로운 리잔슈타트 공작이 되기 충분할 정도로 말이야.”
“그, 가, 각하…”
“일등 공신이 빈손으로 돌아가면 쓰나. 자식에게 물려줄 작위 하나는 들고 가야지.”
그러고는 팔짱을 낀 백작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겨우 정당한 국왕이 즉위했는데, 공작위도 주인을 찾아야 진정으로 질서가 잡혔다고 할 수 있어. 변경백이 아니라면 자격이 없는 자들이 괜한 욕심을 부릴 거야.”
네가 받지 않으면 공작위를 미끼로 걸고 귀족들의 내분을 유도하겠다는 은근한 협박.
“하지만 변경백이라면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새로운 국왕을 성심성의껏 보필할 거라 믿고 있네.”
또한 공작이라는 이름에 헛바람이 들지 말고, 얌전히 제국의 말에 순응하라는 압박까지.
“…제가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격은 자네가 판단하는 게 아닐세.”
백작은 아까와 같은, 동시에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판단하는 거지.”
짧지만 강력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변경백이 순순히 인장을 받았을 때는 감동했다.
너 아니면 진짜 사람 없다고, 네가 거절하면 자격도 없는 귀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괜찮은 놈을 찾아야 된다고 어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별 고민 없이 가져갈 줄은 몰랐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이구나.’
리잔슈타트 공작령은 제국이 관리할 지브로야 강 이남에 속하고, 새로운 공작이 된 변경백은 가장 먼저 제국에 합류할 정도로 눈치 빠른 양반이다. 앞으로 리잔슈타트도 그럭저럭 괜찮은 친제국 영역으로 남을 터.
‘이제 다른 녀석 꼬드기러 가야지.’
기분 좋은 시작이라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어려울 거라 생각한 공작위 짬처리가 수월히 끝나서 그런가, 알폰소도 순순히 협조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