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52)
로판 속 공무원 552화(553/945)
하루하루가 무의미했다. 누군가 내 삶을 묻는다면 살아가고 있다는 표현보다 죽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을 쓸 것 같다.
나는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경이로울 정도로 무능하신 분들의 손가락에 휘둘려 개처럼 고생하고, 하극상도 각오하며 최악을 피하려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최악을 피하지 못했다.
나라가 살아남으면 뭐 하나. 국왕 전하가 멀쩡하면 뭐 하나.
‘내가 이 꼴이 났는데.’
우스운 일이다. 조국의 최악을 막은 대가가 나 자신의 최악이라니. 설마 내가 역사와 소설로만 보던 비운의 애국자가 될 줄은 몰랐다.
“저희가 조국에게 버림받았는데!”
문득 부관의 울분에 찬 외침이 떠올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귀족으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불경한 말이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부관의 말처럼 우리 원정군은 조국에게 버림받았다. 그래야 조국이 살 수 있으니까. 조국이 짊어지어야 할 제국과 아르메인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으니까.
사실 버림패로 전락한 것이 사령관 뿐이라면 조국의 결정에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을 거다. 아무리 군인은 상부의 명에 따른다지만, 그 새끼는 정치질과 아부, 뇌물을 통해 그 자리에 오른 놈이다. 무능한 전 내각과 한통속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부패한 주제에 무능하고 독선적이고 뻔뻔하기까지 했으니 ‘군인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단순히 명령에 따랐다고 보기에는 그 새끼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들도 많았어.
‘그런 사령관으로도 부족한가.’
허나 애석하게도 조국은─ 내부대신은 두 대국의 분노를 잠재우려면 사령관 하나가 아니라 원정군 전체를 던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틀린 판단은 아니다.
그저 나까지 그 원정군에 포함되어 같이 팔려갔다는 게 문제지.
“가족들은 잘 있으려나.”
간이침대에 몸을 누인 채로 중얼거렸다. 내 앞날도 걱정이지만 가족들이 괜찮을지도 걱정된다. 가문의 자랑이었던 최연소 군단장이 한순간에 떨이로 팔려간 상황이잖나.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내부대신은 다른 대신들과 달리 상식적인 사람이니, 원정군의 가족들에게 손을 대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우리가 정말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국가를 위해 희생된 건데, 그 가족들을 핍박한다면 쿠데타로 집권한 내부대신이 역쿠데타를 당할 터.
다만 다시는 가족들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몸 건강히 돌아오겠다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 인사가 돼버렸어.
“흐으…”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령관 새끼를 구금하는 게 아니라 아예 탈영을 할 걸 그랬나?
아니야, 그러면 남아있는 가족들이 위험해. 나 살겠다고 가족들을 죽이는 꼴이잖아.
‘싸우다가 어디 다쳐야 했나?’
아니, 그것도 아니다. 꼴에 원정군이라고 치료 인력은 부족함이 없었다. 어지간한 상처는 금방 치료가 가능하니, 원정군에서 이탈하려면 정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놀 정도의 부상을 입어야 된다.
결국 처음 원정군에 합류한 순간부터 이런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 이 못난 나라의 군인인 순간부터 내 파멸은 정해져있었다.
‘국적을 정할 수 있었더라면.’
극악의 상황에 처하니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쿼로노스의 귀족인 것에 불만은 없었다. 무능한 윗대가리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하여 부와 명예,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이 나이에 몰락할 줄 알았다면 그냥 평민으로 살았을 거다. 보잘것없는 평민의 삶이라도 이 삶보다는 좋았을 테니.
아, 레온은 빼고. 아무리 그래도 레온은 아니야.
‘…응?’
차라리 깔끔하게 자결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 막사 밖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물론 원정군의 떨이 판매가 결정된 이후로 잠잠했던 적이 있었냐만은 지금 느껴지는 소란은 절망과 분노가 아닌 당혹감으로 가득한 소란이었─
“오, 여기 있었군.”
?
다짜고짜 막사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리가 굳고 말았다.
눈이 보낸 정보를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순간 내가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런. 혹시 자고 있는 걸 깨운 건가?”
“아, 아, 아닙니다!”
뒤이은 목소리에 멈췄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타일글레헨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침대에 누였던 몸을 격렬하게 일으키며 바닥에 엎드렸다.
나와 원정군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막사에 물과 육포밖에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부관을 쪼아서 찻잎이라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검소하군. 사령관이라는 놈은 자기 막사에 레스토랑을 차려놨었지. 그나마 자네 같은 지휘관이 있어서 원정군이 살아남은 모양이야.”
“과찬, 이십니다.”
하지만 이 비루함이 백작의 눈에는 좋게 보인 모양이다.
미칠 것 같다. 불과 1분 간격으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야.
“갑자기 와서 놀랐나?”
내가 긴장감에 짓눌렸다는 걸 눈치챈 백작은 픽 웃으며 물었다.
당연한 거를 왜 물어, 이 미친 인간이.
“각하께서 죄인이 있는 곳까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답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순화하여 대답했다.
동시에 진심이기도 했다. 완전히 제국의 손아귀에 놓인 원정군, 그것도 포로나 다름없는 군단장을 직접 찾아왔다. 전령을 쓰거나 나를 소환하면 충분함에도 당사자가 온 것이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제안…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안. 내가 아쉬워서 권하는 건데 직접 찾아오는 성의는 보여야지.”
그 말에 멍하니 백작을 바라봤다. 미안하다는 말도, 아쉬워서 직접 찾아왔다는 말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제야 눈치챈 거지만 나를 부르는 호칭도 네놈에서 자네로 격상된 상태였다.
‘같은 사람 맞나?’
제국과 아르메인에게 항복 의사를 표했을 때, 자비 없이 압박했던 백작이 떠올랐다. 그때 그 사람과 이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혹시 이중인격자인가?’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까. 저게 이중인격이 아니면 뭐가 이중인격인데.
“갑자기 찾아왔으니 빠르게 말하도록 하지. 우선 원정군은 전원 쿼로노스로 돌려보낼 예정이네.”
“…예?”
허나 백작의 인격 개수 따위는 금방 잊게 만들 발언이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
“쿼로노스가 원정군의 처우를 제국에게 맡기겠다 했으니 돌려보내는 것도 제국의 마음이지. 황제 폐하께서는 명에 따라 타지에 온 그대들을 가엽게 여겨 고국으로 돌려보내라 명하셨다네.”
“화, 황제 폐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난 자네가 남았으면 좋겠어.”
연이은 충격에 다시 머리가 새하얘졌다. 방금 전부 돌려보낸다고 했으면서 나는 왜.
‘대체 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왜 나보고 남으라는 거지? 혹시 저번에 항복을 하겠다고 까분 것 때문에 괘씸죄가 박힌 건가?진짜 그게 이유라면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쿼로노스는 자네 같은 인재가 있기에 너무 작은 호수야. 제국이라는 대양에서 마음껏 놀아봐야지.”
다행히 괘씸죄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괘씸죄인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충격을 받았다.
제국의 실세에게서 망명 제안을 받았다.
***
알폰소를 포섭하는 건 변경백을 꼬드기는 것보다 쉬웠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네. 먼저 신의를 저버린 것은 쿼로노스야. 충성을 다한 자네를 필요에 의해 버리지 않았나.”
“가족이 걱정되나? 그렇다면 쿼로노스에 있는 가족들도 제국으로 올 수 있게 해주지. 그 정도는 간단해.”
“왜 자네냐고? 자네의 능력과 충성심이 제국을 향한다면 좋겠구나, 싶어서지. 별 이유는 없어.”
“아, 자네 부관이나 동료들을 데려와도 상관없다네. 인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들 가족도 빼올 테니 걱정은 말고.”
전향자가 고민하는 요소를 빠르게 해결해 주니 알폰소의 마음은 급격히 제국에 기울었다.
그야 평생을 충성한 조국에 버림받고, 개새끼스러운 첫인상이었던 내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튼튼해 보이는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시선이 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내가 이번에 얻은 영지들이 많은데, 대영주 자리는 주인이 있어도 그 아래는 아니지. 그중 일부를 자네 가족에게 맡기고 싶어.”
“…제국인이 되겠습니다.”
결정타는 실질적인 보상 제안이었다. 전향만 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영주가 될 수 있다는데 그걸 거절해?
“목숨을, 목숨을 다하여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향을 선언한 알폰소는 그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을 보였다.
너무 애잔한 모습이라 절로 동정심이 갔다. 만약 내가 황제의 명 때문에 시발시발거리며 타국에 갔다가 그 타국에 팔리면 무슨 심정일까.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도 방향으로 하늘을 찢었겠지.
“딱 제국이 주는 만큼만 일하게. 그 이상 헌신할 필요는 없어.”
그렇기에 알폰소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었다.
“어디 가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는 하지 말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과 함께.
무조건적인 충성이 어디 있어. 다 받는 만큼만 일하는 거지. 제국이 주는 것도 없는데 희생을 요구하면 탈주해도 무죄야.
‘이제 끝났네.’
아무튼 가벼운 발걸음으로 쿼로노스 왕국군의 주둔지를 벗어났다.
새로운 왕가도 세우고, 영지도 제법 수거했고, 공작위도 적당한 사람에게 줬고, 의외의 인재도 발굴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알찬 출장이었다.
다음에도 타국으로 갈 일이 생기면 딱 이 정도 수준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최선은 아예 출장을 갈 일이 없는 거지만.
‘장거리 출퇴근도 조만간 끝이다.’
기지개를 켜며 레온 왕성으로 향했다.이제 사소한 사후 처리만 끝내면 내 출근지는 리제의 옆이 된다.
이제야 신혼다운 신혼을 즐길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