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54)
로판 속 공무원 554화(555/945)
레온 출장이 끝난 이후로 황제의 태도가 급격히 온화해졌다.
정확히는 나를 레온에 던진 순간부터 온순해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쿼로노스에게 쿠데타가 터질 정도의 압박을 준 것이 가산점이 된 것 같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황제에게 찍힌 국가를 박살 낸 거니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게. 오늘도 좋은 아침이군, 장관.”
“폐하의 은덕이 하늘을 덮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기에 황제가 나를 업무적 목적으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저 황태녀의 대부로서 황태녀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정도.
‘왜 올 때마다 있지?’
사소한 의문이 있다면 업무로 바쁠 황제가 늘 황태녀 곁에 있다는 거다.
이 새끼 일 안 하나? 내가 같은 시간에만 오는 거면 말을 안 하는데, 아침에 오든 점심에 오든 저녁에 오든 매일 이 새끼 얼굴도 덩달아 보고 있잖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소한 의문일 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어─ 마─ 어음… 마아!”
“그래, 이 엄마는 여기 있단다.”
어느새 생후 1년을 훌쩍 넘은 황태녀는 자기 발로 걸어 다닐 수 있고, 어눌하게나마 엄마를 찾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아빠라면 그 아름다운 광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겠지.
지금도 황태녀가 아장아장 황후에게 걸어가며 엄마를 찾고 있지 않나. 평소에도 온화한 황후의 표정이 더더욱 밝아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엄~ 마아아.”
“우후훗.”
자신의 품에 폭 안긴 황태녀의 칭얼거림에 황후는 다소 붉어진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언제 봐도 흐뭇한 광경이다. 우리 페디도 반 년 정도만 더 지나면 저렇게 되겠지?
“이제 아빠라고 불러줄 때도 됐는데.”
그 와중에 황제의 서글픈 중얼거림이 들려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애석하게도 황태녀의 입에서 아빠보다 대부가 먼저 나오게 하겠다는 욕망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황제 역시 아직 황태녀에게서 아빠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내가 이기지 못할지라도 상대도 이기지 못한다면 만족할 수 있다.
‘이게 최선이지.’
사실 황태녀 입에서 아빠보다 대부가 먼저 나온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급격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황제가 어떤 기상천외한 관례를 들고 와서 두들겨 팰지 장담할 수 없으니.
그러니 우리 예쁜 대녀, 한 달 정도만 더 애태우다가 적당히 아빠라고 불러줘.그래야 너희 아빠가 더 감동할 거야.
‘적당한 밀당은 오히려 이로운 법이지.’
차기 황제가 될 황태녀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이다.
“그러고 보니 장관.”
“아, 예, 폐하.”
“카토반의 아이들은 소식이 없나?”
“예. 아직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기 싫은 모양입니다.”
씁쓸한 눈으로 황태녀를 보던 황제의 질문에 머쓱히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들이 언제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트릭시가 힘들어할 때마다 이만 나와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고 있기는 한데, 뱃속에서 지내는 게 편한지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발길질도 별로 안 해.
‘페디는 한밤 중에도 난리였었는데.’
어쩌면 좁은 공간에 셋이나 몰려있으니, 서로 발길질 같은 격한 행동은 자제하자고 합의를 본 걸 수도 있다.
벌써부터 미래가 기대되는 현명한 아이들이다. 제발 밖으로 나와서 이 아빠한테 얼굴 좀 보여줬으면 싶을 정도로.
제발.
“마종공도 고생이 많겠군. 셋이나 되는 아이를 품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텐데.”
“그 고생을 잊을 정도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니 버틸 수 있는 거지요.”
“하하, 그건 그렇지.”
짧게 웃음을 터뜨린 황제는 내 옆에 다가오더니 어깨를 토닥였다.
“뭐, 아이들은 변덕이 심하니까 말이야. 당장 오늘이라도 나올 수 있으니 장관의 말처럼 기다리고 버티다 보… 음?”
덕담을 건네던 황제가 내 가슴팍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뭐야.’
그리고 황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니,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통신구가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기세로 발광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받아보게. 이러다 눈이 멀겠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제의 허락에 재빨리 통신구를 작동시켰다.
절로 손이 떨렸다. 트릭시가 특별히 손봐준 이 통신구는 급한 연락일수록 더 강렬한 빛과 진동을 동반하는 물건이다. 그런 통신구가 이 정도의 빛을 뿜는다는 건─
– 칼! 언니가 진통을 시작했어요!
‘아.’
가족이 걸린 문제밖에 없다.
“…정말 오늘 나올 줄은 몰랐는데.”
황제의 중얼거림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에서 나올 때만 해도 잠잠하던 애들이 갑자기 이럴 줄은 몰랐다.
황제와 황후에게 급히 예를 표하고 저택으로 복귀했다.
“트릭시는!?”
“의료진과 함께 방에 계십니다!”
집사의 재빠른 보고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마르에게 진통 소식을 듣고 저택에 오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저택의 사용인들도 바삐 움직였다.
‘괜찮겠지?’
이윽고 애써 억눌러두었던 불안감이 솟구쳤다. 다행히 트릭시는 임신 기간 동안 몸을 움직이기 불편한 것 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나와 연관이 있는 세 신이 집중적으로 보살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나 세쌍둥이 임신과 세쌍둥이 출산은 다른 문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세쌍둥이 출산은 부담이 큰 행위다.
물론 이 세계는 끔찍한 중세의 의료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데다 마법과 신성력이라는 변수도 존재한다. 무려 공작의 출산인 만큼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의료가 붙을 거다.
그럼에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혹여나 트릭시와 태양이, 하늘이, 초목이 중에 누군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두렵다.
‘제발.’
그래서 트릭시가 세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세 신의 권위를 태명으로 삼았다.
신의 권위를 태명으로 삼으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이 나에게 주는 관심의 100분의 1이라도 아이들에게 갈 것 같아서.
‘제발.’
이미 위리디아 백작령에는 페디의 무사 탄생을 기념하는 에넨의 교회가 건설 중이다. 영원한 푸른 하늘은 내 덕분에 세계수에서 신성력 수수료를 받아먹고 있고, 콘스탄티나는 아예 재강림에 성공했다.
그러니 세 신의 가호가 우리 아이들에게 향할 거다. 태양이도 하늘이도 초목이도 건강히 태어날 거다.트릭시도 잠깐 기운이 빠질지언정 다시 회복하고 일어날 거다.
그래, 반드시 그럴 거다.
***
마나의 속삭임이 들린다.
문 너머에서 칼이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다른 아이들이 그런 칼을 달래는 것도, 사용인들이 잠시도 쉬지 못한 채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카토반 가문의 가신들이 단체로 몰려온 것도.
그리고 소식을 접한 마법사들이 저택 밖에서 기도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마나를 타고 내 귀에 들어왔다.
‘마법사가 기도라.’
힘겨운 와중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이 따라야 할 것은 천상의 신이 아닌 스스로가 확립한 이성과 합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법사다. 모든 마법사들이 종교와 거리를 둔 것은 아니나, 적지 않은 마법사들이 종교에 무관심하다.
허나 그러한 마법사들이 하나 같이 신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 나를 위해, 내 아이들을 위해.
‘무사히 태어날 수 있을 거란다.’
그래서 그런지 나 자신만큼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이 온 세상의 귀여움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나도 있을 거다. 출산 끝에 사망한 아내라는 비극적인 이야기 따위, 우리 가족에게는 필요 없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물론이란다.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하지만 내가 진통 중에 비명은커녕 미소를 짓고 있자 걱정이 됐는지 의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내가 가진 마법 중에는 출산의 고통마저 완화시킬 수 있는 효능이 있었다. 100년 동안 출산을 해봤어야 알지.
“…흐으읏!”
“가, 각하!”
“다들 모여! 시작됐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완화일 뿐, 모든 고통을 없애는 건 아니었다.
‘마법이 있어도 이 정도라니.’
조금 무서웠다. 만약 마법조차 없이 세쌍둥이를 낳으려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 지금은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에 감사해야지.
***
저택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막지 않았다. 저들이 좋은 의도로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하고, 기도가 많을수록 신이 들어줄 확률도 높아질 것 같으니까.
“괜찮을 거란다. 콘스탄티나께서 트릭시를 보우하실 거야.”
그러나 기도가 늘어나든 말든 초조한 심정을 감출 수 없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외조모님께서 등을 토닥여주셨다.
“예, 그렇겠지요. 반드시 그럴 겁니다.”
내 등을 토닥이는 외조모님의 손도 떨렸기에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간 세상과 얽히는 걸 극히 꺼려 하는 외조모님이다. 덕분에 트릭시의 결혼식을 세르베트 공작령에서 한 번, 이종족 보호 구역에서 한 번 치를 정도였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외조모님이 이 저택까지 오신 거다. 외손녀와 외증손주들이 걱정되어 인간에 대한 꺼림직한 감정을 미뤄두신 거다.
‘나라도 진정해야지.’
그렇기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외조모님을 보며 다잡았다. 나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누구도 제정신일 수 없기에.
‘아직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희미한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사태를 파악했다.
일단 페디가 태어났을 때의 경험과 비교해 보면, 간간이 들리는 비명과 분주함은 오히려 청신호다. 저 정도는 아이가 태어날 때 당연히 들리는 소리다.
만약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면 진작에 의료진이 나에게 언질을 줬을 거다. 그런 불길한 징조가 없으니 확실히 청신호라 보는 게 옳다.
‘청신호가 맞아.’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되뇌었다. 괜히 안 좋은 생각을 하면 그게 실제로 이루어질까 봐.
1시간, 2시간, 3시간이 흘러서도 그 다짐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가 셋이니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
그리고 내 의지에 신들도 감동했는지,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끝났습니다! 산모도 아이도 전부 무사합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던 말과 함께.
“셋 다 어여쁜 따님입니다!”
절로 미소가 나오는 말과 함께.
우리 페디, 순식간에 여동생이 셋이나 생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