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58)
로판 속 공무원 558화(559/945)
이 방법만은 쓰기 싫었다. 정주민을 상대로 사냥 대결이라는 수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드라펜 후작은 다른 사람도 아닌 대륙 제일 검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이 검술 대련으로 연승을 거듭하고 있다면 나도 사냥이라는 이점을 동원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샤티야, 많이 추하다.”
“조용히 하세요!”
딸의 숭고한 결단을 지지해 주지 못할망정 옆에서 초를 치는 아버지를 흘겨봤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도 문제다. 아무리 황족이자 후작이라도 타인의 영지에 머무는 건 그 지역 영주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이 바란디가 후작령의 영주인 이상, 아버지가 난색을 표한다면 이드라펜 후작도 며칠 동안이나 이곳에 머무르지 못했을 거다.
심지어 거절할 명분도 많잖아. 북방의 날씨는 남쪽과 달리 차가워 적응하기 힘들다거나, 아직 치안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거나 그런 거.
‘하나뿐인 딸을 배신했어.’
원망을 담은 눈으로 아버지를 다시 노려보자 아버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더 열받는다. 저 반응을 보면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데, 차라리 모르고 그랬다면 둔한 아버지를 둔 내 팔자라고 생각했을 거다.
‘이번 사냥으로 기세를 꺾어야 돼.’
그렇게 한참 동안 아버지를 보다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드라펜 후작의 연승 행진을 여기서 끊어야 한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을 후작의 자부심을 꺾어야 한다고.
그래야 후작이 나보다 나약한 정주민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 나와 함께할 자격이 없는, 초원에서 살아갈 수 없는 도련님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나약한 남자는 관심이 없어요. 전 부족을 이끌 부족장이 될 건데, 그런 제 옆에 약한 사람을 둘 수는 없잖아요!”
과거, 아버지가 혼인을 독촉했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인 무인과 결혼할 거다. 절대, 절대 편하게 살아간 정주민 황족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
‘반드시 이겨야 돼.’
그렇게 다짐할수록 승리를 향한 집착은 더욱 커져갔다.
만약 사냥에서도 후작에게 진다면, 내가 후작보다 약하다는 걸 인정하게 될 것 같으니까.
전장에 나서는 심정으로 티나에게 올라탔다.
어릴 때부터 함께 초원을 달린 파트너, 어릴 때부터 단련한 궁술.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냥에 임한다. 이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전투나 마찬가지다.
“이거 참, 말은 오랜만에 타서 낯설군요.”
그리고 백마를 타고 나타난 이드라펜 후작을 보자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은 아니었어.’
후작의 말대로 후작의 승마 실력은 그냥 그랬다. 아예 못 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능숙한 것은 아닌 초보자 수준.
다행이다. 워낙 음흉하고 뻔뻔한 사람이라 ‘사실 전 말도 잘 탑니다.’ 라고 돌변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말을 상대보다 잘 타기만 해도 사냥의 절반은 이긴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이번 사냥은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마침내 저 능글 맞고 기분 나쁜 미소를 깨트릴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영애.”
“네, 각하. 말씀하십시오.”
“제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냥감을 잡느냐보다, 얼마나 큰 놈을 잡느냐를 중시했습니다. 이 북방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아차 싶었다. 가장 중요한 승패 결정 여부를 정하지 않았다니.
많이 잡는 자가 이기느냐, 큰 놈을 잡는 자가 이기느냐는 북방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큰 사안이다. 그래서 사냥으로 승부를 보기 전에 확실히 기준을 정하는 것이 도리인데, 이길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 그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
‘큰 놈을 잡는 게 무난하기는 한데.’
갑자기 불안해졌다. 후작은 나를 안 좋은 의미로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냥을 못할 거라 생각하고 큰 놈을 기준으로 잡으면… 엄청난 한 마리를 잡고 끝내지 않을까?
그렇다고 단순히 많이 잡기를 기준으로 하면 좀 비겁─
‘아니야.’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승부에 비겁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 애초에 정정당당함을 따질 거였으면 사냥을 제안하지도 않았지.
“이맘때면 야생 동물들이 늘어나는 시기니, 많이 잡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군요. 야생 동물이 적으면 영민들의 식량이 줄어드는 꼴이나, 너무 많아도 치안을 위협하니까요. 역시 영애께서는 마음씨가 따뜻합니다.”
웃음을 터뜨리는 후작을 보니 이유 모를 짜증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
바란디가 후작이 빌려준 백마를 타며 사냥터를 돌아다녔다.
‘엄청난 명마로군.’
말과 승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내가 느끼기에도 부드러운 움직임이라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전장에 나서는 장수들이 어째서 명마에 고집하는지 알 것 같다.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생물이기에 흔들림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나, 그 흔들림이 아주 미세하게 전달되었다. 심지어 초심자가 겪는 허리 통증이나 사타구니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마치 사람을 태우기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기수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아이처럼.
그래서 조금 당혹스럽다. 단순히 패배할 생각으로 임한 사냥임에도 너무 좋은 말을 받아버렸다.
‘혹시 후작이 영애랑 사이가 안 좋나?’
오죽하면 샤티 영애의 승리를 막기 위한 바란디가 후작의 계략이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딸이 이기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아비? 실로 엄청난 일이다.
물론 그런 흉악한 이유는 아닐 거다. 며칠 동안 지켜본 부녀는 간혹 투닥일지언정 사이가 좋은 부녀였다. 그투닥임조차 애정에서 기반한 충돌이었다.
‘안전을 위해서겠지.’
아마 후작 입장에서는 황족의 낙마 사고에 대비하기 위하여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말을 준 것일 터. 상식적으로 그럴 확률이 높다.
“너 같은 아이가 많다면 제국의 기병은 더욱 강해지겠구나.”
갈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나를 태운 아이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생각나는 반응이라 웃음이 터졌다. 마침 이 아이도 샤티 영애의 은발과 비슷한 백색의 털을 가졌,
– 푸히힝!
“응?”
갑자기 귀를 쫑긋거린 백마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아니, 아무리 하는 게 없다지만 내가 나름 네 기수인데. 적어도 기수 동의는 받고 가주면 안 되겠니?
***
더 많은 짐승을 잡는 사람이 승부에서 이기는 걸로 정했으나, 자그마한 토끼 같은 걸로 숫자를 채울 생각은 없다. 이왕이면 거대한 놈도 잡으면서 완전무결한 승리를 쟁취하고 싶다.
“그게 좋겠군요. 야생 동물이 적으면 영민들의 식량이 줄어드는 꼴이나, 너무 많아도 치안을 위협하니까요. 역시 영애께서는 마음씨가 따뜻합니다.”
그리고 이드라펜 후작의 말처럼 야생 동물의 숫자를 조절해야 부족민… 아니, 영민들이 안전해진다. 평범한 영민들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녀석이 보이면 겸사겸사 처단하는 게 맞다.
부끄럽게 그 당연한 걸 후작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승리에 눈이 멀었다지만 바란디가의 후계자로서 영민들의 안전을 잊은 거다.
‘짜증나.’
분명 후작에게서 이기기 위해 준비한 사냥인데, 어째서인지 계속 지고 있는 기분이다.
“육체적인 힘이 전부는 아니죠. 지성과 예의도 힘의 일부!”
그러다 문득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왜, 왜 이 타이밍에 저 말이 생각나는 거야! 이러면 이드라펜 후작이 내가 한 말에 해당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물론 후작은 제국 아카데미 재학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지성이 있고, 나에게는 능글 맞지만 나름 예의도 있다.
그래도, 그래도 후작은 아니다. 아무튼 아니야!
‘난 차기 제사장이라고.’
슬며시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 되뇌었다. 아무리 유목민들이 제국인이 되었다지만, 우리의 문화를 전부 버려서는 안 된다. 생활의 편의를 위해 문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가 가진 제사장 자리는, 내가 이어받을 제사장 자리는 우리의 문화이자 근본이다. 그런 내가 제국 황족과 결혼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난 반드시 강인하고, 지성 넘치고, 예의 바르고, 착하고, 잘 생긴 유목민과 만나 결혼할 거다.
…
‘몇 개는 양보할까?’
다섯 가지 조건을 전부 충족하는 유목민은 지금까지 못 봤으니, 하나나 두 개 정도는 양보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
– 푸르릉…
“응? 왜 그래?”
조용히 걷기만 하던 티나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의외인 모습이다. 어릴 때는 겁이 많은 아이였지만 나와 함께 초원 여기저기를 누비며 용감한 아이가 된 티나다. 그런 티나가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티나가 겁에 질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쮸쀼쮸쀼!
괴성과 함께 괴이한 모습의 짐승이 뛰쳐나왔다.
사자의 머리, 곰의 몸, 뱀의 꼬리를 가진 채 두 발로 뛰어다니는 짐승.
누가 봐도 정상적인 짐승이 아니라 빠르게 도망을 택했다. 처음 보는 적을 상대로 일대일을 고집하는 건 멍청한 짓.
“아직 도르곤과 그 수하들이 사용하던 던전을 전부 토벌하지 못했단다. 혹시 사냥터 근처에도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고.”
그리고 빠르게 아버지가 해주셨던 조언을 떠올리며 저 기괴한 짐승의 정체를 유추했다.
마수다. 흉폭하기로 유명한 던전의 마수.
‘하필 이런 곳에서.’
재수가 없어도 단단히 없는 상황에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죽은 칸 참칭자 도르곤과 그 수하들이 던전에 숨어 살다가 봉기를 일으킨 건 유명하다. 그래서 북방이 제국의 영토가 된 후로, 제국군은 북방 각지를 돌며 던전을 토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군의 시야에 걸리지 않은 던전이 근처에 있을 줄은 몰랐다. 하필 그 장소가 사냥터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버지도 그냥 의례적으로 한 조언이었을 텐데!
‘…어디까지 쫓아오는 거지?’
이윽고 여전히 나와 티나를 추격하는 마수를 돌아봤다.
도망을 친다면 얼마든지 칠 수 있다. 그런데 저 마수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쫒아오면?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영민과 마주치면? 사냥터 어딘가에 있을 후작과 마주치면?
‘안 돼.’
곤란하다. 능숙히 몸을 뺄 수 있는 나와 달리 평범한 영민들과 후작은 마수에게 해를 입을 수 있다.
‘여기서 막아야 해.’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기 전에, 여기서 막… 아야?
‘어?’
마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땅에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쮸쀼우우우!
‘하.’
저 덩치에 도약도 할 수 있어?
‘반칙이잖아.’
왜 요즘 들어서 치사한 상대만 만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