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59)
로판 속 공무원 559화(560/945)
왼쪽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막으며 사냥터를 빙빙 돌았다.
‘치명상은 피했어.’
입술을 깨물며 어지러운 정신을 일깨웠다.
팔 하나가 망가진 상태에서 치명상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마수의 덩치를 생각하면 팔 하나로 끝난 것이 천운이었다. 만약 그 거대한 놈이 도약까지 하며 날린 공격에 직격으로 맞았다면 그대로 죽었겠지.
“티나, 괜찮아?”
– 푸릉!
작게 한숨을 내쉬며 티나의 상태를 확인하자 다행히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내 팔 하나가 망가지는 건 괜찮다. 이 자리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티나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나도 티나도 여기서 죽는 거다. 지금은 내가 더 다치더라도 티나를 지켜야 돼.
‘…어떻게?’
그렇지만, 어떻게? 팔 하나를 못 쓰는 내가 어떻게 저 마수에게서 티나를 지킬 수 있는 거지?
일단 나 홀로 마수를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지가 멀쩡한 상황에서도 잡지 못한 마수를 중상인 상태에서 상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이미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마수를 두고 도망친다? 사냥감을 놓친 마수는 더욱 분노하며 이 근방을 헤집을 거고, 그 과정에서 다른 영민들이나 후작이 피해를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돼…?’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는 상황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이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튀어나온 마수 따위 금방 토벌해서 사냥감으로 만들었을 텐데.
다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내가 강했다면 마수를 잡을 수 있었을 거다. 내가 강했다면 사냥이라는 승부를 고집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강했다면… 영민과 후작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거다.
─쮸쀼!
“꺄악!”
– 푸히힝!
허나 저 마수는 사냥감 따위가 죄책감을 느낄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단순히 추격하는 수준을 넘어 돌까지 던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치가 떨린다. 덩치가 큰 놈이 빠르기도 하고, 도약도 하고, 도구도 쓸 줄 알아? 도대체 저런 놈이 어디에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오는 거─
“흐앗!”
등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낙마하고 말았다.
“티나, 너 먼저 가! 아버지한테 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티나에게 외쳤다. 내가 다시 티나에게 올라타기에는 글렀으니 티나라도 도망치는 게 맞다.
그리고 티나가 나 없이 홀로 돌아오면 아버지가 이변을 눈치챌 테고, 사냥터 전체를 통제하며 저 미친 마수를 토벌할 거다. 피해가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티나는 도망치기는커녕 내 근처를 맴돌았다.
“빨리 가! 이러다 다 잡혀!”
– 푸르릉…
어느새 눈망울이 촉촉해진 티나는 내 호통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이 바보가! 둘 다 죽을 바에는 하나라도 사는 게 맞잖아!
“야! 너라도 내 말대로 움직여줘야 할 거 아니야!”
갑자기 몰려오는 서러움에 빼액 소리쳤다.
그래, 티나만이라도 내 뜻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결혼을 권하고, 재수 없는 이드라펜 후작에게 연이어 지고, 이기기 위해 택한 사냥 승부에서 이런 일이 터지고.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잖아. 그러니 티나는 내 말을 들어줘도 되잖아.
─쮸쀼쮸쀼!
그러나 티나는 마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떠나지 않았다.
진짜 바보 같아.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너, 나하고 같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너 타고 다닐 거야.”
겨우 몸을 일으키며 검을 들자, 티나는 내 뺨을 핥았다.
부끄럽지만 따뜻한 티나의 체온에 안심이 됐다. 이기적이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한 파트너가 죽어서도 함께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정면에서 싸울걸.’
조금은 아쉽다.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피해 다닌 건데, 그 결과가 외팔이인 상태로 싸우는 거라니. 어차피 싸우다 죽을 거였으면 만전의 상태일 때 싸워야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다 내가 미숙한 탓이지.
‘발목만 노리자.’
그렇기에 다짐했다. 죽이지 못한다면 적어도 치명적인 타격이라도 입혀야 한다. 두 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놈이니 발목을 다친다면 기동성이 급격히 하락할 거다.
그렇게 된다면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기동성이 떨어진다면 느릿느릿한 표적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승마에 미숙해도 피할 수 있겠지.’
사냥터 어딘가에 있을 후작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최선은 이 마수와 아예 마주치지 않는 거지만, 설령 마주치더라도 발목이 잘린 마수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터.
나 때문에 이 사냥터에 온 것이니 최대한 안전하게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아무리 얄미운 사람이라지만 죽어도 될 정도로 싫은 사람은 아니다.애초에 우리 영지에 온 손님이 죽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덤벼! 자기 머리가 없어서 남의 머리 붙이고 온 놈아!”
─쮸쀼!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마수를 향해 외쳤다.
몸뚱어리는 곰인 주제에 대가리는 사자인 기묘한 놈. 저거 분명 엄한 곳에서 다른 사람한테 맞고 온 걸 거야. 그러니 자기 머리가 없지.
하지만 이걸 어째. 이번에는 나한테 발목이 날아갈 텐데.
“앞으로는 닭발 달고 다닐 준비나 해!”
마수한테 도발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하찮은 동물을 떠올리며 외쳤다.
이윽고 마수가 휘두르는 손을 보며 몸을 숙─
“이 덩치에 닭발은 너무 어색한 조합이군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마수의 목 부근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물론 영애께 상처를 입힌 놈이니 닭발도 과분하지만요.”
목에서 피를 쏟은 마수가 서서히 쓰러지자 마수에게 가려졌던 후작이 보였다.
“사냥감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영애. 제가 아직 한 놈도 잡지 못한지라 욕심이 앞섰군요.”
평소 같은 능글맞은 웃음이 아닌,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후작의 모습이.
***
기수를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한 백마는 영애가 있는 곳에 이르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허.’
그리고 기괴하게 생긴 마수와 대치 중인 영애를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명마가 따로 없다. 주인의 딸이 위험하다는 걸 인지하고 달려오다니, 북방의 말들은 다 이런가?
‘칼은 안 가져왔는데.’
다만 백마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수인 나에게 마땅한 무장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사냥이라길래 그냥 활과 화살만 챙겼지.
‘여차하면 영애가 맞는다.’
애석하게도 내 궁술 실력은 내가 잘 안다. 아무리 덩치가 큰 표적이라도 재수가 없으면 영애나 그 옆에 있는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저 덩치의 마수를 맨주먹으로 팰 수도 없는 노릇.
‘아.’
문득 아카데미 졸업 전, 내 스승이 되어준 고문이 했던 얘기가 떠올라 황급히 활을 쪼갰다.
“북방에서 만난 녀석 중에 검과 활을 동시에 다룬 놈도 있었다. 원거리에서는 철로 만든 활로 화살을 쏘아대다가, 제국군이 접근하면 활을 반으로 쪼개서 쌍검처럼 사용했지. 미친놈이 따로 없었어.”
“특이한 자로군요. 이름이 뭡니까?”
“우데스르 자이루그라고, 논문 파괴자 하나 있다.”
논문 파괴자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활을 쪼개 근거리 무기로 사용했다는 건 참고할 만한 이야기다.
그렇게 재빨리 마수의 뒷목에 뾰족해진 활 파편을 꽂아 넣었고,
“사냥감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영애. 제가 아직 한 놈도 잡지 못한지라 욕심이 앞섰군요.”
놀랐을 영애를 자연스레 다독였다.
솔직히 나도 만만치 않게 놀랐지만 죽을 뻔한 영애보다는 심적 여유가 있다. 그렇다면 여유가 있는 사람이 배려를 하는 게 맞지.
“영애?”
허나 이상하게도 영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으으읏!”
그러다 푹 고개를 숙이며 귀여운 투정 소리를 냈다.
언제나 보던 영애의 모습이라 안심했다. 방금은 놀란 상태여서 반응이 늦었던 것 같다.
사냥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도 사냥을 강행할 미치광이는 죽은 내 친형밖에 없다.
“영애, 혹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영애의 말은 마수와 추격전을 벌이느라 지쳤기에 영애를 내 앞에 앉힌 채로 복귀했다.
‘곤란한데.’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애의 머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 강한 영애가 내 앞에서 위기에 빠진 모습을 보였고, 그 위기를 나 덕분에 모면했다.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사냥이라는 강수까지 둔 영애 입장에서는 치욕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터.
이 일 때문에 영애가 우울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영애처럼 활발하고 드센 성격은 한 번 꺾이면 한참을 가는데.
“그러고 보니 영애가 잡은 사냥감을 봤는데, 저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더군요. 마수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제가 졌을 겁니다.”
“…….”
내 위로에도 영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흠, 너무 노골적인 위로였나?
“사, 사실.”
‘오.’
무슨 말을 해야 영애의 마음이 풀릴까 고민하는 사이, 영애가 먼저 침묵을 깨줬다.
“북방에서는 사냥감을 많이 잡은 사람보다 큰 사냥감을 잡는 사람이 이긴 걸로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이지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았어도 내가 졌을 테니까.
“그러니… 후작께서 이기신 겁니다. 전 저렇게 큰 짐승을 혼자서 잡지 못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패배 선언을 한 영애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렸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것을 분해하지만, 막상 상대가 이기면 인정한다. 이렇게 치를 떨면서도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니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
후작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계속 고개만 숙였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후작은 나보다 강하다. 모든 면모에서 나보다 앞선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나약한 남자는 관심이 없어요. 전 부족을 이끌 부족장이 될 건데, 그런 제 옆에 약한 사람을 둘 수는 없잖아요!”
“육체적인 힘이 전부는 아니죠. 지성과 예의도 힘의 일부!”
아버지에게 했던 모든 말들. 내가 반려자의 조건으로 걸었던 모든 것들.
놀랍게도 후작은 전부 가지고 있었다. 내가 후작을 밀어냈기에 인정하지 않았을 뿐, 이미 내가 원하는 사람이 예비 신랑으로 찾아왔었다.
그래, 인정한다. 인정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살갑게 굴어.’
과거의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툭하면 틱틱거린 내가 바보 같다.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냈던 내가 밉다.
‘갑자기 다가가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마수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