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
제 56화
영웅은 공부 따원 안 했다네 – 4
크라시우스 가문은 제국의 대표적인 명문 무가 중 하나다. 무가 중 제일 가는 가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지만, 제국 300년 역사에서 무가를 논할 때 단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는 굳건한 가문.
황제 직속 봉신인 제국백 중 하나이자 제국 의회를 구성하는 일원 중 하나. 그것이 크라시우스 가문이며, 그것이 에리히의 어깨에 올려진 이름이다. 물론 후계자는 아니기에 그 무게가 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문 무가의 차남이라는 이름은 에리히의 진로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가문 내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1학년은 물론 선배들을 포함해도 적수를 찾기 힘들다. 류티스 정도면 또 모르겠다. 신분과 교육의 기회, 실력은 보통 비례하니까.
‘대진운도 나쁘지 않고.’
누가 나와도 질 생각은 없지만,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극히 미미한 상대가 나왔다. 실기 점수는 무난하게 챙길 것 같다.
‘루이제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긴장한 모습의 상대를 보고 있어도 딱히 의욕이 솟지는 않는다. 미안하지만 승리가 너무 자명하니까. 차라리 루이제가 보고 있었다면 더 의욕적으로 했겠지만, 루이제는 마법부라 대련 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쉬운 일이다.
‘어쩔 수 없지.’
루이제의 대련 때 열심히 응원이나 하면서 만족하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검자루를 잡았고, 잡자마자 익숙한 인형이 대련장에 오는 것이 보였다.
“형?”
당혹스러운 마음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행히 상대도 듣지 못했을 크기라 시선이 끌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에리히의 시선은 상대 뒷편에 보이는 칼에게 꽂혀버렸다.
대련장에 올 것이라 생각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옆에 있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라는 것은 뒤늦게 눈치 채고 말았다. 도대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미치겠네.’
팔짱을 끼며 이쪽을 바라보는 칼의 모습에 에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함께 하며 익숙해지기는 했다. 칼이 관료가 된 이후부터 에리히가 입학하기 전까지 둘이 만난 시간보다, 칼이 아카데미에 오고 만난 시간이 더 길 정도니까.
이제 칼의 시선이나 손짓에 긴장하지 않을 정도는 됐다. 눈이 마주치며 자연스레 인사를 하는 관계까지는 회복했다. 애초에 서로 사이가 틀어질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시간이 어색함을 키웠을 뿐.
하지만 하필 검에 손을 잡은 이 순간에 칼이 시선을 받았다. 가주와 닮은 그 칠흑 같은 눈이 내려 꽂혔다. 분명 대련장 위에 있는 자신이 더 높이 있을 텐데, 내려다 보여지는 입장이 된 것 같았다.
‘창피하게.’
검자루를 쥔 손에 더 힘을 주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사람에게 위압 당한다는 것, 심지어 그 대상이 가족이라는 것은 어디 가서 말도 못할 정도로 쪽팔린 일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지내려고.’
형의 반만 닮는다면 정말 뛰어날 것이다, 에리히가 사교계에서 자주 들었던 말. 하지만 에리히는 그 평가에 상심한 적이 없었다. 비교 대상과 너무 아득할 정도로 차이가 나면 질투나 자괴감조차 느껴지지 않으니까.
애초에 그 평가도 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말이지, 에리히를 비하하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당시 에리히는 아카데미를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제국법으로도 엄연한 성인이며, 이제 멀게만 느껴졌던 유일한 형제와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언제까지 그늘에 가려지는 동생으로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시선에 움츠러드는 나약한 동생이 되고 싶지 않다. 한 명의 당당한 귀족이자 크라시우스의 일원으로서.
‘오히려 기회다.’
가주와 닮은 눈이 오히려 기껍게 느껴졌다. 저 눈을 가진 혈육에게 인정 받는다면, 가주에게도 인정 받는 느낌이 들 것 같으니까.
에리히의 눈에 당혹감이 아닌 투지가 차올랐다. 적당히 임하겠다는 마음은 벽을 넘어서 인정 받겠다는 악기로 가득 찼다. 도구를 바라보는 것 같은 칼의 눈에 감탄과 흡족함을 박아 넣으리라.
이제는 상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미안하다. 제대로 임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만약 크게 다친다면 제대로 사과하겠다.
그리고 그 날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는 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입꼬리는 만족한 듯 올라간 표정과 함께.
***
내가 에리히의 광폭화 토템인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상관없다. 어떤 방향이든 동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만족하니까. 세상에 이런 형이 어디 있을까.
아무튼 기세가 돌변하여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에리히는 금방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미 실력으로도 에리히가 우위로 보였는데, 투지까지 끼얹으니 버틸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에리히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 놀랐다.
‘많이 단련하긴 했네.’
크라시우스라는 이름에 부족함 없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 가주가 아들을 가만히 놀게 할 일은 없으니 당연한 일인가? 그래도 또래 중에 대적할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충분히 칭찬 받을 일이지.
박수를 치는 것은 패배한 상대에게 너무 비참한 일인 것 같아 이쪽을 보는 에리히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전해진 모양이다.
“역시 크라시우스 가문이군요. 형제가 나란히 뛰어나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내친김에 원따봉 정도는 박아줄까 생각하는 사이 옆에서 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덕담이라기에는 뭔가 가주와 인연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
“혹시 제 부친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군에서 물러나기 직전, 그 친구가 막 군에 들어왔었죠.”
긴 수염을 쓰다듬는 교장은 그때의 추억에 잠긴 것 같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가주가 막 들어왔을 때 전역을 눈 앞에 둘 정도였으면 이미 군대 커리어의 끝을 찍었다는 거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아카데미 교장을 하고 있다고?
‘고인물이었네.’
심지어 부직업도 끝까지 전직한 고인물. 역시 마법사는 늙을 수록 위험하다.
“묵묵하고 표현에 서툰 친구였지요. 하지만 책임감도 강하고, 의외로 정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정이 많다라, 그건 잘 모르겠군요.”
“제 사람은 잘 챙기지 않습니까? 적어도 빌헬름의 동기나 후배 중, 빌헬름 그 친구를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정이 많다의 기준이 철저한 자기 세력 유지라면 이해할 수 있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가신들은 꽤 높은 충성도를 자랑하니까. 철저한 공사 구분과 신상필벌을 따르는 주인이면 충분히 상위권이지.
마지막 검술 대련이 끝난 후, 마법 대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원딜이 난무하는 마법 대련이다 보니 검술 대련장과 같은 장소를 쓰면 규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대련장이 다르다면 검술과 마법 대련을 동시에 진행해도 되겠지만, 치료 인력이 넘치는 편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검술 쪽 학생이 다리가 잘려서 치료 중인데, 마법 쪽에서 팔이 불타고 있으면 정신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라테르가 날린 고드름에 찔린 채 쓰러지는 가여운 희생양이 보였다.
‘저 새끼 냉법이었나.’
딱 지 머리색에 맞는 스킬을 찍은 것 같다.
“오, 빠르게 끝났는데.”
“멀리서 일방적으로 쏘는데 버틸 수가 있나.”
그리고 검술 대련을 마친 류티스와 에리히도 같이 있었다. 이제 할 것도 없으니 마법 대련이나 보겠다나. 어차피 목적은 루이제겠지만.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결계라도 세운 듯이 우리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다. 감찰부장과 교장만 있어도 지나가기 부담스러운데, 왕족도 포함됐다.
“형제님, 이쪽입니다.”
“대단했습니다, 라테르.”
그리고 지금은 라테르를 반기는 타니안과 아인테르로 인해 결계는 더욱 강력해졌다. 검술 대련장에는 보이지도 않던 놈들이 은근슬쩍 합류하더라고. 아무튼 학생들은 이 막강한 멤버진 근처에 괜히 얼쩡거리다 그림자라도 밟을 것 같아 기겁을 하며 피해 다니고 있다.
“이제 루이제 경기만 기다리면 되겠군!”
류티스의 말에 나는 무심코 류티스를 보고 말았다. 지난번에 있었던 류티스와 라테르의 머저리 같은 검법라시코가 생각나버렸다.
‘이 새끼는 대체.’
류티스는 검법라시코에서 검의 우월함을 부르짖었는데, 정작 루이제는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는 나도 루이제가 무슨 실기를 택했는지 몰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이 새끼는 대체 뭐지.
루이제가 마법을 배우는 걸 알면서도 그랬어도, 좋아하는 상대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도 몰랐어도 문제다. 전자면 미친 강심장이고, 후자면 병신이니까.
‘전자겠지?’
기사 강국 아르메인의 왕자로서 잠시 폭주했다고 생각하자. 류티스의 얼마 남지 않은 명예를 위해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자기들끼리 실없는 얘기나 하던 것들이 루이제의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동시에 대련장으로 시선을 돌리는 건 조금 무서웠다.
“루이제!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힘내, 루이제!”
미친놈들아, 그만해.
착잡한 심정에 다섯 머저리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가장 목소리가 큰 둘의 응원만 독보적으로 울려 퍼졌지만, 다른 셋도 입을 격렬히 움직이며 누가 봐도 응원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럴 수록 루이제의 대련 상대는 해탈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황족, 왕족, 차기 성자가 응원하는 사람을 상대로 거리낌 없이 마법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그런 건 나도 못하겠다.
‘가엾게도.’
심지어 루이제도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응원이 조금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고마운지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다섯 놈은 더 크게 응원하고, 다시 손을 흔들고…
‘상처 뿐인 대결이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가장 주의 깊게 살핀 류티스와 라테르의 대련은 희생양 두 명의 마음을 찢은 것 외에 아무 문제 없이 끝났다. 겸사겸사 뛰어난 능력을 지닌 학생들에게 보장된 미래를 점 지어주는 성과도 있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심지어 에리히의 성장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오히려 좋은 일만 있었던 실기 시험. 이제 루이제의 대련만 끝나면 정말 보람찬 하루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복선이었다.
“허어…”
“와.”
탄식에 가까운 교장의 침음, 그저 조용히 내뱉은 내 단말마 같은 탄성.
뭐지, 시발 뭐지. 대체 뭐지?
아니 시발 대체 왜.
“져, 졌습니다!”
루이제가 날린 마법에 일방적으로 처맞으며 방어에 급급하던 상대는 다급히 항복을 선언했다. 항복을 선언한 지금도 넋이 나간 상태.
이해한다. 루이제가 날린 마법은 정말 특이했으니까. 분명 영창은 하나였고 날아오는 마법도 하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이 삼등분 되더니 한 조각은 그대로 날아오고, 다른 두 조각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후려 갈겼다. 갑작스러운 3배 이벤트에 상대는 너무 좋아서 환장했지.
“이건, 대체…”
아직도 딱딱히 굳은 교장의 목소리에 교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교장도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장. 이건?”
“예, 맞습니다.”
아니라는 대답을 바란 교장의 말에 내가 참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은 이마를 짚었다. 나도 보는 눈만 아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로 달려가서 통신구를 켰을 거다.
‘시발…’
왜 루이제가 마종공의 고유 마법을 쓰는 거지?
막판에 터진 대형 사건에 눈 앞이 깜깜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50일의 여정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완전히 종료되는 것은 수상작이 발표되는 정오지만, 그래도 오늘 회차를 올리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같은 기분입니다. 마지막 같은 기분과 별개로 어떤 작품들이 상을 받을지 기대되네요.
플러스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진다면 이 회차가 무료로 독자님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회차일 겁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지만,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내일도 변함 없이 독자님들 곁에 찾아오겠습니다!
이번 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