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1)
로판 속 공무원 561화(562/945)
죽은 도르곤이 산 칼을 엿 먹인 사소한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 후로 별다른 사건이 터지지는 않았다.
그나마 특이 사항이 있다면 레온에 남아있던 6군단장이 귀국하여 남부 방면군 사령관으로 승진하고, 아인테르가 샤티와 함께 제도에 복귀한 정도? 그 일들마저 머릿속에 저장할지언정 딱히 내 멘탈을 위협한 사건들은 아니었다.
“역시 금발은 은발과 이어질 운명인가보군.”
그리고 황제는 아인테르와 샤티가 사이 좋게 사교계를 누비고 있다는 보고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었다.
조금 추한 모습이기는 했다. 단순히 동생 부부(예정)을 보고 한 말이라면 형이 좀 유난스럽구나─ 싶을 텐데, 하필 황후도 샤티처럼 은발이다. 동생 부부에 대한 안도보다는 애처가의 면모가 더욱 강하게 보였다.
“서로 상반되는 색이나, 그렇기에 끌리는 점이 있는 거겠지요.”
“하하, 장관의 말이 맞네. 서로 다른 점이 있기에 끌리는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와 관련된 말이라면 순순히 동의해야 한다. 괜히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면 애처가 모드가 작동된 황제와 서운함을 느낀 황후에게 나란히 까일 수 있으니.
그렇게 적당한 처신 덕분에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평온함이 이어졌고, 온전히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우우!”
“우리 페디 엄청 빠르네!”
바로 페디와 함께 바닥을 기어다닌다는 몹시 중요한 일에 말이다.
‘벌써 몇 시간째지?’
슬슬 피로가 느껴졌지만 페디가 워낙 즐겁게 돌아다니기에 웃는 얼굴로 속도를 맞춰줬다. 우리 페디가 좋아하는데 내 피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조금만 더 버티자.’
욱신거리는 무릎을 애써 외면하며 위풍당당 기어가는 페디를 바라봤다.
어느새 스스로 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자란 페디는 그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온 저택을 청소할 기세로 뽈뽈뽈 돌아다녔다. 실제로 페디에게 채운 무릎 보호대는 하루만 지나면 새까맣게 변할 정도였지.
그래서 나도 같이 기어다니고 있는 거다. 가만히 두면 무한한 체력을 자랑하는 페디가 어디 이상한 곳으로 갈까 걱정되고, 그렇다고 침대에 눕히면 우렁차게 울며 불만을 표했으니까.
물론 사용인들은 자기들이 소가주님을 돌보겠다며 내 사족 보행을 만류했지만, 이렇게 합법적 휴가를 누리는 시기가 아니라면 언제 페디하고 놀아줄 수 있을까. 아이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건 아버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 왈!
“우아!”
‘아.’
그러던 중, 힘차게 기어가던 페디와 티티가 마주치는 대참사가 터졌다.
“티, 티티!”
“그쪽은 안돼!”
그리고 티티가 나타난 방향에서 유리스와 소피아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애석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창 세상이 궁금할 아기와 에너지 넘치는 개가 만난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3시간은 더 돌아다니겠네.’
암울한 미래가 보여서 슬며시 눈을 감고 말았다.
페디랑 티티가 뭉치면 단순히 1+1로 멈추지 않는다. 거의 10, 20 수준의 파괴력을 발휘하기에 티티가 없는 방향으로 페디를 유도하고 있었는데, 설마 티티가 페디 냄새를 맡고 달려 올 줄은 몰랐지.
‘벌써 소가주 라인을 타는구나.’
조금, 아주 조금 티티가 원망스러웠다. 주인의 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가주와 노는 애완동물이라니.
그래도 어디까지나 야속할 뿐이지, 불쾌한 감정까지는 들지 않았다. 동물인 티티조차 우리 페디를 좋아한다는 거니까.
‘내가 아빠의 마음으로 이해하자.’
게다가 페디와 놀아주는 상대가 하나라도 더 많아지면 나야 좋은 일이잖아.세쌍둥이가 기어다닐 때가 되면 그 아이들도 티티가 잘 놀아줄 테고.
– 왈왈!
“아우!”
마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입을 여는 페디와 티티를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만 그 이후로 5시간이나 더 저택을 기어다닐 때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이러다 두 발로 걷는 것보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게 더 익숙해지겠어.
해가 떠있는 동안 좌충우돌 저택 탐방을 즐긴 페디는 밤이 되면 미동도 없이 잠에 든다.
정말 새벽에 깨는 경우도 없이 고이 자더라. 모든 기력을 낮 동안 털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으에에에엥!”
“으아아아아아앙!”
“그래, 아빠 여기 있어.”
덕분에 세쌍둥이에게 신경 쓸 수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만약 페디도 새벽에 울었으면 진작에 쓰러졌을지도 몰라.
“어이구, 뭐가 그리 서러워서 울까.”
아무튼 펑펑 우는 세실리아와 카틀레아의 상태를 확인하며 조심스레 등을 토닥여줬다. 그 와중에 마리아는 눈만 깜빡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장녀는 벌써부터 의젓하네.”
“아─”
내 말에 반응하듯 마리아는 빵싯 웃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 귀엽다. 양 옆에서 동생들이 울고 있음에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니. 내 손이 세 개였다면 당장이라도 마리아의 손을 잡아줬을 거다.
“…우으으…”
“아.”
그리고 감히 아빠 주제에 장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자 마리아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셋이 전부 울면 많이 곤란한데? 그렇다고 손을 비우면 기껏 잠잠해지기 시작한 아이들이 더 서럽게 울 게 분명하다.
“세실리아랑 카틀레아는 나한테 주렴.”
“트, 트릭시!”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갈등하는 사이, 어느새 옆방에서 자고 있던 트릭시가 다가왔다.
감동했다. 내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동안 세쌍둥이를 돌보는 건 트릭시의 몫이었다. 그런 트릭시가 나를 위해서 잠을 포기하고 와줬다.
“마리아는 안아주면 금방 진정한단다. 몇 번 다독여주면 바로 웃을 거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에 빠르게 마리아를 안아주었다.
그러자 정말로 울먹이던 마리아가 귀를 파닥이며 웃기 시작했다.
‘귀여워.’
진짜 귀 한 번만 만지고 싶어.
***
저택은 매일매일 활기로 가득찼다.
해가 뜨기 무섭게 저택을 누비는 페디, 그 옆에서 굳이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다니는 오빠, 분명 다른 곳에 있다가도 페디가 복도에 나오면 빠르게 합류하는 티티.
세쌍둥이라 그런지 세 배로 손이 가는 마리아, 세실리아, 카틀레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조금씩 배가 불러오는 리제까지.
‘여러 가족이 한 집에 사는 것 같네.’
예전부터 든 생각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여러 가족이 아닌 한 가족의 일상이라고 생각할까?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이 북적거림과 소란스러움은 행복의 상징이니까. 우리 가족이 아무런 위협이나 고난을 겪지 않고, 영원히 따뜻한 일상을 보낼 거라는 증거니까.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이미 오빠는 모든 연인들을 부인처럼 여기고 있다. 하객들을 고려하여 결혼식을 반 년에 한 번 하고 있는 거지, 마음속으로는 진작에 다 올렸다는 말을 하며 웃는 오빠다.
그럼에도 결혼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사실상 부부인 것과 공식적인 부부는 다르잖아.
‘벌써 내 차례까지 왔구나.’
그리고 두근거림과 별개로 조금은 신기했다. 처음 마르 언니가 결혼했을 때만 해도 네 번째인 내 차례는 아득하기 느껴졌는데,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내가 오빠랑 결혼.’
오빠와 페디가 지나갔는지 유독 깨끗한 복도를 내려다보며 잠시 예전 일을 떠올렸다.
오빠를 노리는 경쟁자로 무려 마종공이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 그 소식을 접한 마르 언니의 불안과 질주, 덩달아 쫓아간 리제, 가만히 있다가는 내 마음을 표현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아 기세에 밀려 고백한 나.
정말 지금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평온했던 호수에 거대한 메기가 난입하면 원래 살던 물고기들이 발버둥을 치듯, 당시에는 모두가 미쳤었지.
‘부끄럽게.’
나도 모르게 뜨거워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백 당시의 나는 오빠와 충분한 교감을 나누지 못한 상황이었다. 호감은 표하되 애정은 보이지 못한 시기였다. 그런 주제에 혹여나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이미 네 번째인 내가 더욱 밀리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다짜고짜 고백을 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카데미 3년 동안 충분히 교감을 나누고, 졸업 이후에도 오빠와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래야 오빠가 내 고백을 받아줄 확률이 높으니까.
…
‘받아줘서 다행이야…’
진짜, 진짜 다행이다. 확률 낮은 무리수가 기적적으로 성공해서 망정이지, 오빠에게 한 번 차인 상태에서 교감을 쌓아야 할 뻔했잖아.
아니, 솔직히 오빠가 찬 상대와 어울릴 것 같지는 않으니 그대로 나와 오빠의 연이 끝나버렸을 수도 있다.
‘…왜 받아줬을까.’
그렇기에 가끔 그런 생각마저 든다. 내가 생각해도 받아줄 확률이 낮은 고백을 왜 오빠가 받아주었을까. 적어도 같은 동아리라 가깝게 지낸 리제와 달리, 동아리도 달랐던 나를 왜 받아주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려고 해도 머리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만약 오빠가 단순히 동정으로 받아준 거라면, 그 마음이 지금도 여전하다면 나는 오빠의 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호 간의 정이 아닌 동정으로 유지되는 관계라면 나에게 부인이라는 자격이 있을까?
‘모르겠어.’
벽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앉았다. 결혼을 코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고, 그럼에도 오빠에게 묻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용감하게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거야. 이렇게 비겁하게 유지하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나마 유지하고 싶은 나 자신이 밉다.
‘한심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업보가 너무 길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