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2)
로판 속 공무원 562화(563/945)
저택 복도의 먼지를 페디가 온몸으로 닦고, 내 바지 무릎 부근이 해지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이제 슬슬 노하우가 쌓여서 사족 보행에도 익숙해졌다. 과장 좀 보태면 티티와 좋은 승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라버니?”
“응?”
그렇게 오늘도 페디, 티티 듀오와 함께 저택을 누비던 중, 리제가 어색한 몸짓으로 나한테 다가왔다.
‘좀 나왔구나.’
뜬금없지만 엎드린 채로 리제를 올려다보니 리제의 배가 나왔다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하필 리제 바로 직전의 임산부가 세쌍둥이를 품었던 트릭시였잖아. 트릭시한테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 어지간한 정도로는 배가 나왔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임산부에 대한 커트라인이 너무 높아졌어.
“왜 그래?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어?”
머쓱한 심정으로 리제의 배를 보다가 슬며시 일어났다.
부인 앞에서 네 발로 있는 건 많이 민망한 일이다.마침 패기 넘치게 나아가던 페디도 여섯 엄마 중 한 명을 만나서 반가운지 리제 근처를 맴돌았고.
“그게─”
“아우아!”
페디의 목소리에 막 입을 열려던 리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우리 페디, 또 옷 빨아야겠네?”
“우우!”
빙긋 웃으며 페디를 안아올린 리제는 페디에게 달라붙은 티티의 털을 조심스레 떼줬다.
사실 저렇게 정성 들여 떼봤자 10분만 지나면 다시 털을 복슬복슬 달고 다니겠지만, 리제의 정성이 있으니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요즘 린한테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이윽고 어느 정도 털을 떼낸 리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린한테?”
결혼을 앞둔 신부가 고민에 빠졌다는 심상치 않은 말을.
물론 평소에도 가족의 고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나, 새신부의 고민은 더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인생에 한 번뿐인 경사를 찝찝한 마음으로 임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 고민이 결혼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라도 하면 경험 풍부한 새신랑으로서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 도리. 결혼은 혼자 짊어지는 행사가 아닌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요즘 들어 안색이 조금 어두워요. 꽃꽂이를 할 때도 멍하니 꽃만 보는 경우가 많고요.”
“심각하네.”
린의 취미 중 하나인 꽃꽂이마저 봉인되었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정원사와 함께 저택 정원을 관리하는 린이 고작 화분 하나를 두고도 멍하니 있는다고? 그건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거부하고, 에리히가 여자를 꼬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보편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그런데… 오라버니가 린하고 대화 좀 나눠줄 수 있을까요? 제가 물어보면 웃어넘기기만 해서…”
“당연히 그래야지. 걱정하지 마.”
우물쭈물 말을 잇는 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모르고 있었네.’
그리고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린하고는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마다 만나고, 결혼이 다가와서 1대 1로 만나는 시간도 늘어났다. 리제가 눈치챈 것을 얼마든지 먼저 파악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린이 내 앞에서는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연기한 걸 수도 있으나, 그렇다면 예비 남편인 내가 예비 부인인 린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도 될 상대’ 라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거다. 절대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다.
‘너무 기어다니는데 집중했어.’
반성하자. 아기도 개도 아닌 놈이 네 발로 기어다니느라 지능과 눈치가 퇴화했었다.
앞으로는 평범하게 두 발로 다녀야지…
리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기는 했지만, 사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친한 친구인 리제를 상대로 함구하고 있고, 나는 리제가 말해주기 전까지 눈치도 못 챘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린에게 뭐 고민 같은 거 없냐고 물어보면 퍽이나 진심 어린 대답이 돌아오겠다.
‘어쩌지.’
나란히 바닥에 누운 페디와 티티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억지로 캐묻는 건 오히려 역효과, 그냥 기다리는 건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 결혼식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으니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님.
골치 아픈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포기할 수 없다.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새신부의 마음에 근심이 자리 잡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페디야, 잠깐만 코오~ 자자.”
“우?”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용히 페디를 품에 안았다. 아직 페디랑 놀아줄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은 침대에 눕히자.
이 아빠는 넷째 엄마랑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하니 이해해 줘.
***
눈을 깜빡이다가 옆에 있는 오빠를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눈앞의 배경을 한 번, 다시 오빠를 한 번.
“예쁘지?”
“아, 그으… 네.”
눈이 마주친 오빠가 빙긋 웃으며 말하기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기는 하다. 지금 나와 오빠가 있는 곳은 보야르 공작령 남쪽에 펼쳐진 바다, 제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에메랄드 바다였으니까.
“린? 잠깐 나랑 바람 좀 쐬러 가 줄래?”
불과 10분 전, 오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자는 걸로 알았다. 설마 제국 남쪽 끝에 올 줄은 몰랐지.
‘리제가 말했구나.’
오빠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 민망했다. 요즘 리제가 나한테 무슨 일 없냐고 은근히 떠보는 경우가 잦았는데, 결국 오빠한테 말한 것 같다.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의 눈은 속이지 못했구나.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리고 오빠가 나를 바다까지 데려온 걸 보면 내가 품은 고민을 듣고 싶어 하는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된다. 그냥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둘러대거나, 가짜 고민을 말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내가 그렇게 나오면 오빠도 더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줄 거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오빠를 완전히 속일 수는 없다. 이미 내가 고민이 있다는 걸 확신한 오빠고, 감찰성 장관이기도 한 오빠다. 사람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겠지.
그러니 내가 숨기려고 할수록 오빠에게 상처만 주는 꼴이다. 내 불안 때문에 오빠를 슬프게 하는 상황이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을까?’
그럼에도 아직까지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오빠에게 왜 나를 받아줬냐고 물었다가, 단순한 동정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이 현실로 다가오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
‘말하자.’
긴 침묵 끝에, 오빠가 기다려준 침묵 끝에 결심을 내렸다.
그냥 말하자. 평생 속에 담아둬야 할 불안과 걱정이라면 최대한 빨리 터뜨리는 게 좋다. 나와 오빠를 위해서도 그게 낫다.
“저기, 오빠.”
“응, 말해.”
“저… 왜 받아줬어요?”
그 말을 하자마자 푹 고개를 숙였다.결혼을 코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밉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혼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면 엄청 힘들었겠네.”
그리고 부드러운 오빠의 목소리, 따스한 오빠의 손길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빠 말처럼 힘들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고민이라 혼자 품고 있었다. 먼저 고백한 주제에 ‘저 사람이 날 사랑할까?’ 같은 고민을 하는 건 웃기잖아.
“린이 용기를 내서 물어본 거니,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이어지는 오빠의 말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섭다. 저 솔직하게 말하겠다는 말이 사형 선고처럼 들린다. 지금이라도 귀를 막고 도망치고 싶다.
그래도 참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다음이 없을 것 같기에.
“사랑보다는 엉겁결에 받아준 느낌이기는 했지.”
설령 오늘, 내가 생각한 최악이 현실로 찾아오더라도.
***
어깨를 떠는 린을 보니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크게 든다. 굳이 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사랑을 속삭일 수 있었다.
허나 린은 용기를 내서 자신의 마음을 보였다. 먼저 용기를 낸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누락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 역시 모든 것을,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을 말해야 한다.
“그때는 조금… 아니, 많이 정신이 없었어. 트릭시의 고백으로도 혼란스러웠는데 리제까지 고백을 하고, 그 뒤에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잖아.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심지어 린 말고도 에리와 피네의 고백도 받았다. 내 인생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바빴던 순간을 꼽자면 그때가 대토벌 전쟁 직후와 맞먹을 정도다.
그렇기에 린의 고백을 엉겁결에 받아줬다는 것이 맞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이 기뻐서, 누구의 고백은 받고 누구의 고백은 거절하는 게 미안해서 전부 받아줬다. 그 과정에서 린도 겸사겸사 낀 것이 아니냐고 하면 부정하기 애매하다.
“당시에는 사랑의 감정보다 동정이나 죄책감으로 움직인 것 같기는 해.”
“그, 그렇, 겠죠? 저는 오빠한테… 사랑받을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내 말에 린이 애써 다부지게 말했으나, 당연하게도 목소리에는 떨림과 물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너라서 동정하고, 너라서 죄책감을 느낀 거야.”
그런 린을 조심스레 껴안았다. 혹시 이거 놓으라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요룬 가문에 큰 피해를 입힌 나를 용서해 준 너라서, 나처럼 칙칙한 놈을 오빠라고 불러준 너라서, 나에게 검은 의도가 없는 순수한 선물을 준 너라서, 바쁠 텐데도 동아리실까지 와 함께 웃어준 너라서.”
그래, 그래서 린의 고백을 받은 거다.
나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라면 받아줬겠나. 그 사람이 상처를 입든 말든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였겠나.
지인이라고는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 친구라고는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 매정한 녀석들밖에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당당히 사적으로 아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린이었다. 사람의 정을 그리워하던 나에게 홀연히 다가온 것이 린이었다.
“…처음에는 그 녀석들의 대용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다시 내 곁에서 함께해 줄 사람을 원해서 받아들인 걸 수도 있어.”
아니, 있어가 아니라 사실이다. 연이어 고백을 받았을 때는 일곱 명이 즐거웠던 시절을 그리워해서 받아들였다. 마침 나를 사랑한다고 한 사람도 여섯이라 운명이 아닌가, 잠깐 그런 생각마저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실례도 그런 실례가 없다. 산 사람을 죽은 사람의 대용으로 여기는 건 미친 짓이잖아.
“확실히 시작은 이상했지.”
그렇게 말하며 린과 포옹을 풀고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과정도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아.”
린과 연인이 되면서, 연인인 린과 교감을 나누면서 린은 린이라는 걸 인식했다. 린이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는 더 이상 린을 옛 친우의 대용으로 보지 않는다. 나를 사랑해주고, 나도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으로 보고 있다.
“정략으로 이어진 부부도 서로 마음이 통하면 사이가 좋잖아? 우리는 정략도 아닌 서로의 선택으로 이어졌으니 그보다 더 나아갈 수 있어.”
눈물 범벅인 린의 얼굴을 보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도 솔직하게 말했는데, 답이 됐을까?”
시작은 이상했을지언정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답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나로서는 최선의 행동을.
“린.”
“네, 네에…”
“사랑해. 나랑 결혼해주지 않을래?”
한참이 지나서야 잘못 끼운 단추를 풀고, 새롭게 끼우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