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3)
로판 속 공무원 563화(564/945)
린은 한참이나 울었다. 꼭꼭 숨겨두었던 불안을 털어내었을 때보다, 내가 엉겁결에 받아들였다는 말을 할 때보다 펑펑 울었다.
하지만 그런 린을 웃으며 다독여줄 수 있었다. 저 눈물이 슬픔이 아닌 안도와 기쁨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기에.
“진정됐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나야 좋지.”
겨우 울음을 멈춘 린은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래 긴장이 풀리고 나면 후폭풍이 장난 아닌 법이지. 이 오빠는 다 이해한다.
“결혼 전에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린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혼식을 올렸다면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꼴이었다.만약 린이 나와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곪은 상처가 터졌으면 어땠을까.
‘끔찍하네.’
차마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심연이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세 신의 가호가 나와 린을, 미래의 아이를 살렸다.
“어쩌다 보니 같은 곳에서 린을 두 번이나 울렸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짓궂은 말을 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회심의 농담이었으나,
“…….”
“미안해.”
말없이 팔에 힘을 주는 린의 시위에 서둘러 사과했다.
애석하게도 린이 이곳에서 처음 울었을 때는 위로만 운 게 아니라 아래로도 울었었다. 그 아련한 추억이 떠오를 발언을 한 건 내 실수가 맞다.
하지만 조금은 억울하다. 그 사건은 나랑 린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어색한 관계를 풀 수 있었던 기념비적인 사건인데, 하필 거기서 아래 눈물이.
‘어쩔 수 없지.’
도로 힘을 푼 린의 이마에 다시 입술을 맞추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린은 풋풋한 아카데미 학생이 아닌, 한 남자의 부인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될 사람이다.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하기 어려운 추억은 남편이라도 언급하지 않는 게 도리다.
그러니 아쉬움을 억눌렀다. 아내의 흑역사는 오늘 이 바다에 묻어버리자.
‘망할 크라켄.’
문득 저승에서 부모와 만났을 크라켄이 떠올랐다. 린이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잊지 못할 흑역사도 제공한 원흉.
그 새끼를 너무 곱게 죽인 것 같아 안타깝다.
바다에 온 용무는 마쳤지만, 이왕 제국 남쪽 끝까지 온 김에 잠깐 놀다 가기로 했다.
미리 다른 부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고, 어차피 텔레포트 마법사가 있으니 복귀하는 건 금방이니까. 대충 해가 질 때 즈음에 돌아가면 되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복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어요.”
그리고 완전히 기운을 회복한 린은 배시시 웃으며 백사장을 돌아다녔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흐뭇한 광경이다. 불과 몇십 분 전에 자신을 왜 받아줬냐고, 사랑하는 게 맞냐고 불안에 찬 눈빛으로 묻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만큼 잘 해결했다는 거지.’
나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다. 공식 부인만 벌써 셋이다 보니 여심을 완벽히 이해하는 멋진 남자가 되었구나.
장하다, 나 자신아.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는 거야.
“어차피 우리만 있는데 그냥 옷 입고 들어갈까?”
그렇게 폭발하는 자부심을 뒤로하고 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수영복을 입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모두가 사용하는 바다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수영 전용 복장을 입는 것이기도 하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외에 아무도 없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입수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
“그러고 보니 진짜 저희만 있네요? 아직 성수기는 아니라지만 보야르가 사람이 없을 곳은 아닌데?”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린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그걸 이제야 눈치챘을까.
“오늘 하루 빌렸어. 우리 외에 아무도 못 들어와.”
“네?”
“부부가 오붓하게 데이트를 하는데, 굳이 다른 사람까지 필요해?”
내 말에 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빌렸다고요?”
“응.”
“여기를요?”
“힘 좀 썼지.”
농담기 섞인 대답에 린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여, 여기는 보야르 해변가 중에서도 유명한 곳인데… 아무리 성수기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빌리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중얼거림에 다시 웃음이 나왔다. 역시 황금공 파벌에 속한 가문의 영애라 그런지, 금전이나 상업 관련 문제로는 빠르게 머리가 굴러간다.
린의 말처럼 이 해변을 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유명 관광지를 하루 동안 빌리는 비용적 문제, 당일에 주인의 확답을 받아야 하는 시간적 문제, 돈과 시간을 떠나 여러 관광객이 모일 곳을 한 명에게 내준다는 타당성 문제까지. 솔직히 황금공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많은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황금공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 해변? 내 자네 덕에 새로 맺은 계약이 많은데, 그 정도야 쉬운 일이지. 편하게 놀다가 가게나.
“감사합니다, 각하.”
거절할 이유보다 수락할 이유가 더 많았으니까.
근래 제국 고위층들은 반 년에 한 번씩 강제로 모이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내 결혼식 때문.
황금공 입장에서 고위층들이 집결한 자리는 새로운 돈을 부르는 노다지나 다름없다. 그걸 지금까지 세 번이나 겪었고, 조만간 네 번째 노다지가 개방될 예정이지 않나. 내 부탁이라면 주력 관광지 하나 정도는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상황이다.
– 하루 자고 가도 괜찮으니 리조트도 하나 준비해두도록 하지.
다만 요구하지 않은 것도 덤으로 줬다는 게 문제지만.
“린.”
“어, 아, 네!”
어쨌든 여전히 중얼거리는 린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만히 두면 계속 문화 충격 상태로 있을 것 같았으니.
그건 곤란한 일이다. 기껏 황금공이 자랑하는 관광지도 뜯어왔는데 제대로 놀지 못하면 아쉽잖아.
“내가 이렇게 능력 좋은 남편이야.”
그렇기에 당당히 말했다. 나에게 있어 공작에게 무언가를 받아오는 건 간단하다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겪을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즐겁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최악의 날이었는데, 한순간에 영원히 기억에 남을 행복한 날이 되었다.
“오빠! 오빠도 들어와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옷이 물 먹어서 너무 무거워.”
그 말에 쿡쿡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검으로 하늘도 베는 사람이 고작 옷이 무겁다고 엄살을 피우다니. 가족이 아니면 평생 볼 수 없는 광경이잖아.
그래도 오빠를 재촉하지 않고 내가 백사장으로 올라갔다. 최근 오빠가 페디, 티티랑 놀아주는 걸 보면 피곤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사람이 네 발로 저택을 돌아다니면 누구라도 힘이 들 수밖에 없다.
…
‘왜 굳이 네 발로…’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다. 놀아주기 위해서나 안전을 위해 보살피는 거라면 옆에 있는 걸로도 충분하다. 페디를 웃게 하기 위해서라면 잠깐 눈높이를 맞추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쉬지 않고 네 발로 돌아다니는 건… 놀아주는 수준을 넘은 거 아닌가…?
‘오빠도 즐기는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페디는 핑계고, 그냥 하고 싶어서 네 발로 기는 거라는 이상한 생각을.
물론 아무런 근거도, 가능성도 없는 생각이다. 오빠가 그럴 리 없잖아.
“바다에서 이렇게 논 건 오랜만이네요.”
아무렇지 않게 오빠의 옆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재작년 체네스 공작령으로 수학여행을 간 이후, 바다에 온 건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재밌는 거지.”
내 미소에 오빠도 마주 웃으며 어깨를 끌어안아줬다.
“…물을 먹어서 그런지 조금 무겁네.”
“무, 무겁다뇨!”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과 함께.
나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옷이 물을 먹어서 무겁다는 거지, 내 살이 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여자에게 있어 무겁다는 말은 무엇보다 두렵고 치명적인 말이다. 아무리 옷이 무거워졌더라도 다르게 표현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무거운 게 뭐 어때서. 내 옆에서 떠나기 더 힘들다는 거잖아.”
그리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오는 오빠의 기습에 잠깐 머리가 멈췄다.
“이상했어?”
“신기했어요.”
즉각적인 대답에 오빠도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평소의 오빠답지 않은 모습이지만 왜 그런 지 알 것 같다. 아마 아까까지만 해도 펑펑 운 나를 달래주기 위해서 평소보다 더 능글맞고 부드러운 말을 해주려는 거겠지.
정작 강도 조절에 실패해서 서로 민망한 말이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애정 표현의 일부.
‘나만 들었겠지?’
이내 당혹감 대신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오빠에게 이런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들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좋아.’
오빠의 강력한 애정 표현에 용기가 났다. 평소에는 감히 생각도 못 했을 일도 지금만큼은 당당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린?”
이런 무릎베개 같은 거.
“왜요? 무거워서 힘들어요?”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오빠의 무릎에 누웠다. 하늘 대신 오빠의 얼굴이 보이게, 바람 대신 오빠의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너무 가벼워서 누운 줄도 몰랐어.”
“아깐 무겁다면서요.”
“사랑이 무거웠다는 거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오빠도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오늘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다.
지인… 짜, 진짜 잊지 못할 날이 되고 말았다.
“황금공 각하께서 마련해 준 리조트야. 생각해 보니 성의를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더라고.”
상의를 벗은 오빠를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에서도 마법사를 안 보내주더라. 이미 제국 끝까지 간 마법사한테 하루는 쉬게 해달래.”
속으로 집에 있을 언니들과 리제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까지 밀어주는데 뺄 수는 없지. 내가 에리히도 아니고.”
가까이 다가오는 오빠를 보니 머리가 점점 새하얗게 변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이름은 레몬이로 할까?”
“이, 이왕이면 바다로…”
“좋아.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야지.”
어느새 오빠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첫째는 바다로 할 테니, 둘째는 느긋하게 생각해둬.”
“네, 네에에…”
일단 오늘 밤 동안은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