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6)
로판 속 공무원 566화(567/945)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튤립 동산은 하객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는데.’
그 광경을 보며 애꿎은 드레스만 만지작거렸다. 리제가 영지에서 자그마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만 모인 것 같아서 작은 결혼식을 동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작가인 나이어드 가문과 달리 백작가인 요룬 가문이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건 힘든 일이다. 리제의 아버지는 사교계 활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셔서 연을 맺은 귀족들이 적었으나, 우리 아버지는 업무 때문에라도 여러 귀족들과 연을 맺어야 했다.
그러한 인원들을 두고 결혼식 규모를 줄이려면 하객들을 따로 선별해서 등급을 매겨야 하는데, 괜히 그런 짓을 하면 아버지가 좋은 사위를 두고 교만해졌다는 말이 나올 터. 뒤에서 온갖 얘기를 들을 바에는 그냥 큰 결혼식을 하는 게 맞다.
‘저 분도 왔구나.’
그렇게 결혼식장을 둘러보다가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건장한 덩치, 어떠한 이물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매끈한 머리.
‘이제 집행부장이라고 했었나?’
3년 전, 갑작스레 우리 가문을 감찰한 행동대장이자 아버지에게 절을 할 기세로 사과를 했던 사람. 처음에는 밉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일이 좋게 마무리되어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먼저 인사하는 게 좋겠지?’
잠시 집행부장의 뒷모습을 보다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식적으로 집행부장은 요룬 가문에 사과를 했고, 우리도 집행부장을 용서했다. 허나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사적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물론 나는 괜찮다. 오빠와 지내면서 당시의 감찰이 악의 없는 실수라는 걸 알게 되었고, 아버지는 오인 감찰로 인한 보상 덕에 업무가 수월해졌다며 농담 섞인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셨다.
‘부하 입장에서는 달라.’
하지만 저 사람은 오빠의 부하다. 나는 저 사람 입장에서 상사의 아내다. 아무리 마무리된 일일지언정 혹여나 다시 불똥이 튀지 않을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집행부장님.”
막 다른 하객과 인사를 마친 집행부장이 평온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부,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아티니 남작령 이후로 딱 반 년 만인가요?”
“그 정도 됐을 겁니다!”
마치 막내 하인이 귀족을 대하는 것 같은 우렁찬 대답이라 내가 다 민망했다. 차라리 말을 걸지 않는 게 좋았을까?
아니, 아니야. 말을 걸지 않았다면 앙심이 남아 무시한 거라고 오해할 수 있어.
“부장 업무로도 바쁠 텐데 귀한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그렇기에 아직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집행부장을 향해 마주 허리를 숙였다.
“저희가 비록 특이한 첫 만남을 가졌지만, 이제 남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가 됐잖아요? 앞으로도 저희 오빠를 잘 부탁해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가 장관 각하께 많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진짜 그것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연봉을 세 배로 받아도 부족해.”
가끔 감찰부장 시절의 얘기를 하던 오빠는 과장들을 언급할 때마다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오빠의 정신을 뒤흔든 사람 중 한 명이 내 앞에서는 깍듯하다니. 오빠가 보면 나한테나 잘하라고 고함을 지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부장님도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예,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참한 부인이 있습니다!”
“저는 결혼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데, 부장님도 그런가요?”
“물론입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집행부장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그러니 우리 가문과 집행부장 사이의 일도, 이제 없던 걸로 생각할게요.”
“예?”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는 기합이 가득했던 집행부장도 멍한 목소리를 냈다.
“오해는 말아요. 이미 부장님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만약 누군가 다쳤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그건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이잖아요?”
그런 집행부장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자주 볼 분이 과거의 일 때문에 눈치를 보는 건 원치 않아요. 정 마음에 걸린다면, 저희 가문에 미안한 만큼 오빠를 도와주세요.”
“…….”
집행부장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마 갑작스레 용서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귀족이 이런 직설적인 말을 한 것도 전부 당혹스럽겠지.
그래도 피해자가 이제 괜찮다는 건, 당신을 용서한다는 건 빙빙 말할 필요가 없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가해자 마음속의 짐이 사라질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겨우 허리를 든 집행부장처럼.
결혼식이 시작됐다.
“집행부장하고 무슨 일 있었어?”
“네?”
그리고 나란히 사회자 앞에 서있던 오빠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놈이 갑자기 나한테 너무 과분한 부인을 얻었다 하더라고.”
언짢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오빠는 덤덤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걸 이제야 알 정도면 얼마나 눈치가 없는 거야.”
“푸흣.”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겨우 억눌렀다. 결혼식 도중에 미소를 짓는 수준을 넘어서 웃음을 터뜨리는 신부가 될 수는 없잖아.
“흐으…”
우리 앞에 있던 사회자도 졸지에 같이 웃음을 참는 입장이 되었다.
여기서 웃음을 터뜨리면 오빠의 말을 듣지 못한 하객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 사회자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기껏 신성교국에 있던 울켄 대교구의 추기경이 플란벨 백작령까지 와서 사회자를 맡아줬는데, 보답은커녕 너무 큰 시련을 준 게 아닐까 싶다.
“부부가 될 분들의 사이가 실로 아름다우니, 두 분의 앞날에 주의 축복이 가득할 거라는 걸 이 늙은이조차 알 수 있겠습니다.”
다행히 금방 감정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추기경은 따스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주의 축복을 받은 부부의 결혼을 축하할 수 있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추기경의 말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주의 축복이라는 말이 이렇게 와닿을 수가 없다. 아카데미 입학 전에는 이성에 관심이 없던 내가 오빠를 만나고,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정말 주의 축복이다.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슬쩍 오빠의 손을 잡자 오빠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줬다.
이렇게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을 너무 무서워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바다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오빠를 볼 수 있었지.’
그래, 바다 덕분이다. 나에게 바다는 부끄러운 기억이 깃든 곳인 동시에 잊지 못할 추억이 잠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오빠에게 목숨을 구해지고, 오빠의 배려를 받고, 오빠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아이의 태명도 바다로 정했잖아.
아직 아이가 생겼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언제 나에게 아이가 찾아오든, 무조건 태명은 바다로 할 거니까.
‘우리 바다도 엄마처럼 천천히 찾아올까?’
내가 오빠의 진짜 모습을 본 후 서서히 스며들게 된 것처럼. 오빠의 곁을 맴돌며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오빠의 딱딱한 면모가 아닌 좋은 점만 알게 되고, 내가 만난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멋진 남자기에 갈구한 것처럼.
‘아니지.’
나를 닮았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찾아올 수도 있다. 내가 오빠를 사랑하게 된 과정은 일상 속에서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정작 고백은 급작스레 했잖아.
기대된다. 과연 우리 바다는 엄마의 어떤 점을 닮을까.
아, 혹시 나도 쌍둥이를 가지는 거 아니야? 그러면 다른 태명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태명…’
상상만 해도 즐거운 고민이다.
***
결혼식 내내 린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중에 얼굴이 붉어졌다가 도로 가라앉는 일이 반복됐지만, 어두운 것보다는 그게 낫지.
‘보람이 있었어.’
역시 해변을 통째로 빌린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하다 보니 어느새 여심에 능통한 스페셜리스트가 됐어.
물론 리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린에게 고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겠지만, 조언을 줄 수 있는 부인과 결혼한 것도 내 능력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 오빠?”
“응.”
“저, 제 발로 걸을 수 있는데…”
그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공주님처럼 안긴 린은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부 사이에 이 정도 스킨십이 뭐가 그리 대수일까 싶지만,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여우니 넘어갔다.
“그, 그보다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내가 웃고만 있자 린은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하객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튤립 동산 정상으로 향하는 것. 린의 입장에서는 새신랑의 기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없었지. 그래서 선물 준비하기 딱이었고.”
“네?”
하지만 이유 없는 행동 따위는 없다. 오늘이 린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면 더더욱 허투루 행동할 수 없다.
“…와아.”
그렇게 결혼식장과 다소 떨어진 정상에 도착하자 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상에 당당히 자리 잡은 거대한 산사나무, 그 주변을 둘러싼 형형색색의 튤립들과 아담한 규모의 통나무 건물 하나.
“예쁘지?”
그 말에 린은 몽롱한 눈빛으로 산사나무를 바라봤다. 린이 나에게 준 첫 선물이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 그 상징적인 나무를 결혼식장 정상에 심어뒀으니 기뻐할 만하지.
“특별히 신경 써서 꾸몄어. 못해도 1주 정도는 여기에 있을 예정이니까.”
“…네?”
그제야 린은 정신이 돌아온 듯 황급히 나를 올려다봤다.
“그, 오빠? 저희… 이미 지난번에 바다에서…”
“고작 하루였잖아.”
“그, 그래도 하기는 했─”
“샐러드 먹었다고 스테이크를 넘겨?”
단호한 대답과 함께 위풍당당히 통나무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버둥거리던 린도 금방 순응하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들어갈 때는 둘일지언정 나올 때는 셋이 되리라.
***
오늘은 명예 제사장의 네 번째 결혼식 날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아무런 축복을 내려주지 못했다. 그냥 평범하게 축하한다는 말만 전하고 끝냈지.
‘조용한 게 좋은 거지, 응.’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인간의 결혼식을 시끄럽게 만든 에넨이랑 콘스탄티나가 이상한 거지, 나처럼 평범하게 축하해 주는 게 정상이야. 명예 제사장도 조용한 걸 더 좋아했다고.
그러니 남은 두 결혼식 때도 그럴듯한 축하 인사만 전하자, 라고 다짐한 순간.
‘…으으응?’
갑자기 신성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세계수를 통해 들어오는 신성은 아닌데?
‘꿈인가?’
꿈이면 당분간 안 깼으면 좋겠다. 이렇게 충만한 기분은 너무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