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69)
로판 속 공무원 569화(570/945)
황제와의 대면을 마친 후, 북방 대영주들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북방 고유 문화를 복원하려면 당연히 북방 현지인들의 의견과 조언이 필요하지 않겠나.
사실 북방과 관련된 일이니 만큼 위리디아 백작령으로 초대하는 게 맞지만, 신혼인데 위리디아까지 가는 건 귀찮더라. 그래서 그냥 제도로 초대했다. 어차피 복원 사업은 중앙에서 주도하는 프로젝트니 제도에서 만나도 명분상 문제는 없다.
게다가 대영주들도 북부에서 만나기보다는 제도에서 만나는 걸 더 선호했다. 역시 사람은 중앙에서 살아야 돼.
“복원 사업이요?”
그렇게 북방 대영주들이 광속으로 모이자마자 북방 고유 문화 복원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바란디가 후작이 대표로 의문을 표하였다.
“북방이 자비로운 제국의 품에 안긴 것이 고작 2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 대다수의 영민들이 당시의 생활을 기억하는 상황에서, 북방의 문화를 내세우면 혼란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유목민들을 제국화해도 모자란 판국에 이질적인 북방 문화를 복원해도 괜찮겠냐는 의문. 제국 귀족으로서 실로 타당한 반응이다.
문화의 차이는 지역과 국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북방이 고유의 문화를 간직한다면 제국 본토와 북방의 거리감은 더욱 극심해질 수 있다. 군주나 영주라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사안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황제는 북방 문화 복원을 결정하였다.
“괜찮습니다. 제국은 모든 것을 아우르기에 제국이지요.”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되기에.
크펠로펜이 뭐 처음부터 이런 영토를 가지고 있었겠나. 전쟁을 통하여 야금야금 영토를 넓힌 것이고,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점령지를 제국 본토로 편입한 것이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것은 제국에게 있어 일상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북방의 문화는 다른 정주 국가들의 문화와 비교하면 독보적으로 이질적이나, 황제는 북방의 칸을 겸하고 있지 않나. 칸으로서 적절한 군사력으로 북방을 통제하고, 본토의 물자로 북방 유목민들을 배부르게 한다. 이 간단한 방식만 유지하면 북방이 제국에서 이탈할 확률은 극히 낮다.
“상황 폐하께서는 북방의 문화를 존중하겠다 선언하며 칸이 되셨지요. 그분의 정당한 후계자인 황제 폐하께서도 같은 뜻이십니다. 북방의 문화는 제국의 단결을 깨트리는 독이 아닌, 제국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꽃입니다.”
“과연 천명을 수호하고 대륙을 관장하는 황제 폐하다운 뜻입니다. 저 같은 범부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군요.”
내 설득 아닌 설득에 바란디가 후작은 밝아진 안색으로 수긍의 기색을 보였다.
문화 복원 사업에 의문을 표하기는 했으나 바란디가 후작도 그 근본은 유목민이다. 자신이 겪어온 인생과 터전을 제국이 인정하고 복원까지 해주겠다는데, 굳이 반대하며 꺼려할 이유는 없다.
“범부라니요. 이 복원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분이 후작 각하십니다.”
그리고 안색이 밝아진 바란디가 후작에게 본론을 꺼냈다.
“제가 말입니까?”
“예. 각하께서는 북방 신앙의 유일한 제사장이지 않습니까.”
“…아, 예. 그렇지요.”
내 말에 후작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친.’
그 반응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자기가 제사장인 걸 망각하는 단계에 이른 건가?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그 어떤 유목민보다도 제국화가 빠르잖아.
아니, 아니다. 망각은 아닐 거다. 그냥 오랜만에 제사장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한 거겠지. 지금까지 이름만 제사장으로서 지낸 세월이 기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명 교단은 이교를 인정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이교 중에는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신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척받는 신앙이 아닌 정당한 신앙이라면 마땅히 복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애써 감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으나─
“옳은 말씀입니다. 영원한 푸른 하늘에 대한 믿음과 숭배는 북방 문화의 근본이나 다름 없지요.”
바란디가 후작의 표정은 너무도 덤덤했다. 마치 복원하든 말든 관심 없다는 것처럼.
혼란스럽다. 신앙 복원에 앞장서는 것은 정주민 황제와 교황이고, 정작 당사자인 유목민 제사장은 복원에 시큰둥하다. 무언가 뒤틀려도 거하게 뒤틀렸다.
‘복원 가능할까…?’
진심으로 우려스럽다. 이거 신앙 복원 가능한 건가?
원래는 대대로 제사장 역할을 수행한 바란디가 후작을 통하여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의 전통이나 교리를 파악하려고 했다. 현직 제사장이니만큼 단순한 문답만 거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니 바란디가 후작도 전통이나 교리를 잊었을 것 같다. 영원한 푸른 하늘 신앙에서 금기시되는 행동이나 음식이 있더라도 ‘하늘은 자비로우니 용서하실 겁니다.’ 라는 말로 넘어갈 듯한 기세야.
‘…신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신 당사자와 직통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여차하면 영원한 푸른 하늘에게 물어봐서 잊어버린 전통을 찾거나, 아예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도 무방하다.
그 대가로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명예 제사장이 되겠지만.
‘망할.’
신과 소통하며 신앙의 교리를 설립하는 사람이라니. 이건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세상 사람들이 제사장이라 여길 만한 일이다.
다행히 내 직책에 ‘영원한 푸른 하늘의 제사장’이 공식 추가되는 일은 피했다.
“전통이나 교리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사장 자리를 이어야 하는 입장이라 옛날부터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이름만 제사장인 어느 아비와 달리, 딸은 제사장에 걸맞은 인재로 성장 중이었다.
“그렇다면 영애에게 신세를 져야겠군. 아무래도 후작 각하는 영지를 관리하는 것으로도 바쁘신 분이라 다른 일도 맡기기 죄송스러운 참이었지.”
“네, 제가 최대한 돕겠습니다.”
바란디가 후작은 시간이 넘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샤티도 알고 있으나, 후작의 명예를 위하여 바쁘다는 명분을 들먹였다.우리 후작이 신앙이 없다는 거 빼고는 좋은 제사장이니까.
물론 제사장한테 신앙 빼면 도대체 뭐가 남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영애가 요즘 이드라펜 후작 각하와 함께 제도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택으로 찾아오게. 이드라펜 후작 각하와 함께 놀러 와도 좋고.”
“가, 감사, 합니다…”
아인테르를 언급하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샤티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까딱 잘못했으면 장관 겸 제사장이라는 미친 제정일치를 이룰 뻔했는데.
정치와 종교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제정일치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경지가 아니야.
“그럼 후작 각하께 안부 좀 전해주게나.”
“예, 각하.”
그렇게 연신 허리를 숙이며 물러나는 샤티를 배웅한 후, 저택 깊숙한 곳에 처박힌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정식 직책이 없는 영애조차 일을 떠맡은 상황이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신혼 겸 육아 휴가 중이라도 최소한의 근무 정도는 하는 게 옳다.
‘신전 건설 예산은 미리 확보해야지.’
예를 들면 지난 대토벌 전쟁으로 인해 싸그리 무너진 영원한 푸른 하늘의 신전 복구 같은 거.
쥐불놀이에 휘말려 불탄 신전의 수가 제법 많았기에 그걸 전부 복구하는 건 무리더라도,각 대영지 중심지에는 세워야 최소한의 체면은 세울 수 있다. 교회가 덜렁 하나 있으면 그게 사이비 신앙이지 종교냐고.
‘아쉬운 소리 좀 해야겠네.’
그리고 신전 13개를 동시에 세울만한 예산을 움직이려면 필연적으로 재무성 장관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만약 거절할 것 같으면 페디랑 같이 가자. 대자가 대부 앞에서 뽈뽈뽈 기어다니면 아무리 악독한 장관이라도 마음이 누그러들 터.
…
‘뭔가 이상한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황제가 하라고 내던진 국책 사업인데, 왜 예산을 내 힘으로 따야 하는 거지?
‘이거 국책 사업 맞나?’
황제 이 새끼, 혹시 발의자를 내 명의로 조작해둔 거 아냐?
***
공의회 발표 이후로 대륙은 혼란에 휩싸였다.
허나 이 과정 또한 보다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다. 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교단은 성장할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고통이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 같구나.”
수석 추기경이자 비서성 성장인 스승님의 중얼거림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확실히 스승님은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지고 있었다. 공의회 결과에 반발하는 세력 중 보수적이고 온건한 사람들은 차마 교단의 수장인 교황 성하를 비판하지 못하여, 비서성 성장인 스승님에게 교황 성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묻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옳은 일을 행한 교황 성하가 원망을 받는 것도, 그저 성하를 보필한 스승님이 대신 욕을 먹는 것도.
“스승님, 역시 제가─”
“너는 가만히 있어라. 차기 성자는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해.”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스승님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셨다.
사실 나도 잘 알고 있다. 여명 교단의 성자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교황과 추기경과 달리, 철저히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 중립을 지켜야 한다. 다양한 성향을 지닌 교단의 신도들을 보듬기 위해, 성자는 어떠한 성향도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럴 때는 성자의 의무가 원망스럽습니다.”
“어쩌겠느냐. 초대 성자께서 이상한 선례를 만들어버리셨으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초대 성자님의 기행은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입꼬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서로 팔을 잘라서 먼저 붙이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저는 형제님을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 신앙은 아직 형제님을 계몽해야 한다 외치는군요.”
“교황 성하. 저와 전력으로 신성력을 끌어올린 채 맞붙는 것은 어떻습니까? 주께서 옳은 자를 천상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교단 내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초대 성자님의 어록. 성자로 지내는 내내 미친 존재감을 발휘한 분이라, 그 후의 성자들은 이 악물고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여하려는 낌새를 보이면 초대 성자의 재림이니 뭐니 견제를 받는데 별수가 있을까.
“…스승님.”
아무튼 한참이나 꿈틀거리던 입꼬리를 도로 내리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뭐냐.”
“성지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은 서류로 향했던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방금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성지 순례는 신도의 의무입니다. 차기 성자가 성지를 돌아다니며 마음을 가다듬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이 시기에 하는 건 이상한 일이지.”
알고 있다. 평소라면 모를까, 공의회 직후에 성지 순례를 시작하면 공의회에 반발하는 신도들을 설득하고 다독이기 위한 순례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움직이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관례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성하와 스승님을 돕기 위해.
“스승님.”
“왜 또.”
“언제는 제가 하지 말라고 안 했습니까?”
당당한 선전포고에 스승님의 얼굴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