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72)
로판 속 공무원 572화(573/945)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분명 털코트에 방한 마법까지 사용했음에도 귀가 뚝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떨어졌는데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이딴 곳에 처박으면 선신도 악신으로 진화하겠다.’
치가 떨렸다. 에넨이 정말 악신을 봉인한 게 맞을까? 그냥 아무나 이곳에 쑤셔 박아서 그 신들이 악신으로 각성한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가설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이 추위는 끔찍했다. 봉인지 확인이고 나발이고 그냥 봉인이 풀리게 둔 다음, 남하하는 악신들을 북방에서 방어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역시 남편은 부인 말을 들어야 돼.’
이윽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부인들의 말대로 저택에 남아있었다면 이런 고생도 안 했을 텐데.
‘시발.’
진짜 눈물을 흘리면 바로 얼어버릴 것 같아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이 머나먼 북쪽까지 온 것은 가족들도 알고 있다. 그야 가문의 마법사들을 대거 소환하고, 평소에 제복만 입던 놈이 털코트를 찾지 않았나. 누가 봐도 먼 곳으로 떠날 조짐이기에 먼저 밝혔다. 어차피 갈 거라면 추궁을 당하고 가는 것보다는 자백하고 가는 게 맞으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악신이 아닌 악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봉인지 확인이 아닌 고대 신의 유적 확인 정도로 순화하여 설명했다. 과도한 솔직함은 과한 걱정을 유발하는 법.
“꼭 가야 돼요? 북방보다 북쪽이면 미개척지라는 말로도 부족하잖아요.”
순화했음에도 눈물을 그렁거린 마르를 생각하면 실로 옳은 판단이었다.
“괜찮아.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딱 확인만 하고 올 건데.”
아무튼 그런 마르와 다른 부인들을 다독이며 당당히 말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확인만 하고 올 테니 금방 끝날 일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봉인지에 가서 봉인 여부만 확인하면 끝날 일이었다. 만약 봉인이 헐겁거나 풀렸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예정이기도 했다.
‘대체 봉인지가 어디야.’
문제는 봉인지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가혹하다는 점이다.
여명 교단이 종교 승리를 찍으며 대륙 주류 종교로 거듭난 것은 못해도 수백 년 전. 즉, 에넨이 이 땅에 악신들을 봉인한 것도 수백 년 전이라는 뜻이다. 철저하게 관리한 건물도 수백 년이나 지나면 맛이 가는 판국에, 이 야생에서 수백 년이나 방치된 봉인지는 오죽할까.
길이라고 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고, 과거에 있었을지 모를 이정표는 칼바람과 폭설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와 마법사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한 곳을 찾으며 처절한 폭설 행군을 하게 되었다.
– 북쪽으로 더 가면 돼.
덤으로 성능이 별로인 내비게이션 하나와 함께.
‘아까부터 계속 북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진짜 북쪽인 걸 어떡해! 자세한 위치는 나도 잘 모른단 말이야!
본인도 찔리는지 과하게 반응한 영원한 푸른 하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에넨이 가장 강할 때 만들어진 봉인지라 철저하게 숨겨졌어. 나도 에넨의 기운을 따라서 추적하는 게 아니라, 악신 녀석들 잔재를 느끼면서 찾는 거라고…
이번에도 힘의 차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문제라면 영원한 푸른 하늘을 구박해도 달라질 게 없는 문제이니.
‘…혹시 에넨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습니까?’
– 얘도 바쁜지 반응이 없어. 기다리면 대답해주기는 할 텐데, 봉인이 헐거운 상태라면 악신이 먼저 튀어나올걸?
‘환장하겠군요.’
유일하게 봉인지의 위치를 아는 존재가 잠수 중이라는 사실에 실소가 나왔다.
허나 이해할 수는 있다. 에넨은 이 대륙 전체를 관장하는 신이니, 봉인지 말고도 신경 쓸 곳이 얼마나 많겠나. 심지어 에넨이 바빠진 이유는 인간들이 주도한 공의회 때문이기에 원망하기도 애매하다.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에넨이 봉인지 관련 문제로 답이 없다면 다른 일이 더 급하다는 거고, 악신 봉인지의 우선순위가 밀렸다는 건 봉인이 멀쩡할 확률이 높다는 거다. 설마 악신들이 풀려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겠어? 봉인이 멀쩡하니 관심을 거둔 거지.
‘제발.’
제발 그렇다고 해줘. 악신이 풀려나는 것보다 급한 문제가 있다면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야.
“가그그극각가카…”
“말하기 힘들면 글로 써도 된다.”
그 와중에 입이 얼어버린 마법사의 애잔한 부름을 들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정도로 얼었으면 그냥 필담으로 해. 무리하다가 입 깨지겠다.
[ 마법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뭐?”
그리고 빠르게 휘갈긴 마법사의 필담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이 불가능해?’
이 날씨에, 이정표도 없는 혹한의 땅 한가운데에서 마법도 없이 버티라고?
내가 마나 분배에 유의하라고 주의까지 줬는데?
[ 마나는 아직 넉넉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몸에 축적된 마나를 외부로 방출하려고 하면 무언가 억누르는 기분이 듭니다. ]불쾌감과 막막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자, 마법사가 황급히 문장을 이어 적었다.
“무언가 억누르는 기분?”
[ 예, 각하. ]경쾌하게 적힌 글자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마법사의 얼굴을 봤다.
마법사의 표정은 절망 속에서 구원의 빛을 본 신도처럼 밝았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일 거다.
‘찾았다.’
멀쩡하게 발동되던 마법이 갑자기 막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변수가 될만한 요소는 악신밖에 없다.
설마 마나가 혹한에 얼어버린 것이 아닌 이상 확실하다. 근처에 악신의 봉인지가 있다.
“가자. 찾고 돌아가면 다들 열흘 휴가다.”
“으그그으그으그으극!”
“그르라라라가가각!”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 울려 퍼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입이 언 것 정도로는 우리의 열정을 막을 수 없다.
***
혹한의 칼바람은 우리를 얽매는 족쇄요, 빌어먹을 태양은 우리를 감시하는 눈일지니.
모든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적이다. 우리의 발걸음을 막아서고, 위대한 전진을 모욕하는 돌부리다. 개혁을 방해하는 반동분자다.
허나 그조차 우리가 다스리고 이끌어 가야 할 세상의 일부기에 경계할지언정 증오하지는 않았다. 아직 진정한 믿음에 눈을 뜨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을 어찌 미워하겠는가. 그저 그 우둔함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그래, 우둔함이 안타깝다. 한낱 태양 따위를 진리라고 생각하는 우둔함이, 바라볼수록 눈이 멀게 되는 태양에 홀린 우둔함이.
‘빌어먹을 태양.’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하늘.’
까마득하여 보이지 않는 태양과 하늘을 욕하였다.
감히 우리가 이끌어야 할 세상을 강탈한 태양. 가장 먼저 태어난 주제에 태양에게 빌붙은 하늘.
마음 같아서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싶다.
아니,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되찾는 것이다.
‘다시금 올라가리라.’
그렇기에 매일 다짐하였다. 이 빌어먹을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을 호령하겠다고. 진정한 진리이자 신이 되겠다고.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격이 있다.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굽어살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도 세상 만물의 경외와 두려움을 받는 자들이니.
‘역병, 전쟁, 기근.’
세상을 뒤흔들며 세상을 다시금 세우는 존재.
‘그리고 나는.’
그 존재들과 함께하며, 그 존재들 위에 서는 자.
“죽음이어라!”
모든 생명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종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
그것이 나다. 지금은 이 어둡고 좁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언젠가는 이 세상 위에 우뚝 서리라!
“저 새끼 왜 또 지랄이냐.”
“야! 여기 혼자 쓰냐! 조용히 좀 해라!”
허나 나의 깊고도 웅장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동포들은 선구자를 욕하기 바빴다.
“가장 먼저 처박힌 녀석이 선구자는 개뿔.”
“왜 그래. 우리 덜 춥게 가장 먼저 들어와서 따뜻한 곳 찾아줬잖아.”
“아, 그 선구자였냐?”
낄낄거리기 시작하는 동포들을 보니 이가 갈렸다.
저 패배주의에 찌든 것들. 이 감옥에서 나갈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 편한 곳을 찾겠다며 굴러다니는 한심한 것들.
마음 같아서는 저것들이랑 별개인 독자적 존재가 되고 싶지만,그래도 꼴에 같은 시기에 태어난 동포들이라 참고 함께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도 사흉이라면 그에 맞는 긍지를 보여라! 이 감옥을 벗어나 태양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생각을 해야지!”
답답한 심정에 오늘도 일갈했다. 저 머저리 같은 것들이 제발 정신을 차렸으면 하─
“트양의 믁들미를 무루뚜둘 생가굴 해야지~”
“따라 하지 마라! 아니, 애초에 그딴 식으로 말 안 했어!”
“말안해쓰~”
“갸아아아아아악!”
결국 오늘도 참지 못하고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저 병신들 또 싸우냐?”
“내가 밖에서는 저것들이랑 같은 악신 취급받고 있겠지? 갑자기 소멸하고 싶어지네.”
저 뒤에서 다른 수감자들의 속삭임이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역병 같은 역병신새끼를 응징하는 것이니!
– ──! ───?
– ─── ──!
‘응?’
그렇게 한참을 역병 놈과 싸우는 사이,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뭐지?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 박혀있었지만, 우리가 내는 소리 외에 다른 소음이 섞인 건 처음인데?
“이거 무슨 소리냐?”
“야, 자는 것들 다 깨워봐.”
나만 들은 소리가 아니었는지 다른 녀석들도 하나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위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그리고 기근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리가 수백 년 동안 닿지 못한 출구를 바라봤다.
“어?”
“뭐야, 저거 원래 저렇게 흐릿했나?”
그러자 평소보다 조금, 아주 조금 흐릿해진 결계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니, 뭐지? 분명 아까까지는 멀쩡했는데?
“…밖에 무슨 일 생겼나?”
그 말에 수군거리던 동포들과 수감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빌어먹을 태양의 결계가 흐릿해졌다 = 결계를 유지할 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빌어먹을 태양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 바깥 세상에 혼란이 찾아왔다.
…
“으아아아아아아!”
“나가는 거냐!? 드디어 나가는 거냐!”
“그래, 한 번 졌다고 계속 여기 처박혀 있는 건 선 넘었지! 한 판은 더 하는 게 도리라고!”
이윽고 과거, 세상을 쥐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던 시절의 투지가 이 감옥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