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75)
로판 속 공무원 575화(576/945)
에넨의 미움과 경계를 받아 따스한 태양의 가호가 닿지 않았던 혹한의 봉인지.
그 혹한 속에서 수백 년 동안 봉인되어왔고, 봉인에서 벗어나자마자 뼈까지 얼어붙는 추위를 맛본 악신들.
“으, 따뜻해.”
“이게… 집이지… 따뜻한 게… 최고야…”
아주 찰나의 고통이었지만, 그 찰나로도 떵떵거리며 군림한 악신들에게는 충분한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지금도 열하나나 되는 악신들이 거대한 담요 하나를 뒤집어쓴 채 옹기종기 모여있었으니까.
죽음인 요크셔테리어, 역병인 독수리, 전쟁인 호랑이, 기근인 양.
교만인 병아리, 인색인 사슴, 질투인 망아지, 분노인 곰, 음욕인 여우, 탐욕인 뱀, 나태인 거북이까지.
‘동물의 왕국이냐고.’
그 광경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페디에게 동물원을 차려주겠다는 야망을 품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형으로 이루어진 동물원이었다. 진짜 동물─ 아니, 동물인 척하는 퇴물 악신들로 동물원을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칼. 이제 설명해줄 수 있겠니?”
멍하니 악신들을 보다가 트릭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응, 그래. 설명해야지.”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마르는 나에게 변명의 기회를 하사해줬고, 트릭시를 비롯한 부인들은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걸 기다려줬다. 이렇게나 배려를 받았으니 합당하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보답하는 게 옳다.
“유적지에 가보니 악령이었던 것들이 죽어가고 있더라고. 사고치지 않고 얌전히 지내겠다고 사정하길래 데려왔어.”
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정신나간 상황을 설명하려면 내가 보러 간 것이 악신의 봉인지이며, 저 꼬꼬마 동물들이 악신이라는 것부터 말해야 한다. 그런데 난 북부로 가기 전에 악신이 아닌 악령과 관련된 일이고, 봉인지가 아닌 고대의 유적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그래, 이건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거다. 이제 와서 첫 단추를 풀려고 하면 악신이 아니라 내가 집에서 쫓겨난다.
“…악령이요?”
“저것들이?”
내 설명에 부인들의 시선이 만두처럼 담요에 쌓여있는 악신들에게 향했다.
무슨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다. 무슨 생각으로 악령을 집 안에 들였냐는 책망 20%, 저게 정말 악령이 맞냐는 의구심 80%겠지.
“악령이라니! 나는 모든 생명의 종착점인 죽음이요, 대륙 위에 군림하는 절망이거늘!”
“저렇게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홀린 악령이야.”
“갸아아아아악!”
그 와중에 자기소개를 하는 죽음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눈치 챙겨, 이 머저리 같은 것아. 여기서 잘못하면 너희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악령…”
얼떨떨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던 리제는 악령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심에 빠졌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나도 알아. 악령들이 집에서 지내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겠지.”
그런 리제의 모습을 보며 빠르게 선수를 쳤다.
저것들이 지금은 신성을 잃은 잉여들이지만 한때 악신이라 불리며 봉인까지 당한 악질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들였다가 무슨 사고라도 터지지 않을까 걱정했고, 얼어죽든 말든 구덩이에 밀어넣을 생각까지도 했었다.
하지만 영원한 푸른 하늘의 말 덕분에 생각을 바꿨다.
– 이제 쟤네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신성을 잃었으니 다시는 신앙을 담지 못하고, 신이 아니니 물리적으로 죽일 수도 있지.
‘그럼 그냥 죽이고 가는 게 깔끔한 거 아닙니까?’
– 그냥 죽이기는 아쉽지 않아? 살려두면 써먹을 수 있는데?
‘예?’
한때 악신이었던 골칫거리들을 도구처럼 쓸 수 있다는 말. 흥미가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다.
– 강한 신성을 억지로 흡수하면 흡수한 신의 존재가 변질된다고 했지? 그 반대라면 오히려 상대를 구속할 수 있거든. 원래라면 같은 신들끼리 그 정도까지 하지는 않지만, 쟤네는 악신이잖아?
‘…구속이라면?’
– 내 신성 일부를 쟤네 몸에 박았어. 이제 내 말을 거역할 수 없지.
대충 천사 비스무리한 존재가 됐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었다.
완벽히 통제 가능한 존재라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한때 악신이어서 불안하다는 단점은, 한때 악신이어서 써먹을만하다는 장점으로 돌변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가볍게 씹어 먹을 거야. 경비병이나 호위로 쓰기 딱이네.
‘당장 가져가죠.’
그리고 그 말이 결정타였다. 저렇게 작은 사이즈면 어디든 들고 갈 수 있는데, 무력까지 괜찮다? 가족들이 외출을 할 때 호위로 보내거나, 은밀한 작전을 할 때 침투시킬 수도 있다는 소리다.
“내가 신 하고 이래저래 엮였잖아. 저 악령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단이 있고, 아무 소란 없이 조용히 지내기로 약속했어.”
“어… 만약 약속을 어기면요?”
“바로 처리하면 돼.”
린의 질문에 단호히 답한 뒤 악신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내 시선을 받은 악신들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회개했습니다. 앞으로 악령이 아닌 선량한 영혼으로 살아갈 겁니다.”
“사실 저는 정령입니다. 제 부모님도 정령이었습니다.”
“그렇대.”
“아, 네…”
어느 눈치 없는 죽음과 달리 흡족스러운 답을 내놓은 악신들의 모습에 린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들의 무해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증명되었다.
– 왈!
“아악! 핥지 마!”
“아이고! 덩치가 깡패지, 깡패야!”
갑작스레 새로운 동물 친구들이 생긴 티티는 악신들을 볼 때마다 핥거나 목덜미를 물었고, 압도적인 덩치 차이로 인해 티티에게 시달린 악신들은 그저 우는 소리를 내며 도망다닐 뿐이었다.
무려 애완견 선에서 정리되는 악령. 그런 모습을 보고 경계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이 과해도 너무 과한 사람이겠지. 다행히 우리 저택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꺄우!”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심지어 사슴 형태인 인색과 망아지 형태인 질투는 꼬리에 보자기를 매달고, 그 보자기에 페디를 태운 채 저택을 질주했다.
경이롭다. 저게 신성을 잃은 신이 살아가는 방식인가.
‘신의 밑바닥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 다 보여준 줄 알았는데.’
바닥 밑에는 지하실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이게 맞는 건가 모르겠어요.”
그 광경을 같이 보던 마르가 오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악령(이라고 신분 세탁한 전직 악신)들이 하나뿐인 아들과 놀아주는 모습.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떼어내는 게 옳으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실시간으로 증명하는 꼴이다.
게다가 티티를 좋아하는 페디답게 동물 모습을 한 악신들을 좋아하더라. 그만 놀자고 떼어내면 악신들의 꼬리를 부여잡으며 버틸 정도였다.
“정말 안전한 거 맞겠죠…?”
“신이 확신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마르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도 우리 가족과 사용인들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니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애잔한 모습만 보이던 영원한 푸른 하늘이 드물게도 확신을 보였고, 콘스탄티나도 상대의 몸에 신성을 심었다면 걱정할 것 없다는 증언을 했다.
두 신이 그렇다는데 그렇다고 믿어야지. 신들의 생태는 인간보다 신이 더 잘 알 테니까.
“그리고 나랑 트릭시가 있잖아. 악령이 날뛰어도 금방 제압할 수 있어.”
그 말에 마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다면 카간이 부활하는 게 아닌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
첫 성지 순례 장소는 대륙 북동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루센 왕국이었다.
과거 이교도의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지역이었으나, 추운 날씨와 빈곤한 자원 속에서 살아가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 선인이 잠든 곳. 루센 부족 연합을 문명화하기 위하여 여명 교단을 받아들였다가 순교한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
혹한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암울했던 조국을 밝은 미래로 인도한 위대한 성인의 무덤. 실로 첫 성지 순례 장소로 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도 시련을 이겨내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를.’
루센의 대표적 성인인 성 루돌프의 무덤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비록 성 루돌프는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었지만, 그 뜻은 꺾이지 않고 불타올라 야만의 땅을 문명의 땅으로 만들었다. 동사와 아사가 일상이던 이 땅을 ‘춥기는 더럽게 춥지만 그럭저럭 살 수는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우리도 당신의 뜻을 이어 교단을 바꾸리라. 지금은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뜨겁게 불타오르리라.
“…후우.”
한참이나 기도를 올리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도를 올리는 저도 이렇게 추운데, 맨몸으로 장대에 매달렸던 성 루돌프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군요.”
“그렇기에 기적을 일으킨 성인이신 거지요.”
내 말에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외투를 덮어주며 답하였다.
자매님의 말처럼 성 루돌프는 기적을 일으킨 성인이다. 단순히 순교라는 희생 외에도 야만과 혹한의 땅을 문명국으로 나아가게 만든 위대한 불꽃이자, 장대에 열흘이나 매달렸음에도 죽지 않고 주민들을 용서한 기적의 주인공.
‘열흘이라.’
경이롭다. 나조차 이 날씨에 맨몸으로,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하고 열흘이나 버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성자라도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버티는 건 무리다. 한 1주일 정도면 모를까.
물론 불가능을 이루었기에 성인으로 시성 된 것이겠지만.
“타니안 형제님,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
멍하니 성 루돌프의 무덤을 바라보는 사이, 루센 대교구의 추기경이 다가왔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추위를 녹일만한 곳을 마련해두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더 성인의 기운을 느끼고 싶군요.”
“두 분이 계셔서 다른 신도들이 못 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얼른 가야겠군요.”
추기경의 농담에 마주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에 다른 형제자매님들이 기도를 드리지 못하면 곤란하지.
그렇게 추기경의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으음?”
“아니, 이 무슨.”
성 루돌프의 무덤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기뻐하라, 온 대륙의 아이들아. 이 세상 가장 오래된 근심과 죄악이 영웅의 손에 사라지었나니. 그 영웅은 찬란한 태양의 가호를 받아 드넓은 하늘의 사랑을 받고 초목의 은혜를 받은 자일지라.
저절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거룩한 음성과 함께.
그리고 5분 후,주의 빛과 음성이 임한 곳은 이곳뿐만 아니라 온 대륙의 성지와 성당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