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76)
로판 속 공무원 576화(577/945)
대륙이 뒤집어졌다. 공의회 이후로 쉬지 않고 벌어지던 막고라조차 끝내버릴 핵폭탄이 지상에 투하되고 말았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신도들과 소통하지 않던 에넨이 인간 세상에 개입했다. 교황이나 성자, 일부 추기경 정도만이 들을 수 있었던 에넨의 음성이 온 대륙의 성지와 교회에서 울려 퍼졌다.
이건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고작 인간들이 진행한 공의회도 대륙의 관심을 받았는데, 무려 신이 직접 발언을 했다?
“오오, 주여! 저는 오늘 죽더라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는 행운아다!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태어난 행운아다!”
“보아라! 주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보우하심이다!”
대륙 곳곳에서 아가리 파이팅을 하던 공의회 찬성파와 반대파는 순식간에 위 아 더 월드가 되어 에넨을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기 바빴다.
애초에 상대와 죽일 듯이 논쟁을 펼쳤다는 것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의미잖아. 그런 신실한 신도 입장에서 주의 음성만큼 중요한 건 없겠지.
그리고 이 신실한 신도들은 한참이나 기뻐하며 열광한 후, 공의회 따위가 아닌 에넨의 발언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근심과 죄악? 그게 뭐지?”
“주께서 친히 기뻐하라고 하신 걸 보면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진 건 맞는데…”
“그거 성서에 나오는 악령들 아닙니까? 올바른 신앙으로 우뚝 선 주께서 대륙의 근심이자 지성체들의 죄악을 혹한의 땅에 봉인했다─ 라는 구절이 있던데요?”
“오, 그거로군.”
신실한 신도들이 머리를 맞댄 덕분에 해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경이로운 속도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여명 교단의 신도 중에는 툭 찌르기만 하면 성서의 몇 번째 페이지, 몇 번째 문장까지 줄줄 읊어 버리는 ‘진짜’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런 인간들이 신의 음성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그렇게 대륙인들은 성서에 기록된 악령이 비유가 아닌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그 악령들이 누군가의 손에 제거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경사스러운 일이군요.”
“있는지도 몰랐던 악령이기는 하지만, 악이 없어졌다면 기뻐할 일이기는 하지.”
“주께서 온 대륙에 임하신 날임과 동시에 악이 없어진 날이라. 축일로 지정해도 문제가 없겠습니다.”
해석 결과가 퍼질수록 대륙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훈훈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상대 진영과 양보 없는 논쟁을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튼 악령의 소멸이라는 결론을 내린 신도들은 다음 문장을 해석하기 시작했고,
“악령을 제압한 영웅은─”
“당연히 타일글레헨 백작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밖에 없어.”
악령을 해석했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결과가 나왔다.
“찬란한 태양의 가호는 백작이 주의 복자라는 걸 뜻하고, 하늘의 사랑은 백작이 북방 귀족들의 수장인 걸 의미하는 거겠지.”
“초목의 은혜는요?”
“세계수 부활.”
그래, 너무나 빠른 해석이었다. 굳이 교단 내 진짜들이 나설 필요도 없었고, 에넨이 말한 근심과 죄악이 악령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웅의 정체만큼은 짐작했을 정도였다.
“칼. 잠깐 여기 앉아보세요.”
“응…”
그 결과, 악신들이 무해하고 하찮은 모습만 보이며 하락했던 가족들의 경계심이 다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청문회 소집 이유는 간단했다.
“저것들, 정말 악령 맞아요?”
에넨의 대륙 전체 공지로 인해 아내들이 악령들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저 존재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건 이해했어요. 실제로 지금까지 잠잠하기도 했고, 두 신이 확신했으니 의심할 것도 없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티티의 근처에서 얌전히 자는 척을 하는 악신들을 바라본 마르는 이윽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단순한 악령이라면 에넨께서 온 대륙에 기쁨을 표하실 리 없어요.”
“그… 오랫동안 봉인한 악령이 사라진 거니 기쁘지 않았을까?”
“애초에 그게 이상해요. 에넨께서 고작 악령을, 그것도 사람들이 인식조차 못 하던 악령을 소멸시킨 게 아니라 봉인으로 그쳤다고요?”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정말 저것들이 악령 나부랭이라면 에넨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소멸했을 거다. 헌데 소멸이 아니라 수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에넨조차 함부로 없애기 힘든 존재라는 의미다.
역시 마르다. 작은 단서로도 금방 진실에 도달하는 현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
그 현명함이 내 거짓을 파헤치는 비수라는 게 문제지만.
“솔직하게 말해줘요. 저것들이 무해하다는 건 알았으니 없애라거나 돌려보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진짜?”
그 말을 하자마자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 머저리 새끼야. 거기서 진짜냐고 되묻는 건 내가 켕기는 게 있다고 자백하는 거잖아.
“네, 진짜요. 우리 페디도 좋아하고 있으니 엄마로서 밀어낼 수는 없죠.”
하지만 마르는 그런 나를 향해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가족들의 걱정을 덜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어도, 나는 이렇게 자비롭고 관대한 아내를 속인 것이다. 이 업보는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하겠지.
“사실…”
그렇기에 뒤늦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쟤네 악령이 아니라 악신이야.”
그리고 나와 열하나의 악신들은 저택에서 쫓겨났다.
“주인.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왜 너네 주인이야.”
눈치 없이 입을 여는 병아리, 교만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인 빡침 때문에 반박하기는 했으나,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이것들의 주인이기는 하다. 야생에 있던 걸 무단으로 주워온 놈이 있다면 그놈이 주인이지.
“근처에 호수가 하나─”
일단 아버지가 알려준 대피 장소로 가려던 찰나, 품속의 통신구가 빛을 뿜었다.
보라색 빛이 뿜어지는 걸 보니 황제인 것 같다.
***
또 장관이다.
이번에도 장관이 사고를 쳤다.
‘하다 하다 이제는 악령이라니.’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두통을 억눌렀다.
이해할 수 없다. 분명 저택에서 휴가나 즐기던 놈이 갑자기 악령을 제거 해? 얘기를 들어보니 성서에서 적힌 혹한의 땅은 북방보다도 위인 오지인 것 같던데, 그런 곳에 자발적으로 갔다고?
‘시간이 남아도나?’
괘씸하다. 기껏 휴가를 줬더니 악령을 만나고 다닌다면 휴가를 줄 이유가 없다. 그 남아도는 시간으로 황실과 제국, 신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대륙을 위한 길 아니겠나.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장관에게 건넬 출근 명령서를 작성하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신혼과 육아 휴가를 무시하는 건 정말 절실한 상황에서나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괘씸함에 대한 처벌성으로 남용된다면 어떤 관료가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
‘이미 넷이나 낳았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아주 잠깐 악령의 속삭임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악령은 장관이 제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살아남은 것들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 뒤틀린 분노와 징벌도 장관 때문이다. 아무튼 악령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한 장관 때문이다.
– 똑똑
“폐하, 감찰성 장관입니다.”
“들라하라.”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짚었던 손을 떼며 답했다.
하여간 부르면 빨리 오기는 한다. 차라리 매일매일 2시간 단위로 호출을 해서 어디 이상한 곳에 가지 못하게 잡아둘까?
확실히 괜찮은 생각 같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나, 먼저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 건 장관이다.
‘음?’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장관을 보자마자 머리가 굳고 말았다.
“오, 여기가 황궁인가?”
“이야, 왕궁도 보기 힘들었는데 황궁을 다 보네.”
장관의 발치에 웬 짐승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으니까.
혼란스럽다. 물론 상황 폐하 덕분에 황궁은 이미 온갖 동물들이 뛰어노는 놀이터가 됐지만, 그중에서 말하는 짐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대륙을 뒤져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장관.”
“예, 폐하. 하명하소서.”
“대체 혹한에서 뭘 가져온 거지?”
그 말에 장관은 해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악신입니다.”
…해탈이 아니라 미친 거였나?
***
황제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당당히 허리를 폈다.
내가 부인들 앞에서는 혀를 잘못 놀린 죄가 있기에 굽혔지만 황제한테도 숙일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무려 대륙의 평화를 위협하고 에넨마저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던 악신들을 제압한 자다. 비록 그 과정에서 영원한 푸른 하늘의 도움이 컸으나, 아무튼 내가 이룬 업적은 맞다. 에넨도 내가 근심과 죄악을 없앴다고 하지 않았나.
‘시발…’
생각해 보니 좀 빡치네. 내가 한 건 악신들 머리에 손을 얹은 것밖에 없다고. 그걸 내 손으로 없앴다고 보는 건 너무하잖아.
“혹한에 봉인된 것은 신앙을 잃고 영락한 악신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저와 연이 있는 신의 도움을 받아 제압하였으며, 지금은 악을 벗어던진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미묘한 분노와 씁쓸함을 뒤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공의회의 혼란을 단숨에 종식시키고, 제국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 사건이기도 하다. 황제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운 변수에 당황한 것일 뿐 꺼려야 할 일은 아니다.
허나 내가 떳떳하다고 막 나가면 황제도 감동하여 막 나갈 터. 최소한의 형식적 보고는 올려야 한다.
“이 역시 천명을 수호하는 황제 폐하의 드높은 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소신은 단지 황제 폐하를 대리하여 이 대륙의 근심과 죄악을 일소하고, 올바른 천명이 굳건함을 과시하였을 뿐입니다.”
“실로 경사스러운 일이로군. 역시 장관은 둘도 없는 충신이야.”
내 말에 황제는 의례적인 치하의 말을 내뱉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완벽히 통제할 자신이 있기에 황궁까지 데리고 온 것이겠지. 백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니까.”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기에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완벽히 통제할 자신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이것들과 같이 온 건 단순히 나 혼자 황궁에 올 수 없어서지, 과시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저택에서 쫓겨난 이것들을 어디다 두고 혼자 돌아다녀.
“전례가 없던 일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군. 그래도 장관이 주워온 것들이니 장관이 잘 돌볼 거라 믿네.”
“예, 폐하. 심려치 마소서.”
마치 ‘네가 주워온 애들이니까 네가 밥도 주고 산책도 시켜.’ 처럼 들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