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78)
로판 속 공무원 578화(579/945)
태양이 꺼졌다. 하늘은 무너지고 초목은 불타올랐다.
내 세계가, 온 세계가 죽고 말았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즐거우십니까!?”
“뺘아아아아!”
“좋으신 것 같으니 더 빠르게 달리겠습니다!”
“아우우!”
페디를 보자기에 태운 채 질주하는 인색과 질투, 그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티티.
사족보행 짐승 세 마리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는 페디까지.
‘이럴 수는 없어.’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다. 원래 저 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했다. 바지의 무릎 부근이 수없이 해지는 걸 감수하며, 가족들과 사용인들의 오묘한 시선을 이겨내며, 이족보행보다 사족보행이 익숙해지는 참사를 각오하며 페디와 함께 기어다녔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페디의 웃음이었다. 나는 분명 아들과 재미있게 놀아주는 아비였고, 아들의 사랑을 받는 아비였다.
그런데 왜 그 자리에 너희가 있는 거지? 왜? 왜 악신 나부랭이들 따위가 내 자리를 빼앗고 있는 거냐.
‘내가 먼저였는데.’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인색과 질투를 노려봤다. 티티는 원래부터 페디와 놀아주던 우리 가족이니 이해할 수 있지만, 저 두 놈이 페디의 옆자리를 빼앗은 건 용납할 수 없다.
“저기는 내 자리였는데…”
“질투는 저 녀석인데 왜 주인이 그러는 건가.”
교만의 중얼거림에 흘긋 노려보자 교만은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다.
저 망할 병아리 새끼. 생긴 것만 닭이었다면 진작에 튀겼을 거다.
‘괜히 주워온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감히 아비에게서 아들의 웃음을 빼앗아 간 악독한 것들. 전직 악신 아니랄까 봐 이런 흉악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하지만 이제 와서 방생할 수도 없다. 이미 황제에게서 저것들을 관리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아버렸고, 부인들도 한숨을 내쉬며 용인했다. 결정적으로 페디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버린다면 페디의 미움을 살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계속 집 안에 두면 아들의 사랑을 빼앗기고, 버리면 미움을 받는다. 무얼 선택해도 희망이 없는 양자택일이다.
“다 칼이 자초한 거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마르의 은근한 구박에 침통히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이다. 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다. 살려두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홀린 내 잘못이야.
“그래도 좋은 점도 있어요. 요즘 페디가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체력도 늘어나고 있었는데, 저것들 덕분에 페디가 지칠 때까지 놀 수 있게 됐거든요.”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마르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확실히 그건 좋은 점이다. 아기의 체력은 성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크라시우스와 바렌티의 피를 이은 페디는 거의 무한동력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저택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페디와 놀아줘도 벅찬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무려 열하나나 되는 악신 친구들이 추가됐다? 이제 페디의 무한동력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저것들도 꼴에 전직 신이라고 체력은 넉넉했으니까.
“세쌍둥이도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북적거리겠네.”
문득 페디와 티티, 악신들에 이어 세쌍둥이도 저택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이 저택이 얼마나 소란스럽고, 얼마나 웃음이 넘치게 될까.
‘잘 주워왔어.’
이윽고 악신들의 숫자가 열하나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페디, 세쌍둥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벚꽃이와 바다. 앞으로 생길 무수히 많은 아기들.
만약 튼튼한 악신들 없이 우리끼리 아이들과 놀아줬다면 저택은 매일매일이 수라도였을 거다.
악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택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사용인들도 말하는 짐승, 이 세상 가장 오래된 근심과 죄악, 주인과 함께 저택에서 쫓겨났던 민폐 덩어리들을 경계했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허나 악신들은 자발적으로 사용인들의 업무를 도와주며 경계심을 풀어나갔다.
“이건 둘째 마님 방까지 옮기면 돼.”
“알겠다.”
예를 들어 사용인이 무언가 잔뜩 들고 가면 자기 등에 대신 짊어진다거나,
“가위가 어디 갔지…?”
“이걸 찾나?”
“오, 맞아, 그거!”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후다닥 달려가 물어온다거나,
“어때, 먹을만하냐?”
“비켜라 애송이들! 이건 내가 다 먹을 거다!”
“아니 씹, 입이 열한 개인데 이 새끼가!”
주방에서 맛 좀 보라고 무언가 만들어주면 극상의 리액션을 보여주는 등. 이게 악신인지 영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무해한 모습을 과시했다.
솔직히 티티가 열둘로 늘어난 느낌이다. 이제 악신들이 아니라 티티와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어.
“너도 부하 늘어나서 좋지?”
– 왈!
해맑게 짖는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릇에 머리를 박은 악신들을 바라봤다.
그래, 저 녀석들은 티티와 ‘아이들’이다. 티티는 상황에게 분양받은 귀한 아이이자, 이미 우리 가족과 사용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박힌 돌이다. 비록 저것들과 달리 인간의 말은 못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우리와 티티의 유대를 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악신들을 티티의 부속품인 아이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티티는 자신의 덩치를 앞세워 악신들을 훌륭히 통제하는 중이기도 하고.
“쟤들이 말 안 들으면 언제든지 말해.”
– 왈왈!
내 말에 알았다는 듯 짖는 티티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렸다.
역시 인간의 말을 못 하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잖아.
***
루센 왕국, 스티니예 왕국, 노스고르 왕국. 통칭 겨울 삼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을 방문하였고, 성지 순례를 마쳤다.
이제 경로상으로는 겨울 삼국보다 남쪽에 있는 류튼 왕국이나 바젠 왕국으로 향해야 하나─
“다음은 제국으로 가지요.”
급격히 경로를 틀어 제국행을 택하였다.
이는 당연한 선택이다. 우리의 주께서 친히 대륙의 만민에게 경사가 생겼음을 축복하셨으며, 그 주인공이 무려 제국에 있다. 그것도 3년이나 알고 지낸 지인이다.
마음 같아서는 주의 음성을 듣자마자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미 루센 왕국에 온 이상 루센의 모든 성지를 방문해야 하며, 루센에 방문했다면 다른 겨울 삼국도 방문해야 한다. 그 3개국은 활발히 교류하는 것과 별개로 암암리에 경쟁을 하는 라이벌들이니.
‘차기 성자가 특정 국가를 편애하는 걸 보여줄 수는 없으니.’
공의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성지 순례를 시작한 주제에, 성지 순례 중 새로운 분쟁 요소를 만든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정작 공의회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 의미 없는 성지 순례가 되었지만 말이다.
‘형제님도 참 세상에 둘도 없는 분이십니다.’
제국에 있을 형제님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차기 성자로서 여러 사람을 봐왔지만 형제님처럼 독특하고 기행을 일삼는 분은 본 적이 없다.
하늘을 베지를 않나, 왕족을 폭행하지 않나,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일일이 주워가지 않나, 이번에는 이 대륙의 가장 오래된 근심과 죄악을 없애지를 않나. 도저히 한 사람이 했다고 믿을 수 없는 업적이며, 정상인이 할 거라 생각할 수 없는 기행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독특한 분이지만 악한 분은 아니다. 신실한 신앙인은 아닌 것 같지만 주를 부정하는 배교자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여러 사건을 터뜨리는 기묘한 사람일 뿐.
…으음.
“자매님.”
“네, 형제님. 말씀하세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난데없는 질문에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흠칫 떠는 게 보였다.
“아, 아이… 요?”
“제국에 가면 형제님을 뵐 텐데, 형제님 슬하에 아이가 넷이나 있지 않습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게 예의겠지요.”
“아, 복자님 말씀이시군요.”
내 첨언에 자매님의 표정이 평온해졌다.아마 내가 제국의 고아원을 순회할 생각인가 걱정했던 모양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니 딱딱하거나 날카로운 건 피해야겠지요. 그럼 인형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그렇군요.”
맞는 말이다. 어지간한 장난감은 다소 딱딱할 수밖에 없으니, 아이들이 무리 없이 손에 쥐고 입에도 넣을 수 있는 인형이 적당하다.
‘인형이라.’
턱을 매만지며 인형을 품에 안고 자는 아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형제님처럼 자식이 있는 건 아니나, 교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은 자주 방문했었다. 그곳의 아기들은 정말 천사 같았지.
나와 혈연적으로 연관이 없는 아기들도 그렇게 예쁘게 보였다. 그러면 피가 이어진 아기는 과연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저한테도 아기가 있다면 어떨지 궁금하군요.”
“네, 네!?”
‘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중얼거림에 자매님이 다시 몸을 떨었다.
물론 교단에서 결혼을 금지하는 건 아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단순히 결혼에 뜻이 없는 것이지, 교단 차원에서 눈치를 주는 경우는 없다. 역대 교황과 성자 중에서도 기혼자는 제법 많았다.
허나 루이제 자매님을 잠깐 마음에 품었던 걸 제외하면, 이성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아기를 운운했다. 자매님 입장에서는 결혼을 생각 중이라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
“저, 저기… 형제님…? 혹시,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반려를 찾으신 겁니까?”
바로 지금처럼.
“하하, 아닙니다. 그냥 아기들을 기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 그렇군요.”
오해를 풀자 자매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매님에게 몹쓸 짓을 했다. 차기 성자가 갑자기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놀라겠지.
***
외무성 장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륙 북동부부터 성지 순례 중이던 타니안이 일정을 바꿔 제국에 올 예정이라고 한다.
‘망할.’
착잡하지만 예상한 일이다. 에넨이 대륙 전체 공지로 어그로를 끌었으니, 차기 성자인 타니안이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마중 나갈 준비나 해야지…’
휴가 중이라고 무시하기에는 나와 여명 교단 사이의 관계가 결코 가볍지 않다.
차기 성자와 3년이나 아카데미에서 동고동락한 사람이, 살아있는 복자로 시복된 사람이 차기 성자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는다? 괜히 제국과 신성교국의 불화설만 나돌 거다. 기껏 공의회의 혼란이 가라앉았는데 다른 혼란 거리를 줄 수는 없다.
“주인? 어디 나가나?”
“여명 교단 차기 성자가 오─”
“키에에에에엑!”
“도망쳐어어어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늘어져있던 악신들은 사방팔방 흩어졌다.
애초에 너희 데리고 갈 생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