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79)
로판 속 공무원 579화(580/945)
타니안을 비롯한 성지 순례단은 텔레포트를 통해 제도까지 날아왔다.
비록 성지 순례단의 인원은 적었으나, 차기 성자인 타니안과 시성성 성장인 알렉산드리아나 추기경이 포함된 순례단이다. 규모가 작다고 그 권위나 무게감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황제의 동생인 아인테르, 외교 책임자인 외무성 장관, 제국 내 최고 사제인 리시우코 추기경 등. 황제 다음 가는 인사들이 순례단을 맞이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인테르 형제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걱정해주신 덕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벌로 엮인 아인테르와 타니안은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서로의 친분을 과시했다.
황제의 동생과 차기 성자가 서로 친구라는 기적의 인맥. 이 신이 이어진 인맥 덕분에 양국의 외교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악수를 나누었다. 적어도 저 둘이 살아있는 이상, 아무리 상황이 꼬이더라도 제국과 교단의 관계가 밑바닥까지 처박힐 일은 없을 테니.
“형제님도 오랜만입니다.”
아인테르와 포옹을 나눈 타니안은 빙긋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형제님은 이미 기혼이시니 제 포옹은 필요 없겠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타니안 딴에는 회심의 농담 같기에 픽 웃음을 흘리며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조금 섭섭하군요. 3년 동안 형제님 밑에서 많은 걸 배웠는데, 그런 형제님께 존대를 들어야 하다니.”
“존대를 한다고 저희의 추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형제님께 편히 말하면 저는 황족이나 왕족 분들께도 말을 놓아야 합니다.”
“하하, 그도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주 잠깐 서운함을 표했던 타니안은 금방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카데미 3년 동안 고문과 학생 관계였던 건 맞으나, 그 3년보다 몇십 배는 긴 시간을 제국 귀족과 교단의 성자로 지내야 한다. 3년의 인연으로 말을 놓기에는 조금 부담스럽지.
“그래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저희가 남은 아니니까요.”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다시 미소를 지은 타니안은 이윽고 내 옆에 있던 외무성 장관과 인사를 나누었다.
‘원래 이렇게 편했나?’
조금 신기하다. 아카데미에서 타니안을 관리할 때는 24시간 내내 긴장 상태라 대화를 나누는 것도 벅찼는데, 이제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어져서 그런지 타니안이 무슨 말을 하든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차기 성자의 온화함 덕에 마음도 편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무려 대륙 주류 종교의 차기 성자면 이런 인품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동안은 내 입장이 입장이라 색안경을 낀 상태로 타니안을 본 것 같다.
“폐하께서 귀빈들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셨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빛내주시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겠습니다.”
외무성 장관의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타니안을 보며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지인으로서 인사는 나누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끝─
“아, 아인테르 형제님과 고문 형제님도 참석하십니까?”
“저는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위해 참석할 생각이지만, 감찰성 장관은 현재 휴가 중이라 어떨지 모르겠군요.”
타니안과 아인테르의 원 투 펀치에 모든 인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저도 타니안 형제님과 3년을 지낸 사이인데, 어찌 먼 길을 온 귀빈을 홀로 두겠습니까.”
도저히 탈주할 수 없는 분위기라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대화가 편해지기는 했지만, 눈치가 살짝 부족한 건 여전했다.
연회는 급작스레 준비한 거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화려했다.이 연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궁내성과 재무성의 공무원들이 갈려 나갔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옹졸해진다.
게다가 순례단을 맞이한 인원 외에도 여러 거물들이 연회에 참석하며 연회의 격을 드높였다.
“성지 순례라. 저도 조금만 젊었다면 도전해봤을 텐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오래 돌아다니는 것이 힘들더군요.”
제국군 부사령관이라 언제나 제도에 거주 중인 전승공.
“흐히히힣, 그으으~ 래애~? 그뤄엄 우뤼영지애라도와! 재국성지 절바는 체내쓰에 이짜나!”
하필 제국에서 가장 많은 성지와 성물이 몰린 체네스 공작령의 영주라 소환된 현명공.
‘이게 맞나?’
공작이 둘이나 자리를 빛내는 중이지만 현명공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물론 하나보다 둘이 참석하는 게 좋기는 한데, 아무리 봐도 현명공은 마이너스잖아. 귀빈들 앞에 주정뱅이를 전시하는 게 말이 되냐고.
“체네스 공작령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수학여행차 방문하기도 했고, 전대 체네스 공작이신 경건공의 신앙심은 신성교국에서도 유명했지요.”
그러나 언제나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타니안은 현명공의 주정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경이롭다. 혈연관계인 나조차 현명공 옆에 5초만 있으면 기가 빨리는데, 생판 남인 타니안이 저렇게 버티다니.
“흐힣, 챠기 성자니미 그러케 말해주니기쁘네요! 아부지도 천상애서 기뻐하실꺼야!”
그리고 경건공이 여명 교단의 본산인 신성교국에서도 높게 평가받았다는 말에, 현명공은 히죽히죽 웃으며 샴페인을 들이마셨다.
조금 놀랐다. 현명공이 샴페인을 잔으로 맛만 보는 게 아니라 병째로 마신다고? 도수가 낮은 술은 흥이 안 산다며 꺼리는 사람인데?
‘뒤틀린 가족애인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들어 조금이나마 맨정신을 유지하려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그냥 술을 안 마시는 게 낫지 않나 싶다.
“생각해 보면 올바른 신앙을 위해 노력한 신도들은 제국에서 자주 나왔습니다. 작고하신 경건공께서도 그렇고, 오늘날 고문 형제님도 마찬가지지요.”
‘뭣.’
그 와중에 공작들과 웃고 떠들던 타니안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지요. 장관이 최근에 큰일을 했었습니다.”
“마자마자! 가쟝~ 오래댄 근심하고재악이랬찌?”
뒤이어 두 공작의 시선도 나에게 쏠렸기에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망할.’
연회가 시작하자마자 구석에서 쥐 죽은 듯 있었는데, 결국 관심을 받고 말았다.
‘그래도 오래 버텼다…’
1시간이면 나름 선방한 거지.
***
주인이 남긴 끔찍한 말 때문에 아직도 온몸이 떨렸다. 샛노란 날개를 파닥이며 바닥을 굴렀다.
“여명 교단 차기 성자가 온다고 해서 마중 나가려고.”
‘크으으윽…!’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절망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왜, 왜 태양의 성자가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그 끔찍하고 지랄맞은 존재가 어째서 여기까지!
‘이제 신성도 신앙도 없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성자라는 놈이 할 일도 없나? 왜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온 것이지?
만약 우리가 봉인지에서 무사히 탈출하고, 대륙을 떠돌며 신앙을 축적하는 중이라면 여명 교단의 성자가 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태양 입장에서 우리가 재기하는 건 골치 아플 테니 성자라는 전력을 보내 조기에 짓밟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을 했다면, 어느 정도 신앙을 회복했다면 성자의 추격을 무난히 따돌릴 수 있다. 설령 붙잡히더라도 고통스러울지언정 소멸까지 가지는 않는다.
물론 기껏 모은 신도들이 분쇄되기는 하겠지만… 성자를 상대로 그 정도로 끝나면 선방한 거다.
그런데 아니지 않나. 우리는 탈출은커녕 신성을 뜯겼고, 신앙 축적은커녕 인간 주인에게 길러지는 짐승으로 전락했지 않았나.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그래서 분통이 터지고 서럽기 짝이 없다. 이미 신격을 잃은 이 상황에 순응하였고, 조용하게 살아갈 준비도 되어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봉인 상태로 지낼 바에는─ 그 혹한의 땅에서 얼어죽을 바에는 이게 나으니까.
“아니, 너희 잡으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성지 순례 중에 들른 거야. 뭘 긴장하고 있어?”
문득 주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성자는 우리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단순히 성지 순례 때문에 왔다던 말이.
‘그럴 리 없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내가 신성이 아닌 머리를 뜯겼어도 그런 말에 속지는 않는다.
하필 우리가 봉인지에서 풀려난 시기에 성자가 왔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설령 우연이라고 해도 자신이 방문한 곳에 옛 악신이 있다면, 성자가 무시하고 지나갈까?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어. 그 빌어먹을 성자는 반드시 여기에 올 거야.
‘도망쳐야 돼.’
그래, 그게 정답이다. 성자가 이 제국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저택에 있어선 안 된다.
성자를 마중하러 갈 정도면 주인과 성자가 친분이 있다는 것이고, 그 친분을 핑계로 이 저택에 올 수도 있다. 그 참사를 피하려면 어디로든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몸으로 도망?’
슬쩍 고개를 내려 하찮은 몸뚱어리를 봤다.
절망스럽다. 이 쬐끄만 병아리의 몸으로 도망이 가능할까? 저택 계단까지 갔다가 티티라는 놈에게 물려 도로 방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도련님 몸에 숨을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 저택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도련님 몸에 붙어있으면 아무리 성자라도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거다.
다만 그럴 경우, 자기 자식을 이용했다고 분노한 주인에게 2차로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빌어먹을 태양…”
죽음의 입버릇이나 다름없던 욕을 중얼거렸다.
지금만큼은 죽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양은 빌어먹을 존재가 맞다.
“나 왔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날개만 퍼덕이던 중,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주인이다!”
“주인! 우리 좀 잠깐 숨겨줘!”
“제발! 땅에 묻어둬도 괜찮으니까! 성자가 돌아갈 때까지만!”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던 녀석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왔고,
“끼에에에에엥!”
“태양, 태양의 아들이다! 태양의 아들이 왔어!”
“아이고, 기어코 우리를 죽이려고!”
그 절박한 돌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돌격으로 변했다.
주인의 뒤에서 강렬한 태양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허, 저 존재들이 근심과 죄악입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맞습니다.”
그 와중에 성자와 태평스레 대화를 나누는 주인을 보니 배신감이 치솟았다.
주인이 우리를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