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8)
빙의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썩 좋은 내용이 아니라 일부러 보지 않던 문자를 실수로 눌러 버리고,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져서 어떻게든 답변을 해야 하는 아련했던 기억. 그럴 때마다 1을 다시 복구할 방법이 없나 고심하던 처량한 기억.
‘부수면 없던 일로 되려나.’
통신구를 벽에 던지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통신구가 박살나서 불가능했다고 할까? 그런데 괜히 그랬다가 더 골치 아픈 일로 돌아올 것 같고.
‘정보부장 개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부장이 나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내가 그쪽 가문이 해먹은 거 눈 감아 준 게 몇 번인데.
참담한 심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조심스레 통신구를 조작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마종공이 먼저 연락을 걸면 괘씸죄가 추가 된다.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마종공의 통신구로 신호를 보내며 점멸이 일어나는 통신구를 씁쓸히 바라봤다. 차라리 이대로 연락을 받지 않아서 문자로 남기고 싶다. 제발 받지 마라, 제발 받지 마라, 제발 받지 마라…
– 아가니? 오랜만이구나.
받아버렸네.
“크라시우스 가문의 후계자, 재무성 감찰부장 칼 크라시우스가 존귀하신 마종공 각하께─”
– 됐단다. 번거롭게 그런 인사는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마종공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끊었다. 마종공은 번거로운 절차나 예식을 귀찮아해서 인사조차 길어질 것 같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물론 공작의 허락 없이 임의로 인사를 짧게 하는 놈은 혀가 짧아질 테니 주의해야 한다.
– 우리 아가, 못 본 사이에 많이 맹랑해졌구나.
“송구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 들었단다. 숙녀의 사생활을 궁금해 했다면서?
정보부장 개새끼. 정말 다 얘기했구나… 고맙다, 내 입으로 말할 수고는 덜어줘서.
지금이라도 정보부장 가문을 다시 찔러볼까,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꿈틀거리는 사이 마종공은 백색의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정말 저 눈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홍채와 흰자의 구분이 어려워 조금 흠칫하기는 하니까.
그래도 눈의 주인이 미녀라 그런지 무섭기 보다는 신비로운 느낌이 더 강하다. 홍채가 완전한 백색보다는 은색에 가깝고, 동공도 하얘서 그런가. 그리고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던 마종공은 다시 입을 열었다.
– 감찰부로 갈 테니 기다리렴.
“예?”
잘못들었습니다?
감히 고귀한 공작의 말에 반문을 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만큼 마종공의 말은 당혹스러웠다. 감찰부로? 마종공이 직접? 아니, 애초에 난 아카데미에 있는데?
“제가 아카데미 파견 중이라, 안타깝게도 각하를 맞이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 그러니?
내 처량한 발버둥에 마종공은 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는 듯이.
– 그럼 아카데미로 가면 되겠니?
“하지만 각하께서 친히 오신다는데, 제가 감찰부로 가 각하를 맞이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 어쩜. 역시 아가가 내 생각을 많이 해주는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발버둥은 그저 발버둥에서 끝나버렸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달려오라는 우회적 발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차피 바로 굴복할 거면 왜 꿈틀거리냐는 마종공의 눈빛도 상당히 따가웠고. 슬픈 일이다.
– 본관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편하게 오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어디 이상한 곳으로 새지 못하게 직접 텔레포트 마법사를 보내서 잡아오겠다는 말. 무거운 배려에 감동 받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감히 우러러 보기도 힘든 공작 각하의 호출에는 버틸 방법이 없다. 심지어 업무에 영향이 덜 가도록 친히 텔레포트 마법사도 붙여주시는데 어쩌겠나. 다급히 교장과 교감, 빌라르에게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다고 연락을 돌렸다. 적어도 그 셋은 내 부재를 알아야 유사시 대처가 가능하니까.
그리고 본관에서 멍하니 마법사를 기다리자 허공에서 마법사가 튀어나와 내 앞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더 빨리 왔구나. 하긴, 네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운 공작의 지시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 같았겠지. 우리는 서로의 심정을 헤아리는 눈빛을 짧게 교환했다.
“부장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래.”
하지만 서로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업무로 만난 동지는 업무만 해결하고 헤어지는 것이 제일이니까.
봐라, 저 마법사도 재무성 청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만 숙이고 바로 사라지지 않냐. 용무만 해결되면 미련 없이 사라지는 것이 훌륭한 공무원이다.
‘여길 이렇게 다시 오네.’
그리고 홀로 남겨진 나는 재무성 청사를 말없이 올려다봤다. 아카데미로 떠날 때만 해도 빨리 돌아오고 싶었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오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가 나한테 원숭이 손이라도 선물했나. 소원은 이루어지는데 과정이 좀 지랄 맞네.
한숨을 내쉬며 재무성 청사로 들어가려고 하니, 마침 통신구가 화려히 빛을 뽐냈다. 시발, 이번에는 또 뭔데.
– 부장님! 큰일났습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2과장의 얼굴에 튀어나오며 다짜고짜 소리쳤다. 큰일? 2과장의 입에서, 큰일?
“너 이 새끼야! 이번에는 뭔 짓 했어!”
본능적으로 욕부터 박았다. 이미 마종공의 방문이라는 대형 사건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 2과장이 ‘큰일’이라고 인정하는 사건마저 겹치고 말았다. 심지어 차장을 거친 보고가 아닌 것을 보면 정말 시급한 일이라는 뜻인데.
– 아니, 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갑자기 마종공 각하께서 방문하신답니다! 정말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억울하다는 듯, 결백하다는 듯, 그리고 미치겠다는 듯 말을 내뱉는 2과장의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 겹친 게 아니구나. 내 일이었구나.
– 급하게 접대 준비 중인데, 이거 저희끼리 됩니까? 부장님이 오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미 왔다.”
– 예?
“나도 왔다고.”
잠시 침묵하던 2과장은 자력으로 진실에 도달했는지 다시 소리쳤다.
– 밖에서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2과장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었다. 미안하다, 진짜 미안하다… 시발, 나도 정보부장 그 새끼가 그럴 줄은 몰랐지.
마종공(魔終公), 베아트릭스 카토반 오브 세르베트. 제국의 다섯 공작 중 하나.
현 세르베트 공작의 칭호인 마종공은 마법의 끝에 도달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감히 다른 마법사는 언급할 수 없는 이름이지만, 마종공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마도강국인 유벤 연합왕국의 마법사들도 마종공에게는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니까.
사실 마종공과 비교 대상이 되는 것도 다른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마종공은 사람이 아니니까. 비유가 아니라 정말 사람이 아니다.
“우리 아가. 숙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신사의 예의가 아니란다.”
“죄송합니다, 각하.”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백발 사이에 쫑긋 솟은 두 귀. 카토반 공작가에는 엘프의 피가 흐르고, 마종공 역시 엘프 혼혈이다. 다양한 의미로 사람 새끼가 없는 공작 중, 종족의 의미로 사람이 아닌 것이 마종공. 물론 종족 뿐만 아니라 능력이나 성격도 사람 새끼가 아니긴 하다.
그런데 숙녀라고 하기에는 엘프 혼혈이라 나이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어르신에 가까운데. 다섯 공작 중 최고령이라는 철혈공도 어디까지나 비인간인 마종공을 제외해서 취급하는─
“앉으렴.”
“예.”
내 상념을 끊은 마종공의 말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분명 손님이 마종공이고 맞이하는 주인이 나지만, 공작이라는 이름은 그런 부질없는 관계를 역전시키기에 충분하다.
차장이 내려놓고 도망간 차를 마시는 마종공의 모습은 너무나도 느긋해 보였다. 적어도 본인 앞에 있는 가여운 공무원이 어떤 기분인지는 알아줬으면 하는데. 아닌가? 그냥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차만 마시는 게 마음에 편하려나?
“아가.”
“예, 각하.”
눈을 감으며 향을 음미하던 마종공이 백색의 눈을 다시 떠 나를 응시했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도 탁자에 내려놓고 깍지를 낀 것이 본격적으로 털, 아니 말을 하려는 모양.
“언제부터 감찰부가 공작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졌니?”
‘망할.’
각오는 했지만 시작부터 즉사 패턴급 공격이 나왔다. 명치쪽 꽉 찬 돌직구에 할 말을 찾지 못하자 마종공은 귀를 늘어뜨리며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우리 아가와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인 구애였던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구나.”
“각하께서 주시는 관심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가까이 와 보렴.”
손을 까딱이는 마종공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자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대충 알아듣고 고개를 숙이니 내 머리 위로 마종공의 손이 얹혀졌다. 뭐지? 이대로 전격 마법을 써서 구워버리겠다는 암시인가?
“내가 아가의 소식을 정보부장을 통해 듣는 게 가장 마음이 아팠단다. 이해하겠니?”
“예, 예. 물론입니다.”
“좋아. 앞으로는 조심하렴.”
말은 조곤조곤, 단순히 서운한 것처럼 말했지만 발언 하나하나가 주옥 같았다. 이리저리 수식했지만 결국 본인의 개인적인 정보를 정보부를 통해 알아내려고 한 개짓거리가 거슬렸다는 것.
그래도 전격 마법 대신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끝났다. 순간 개가 된 것 같았지만 다행이다. 아직 실험체를 날려버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니까. 오늘처럼 내가 마종공의 실험에 협조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진 적이 없다.
“내 고유 마법을 쓰는 아이를 봤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종공은 몹시 자비롭게도, 용서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의문도 풀어줄 모양인 것 같다. 오늘은… 운이 좋군…
“혹시 분홍 머리에 푸른색 눈을 가진 여자 아이니?”
“예, 맞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고유 마법을 가르친 상대라 그런지 외견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확실히 의도적으로 기른 제자인가? 루이제 같은 경우는 얼마나 더 있는 거지?
“사실 내가 눈물을 머금고 입양을 보낸 딸이란다. 무럭무럭 자란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예?”
예?
상상도 못한 출생의 비밀에 몸이 굳고 말았다. 아니, 단순히 제자여도 신경쓰이는 일인데 딸이라고…?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마종공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긴장한 것 같아서 농담 좀 해봤단다. 재밌었니?”
아.
“각하의 센스는 언제나 감탄스럽습니다.”
“후후, 그렇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짓는 모습에 나도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이를 푸짐하게 잡수신 이 어르신이 이상한 농담을 좋아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