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81)
로판 속 공무원 581화(582/945)
악신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여 성수로 바꿔버린 타니안은 제국 내에 위치한 성지들을 순례하기 시작했다.
제국 성지 순례가 끝나면 또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하던데, 자식들에게 축복까지 내려준 차기 성자라면 언제든 방문해도 좋은 귀빈이다. 감사함을 담아 진심 연회라도 준비하자.
‘그러고 보니 정령왕의 축복도 남았었지.’
낑낑거리며 몸을 뒤집는 세쌍둥이를 보니 문득 불의 정령왕이 떠올랐다.
공의회 직후 세계수의 신성이 더욱 강해졌을 당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엘프 주거 지구에 갔다가 불의 정령왕에게 세쌍둥이를 데려오라는 말을 들었었다. 자기가 나름 정령왕이니 축복 정도는 내려줄 수 있다면서.
아직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이들과 외출을 하는 건 마음에 걸려 미루고 있었지만, 조만간 이 아이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저택을 돌아다닐 터. 그때쯤이라면 외증손녀들에게 외증조모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외조모님은 세쌍둥이가 태어난 자리에 계셨지만, 당시 세쌍둥이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핏덩어리들이었잖나. 제대로 아이 콘택트를 해야 외증손녀들이 생겼다는 실감이 나시겠지.
“뺘아!”
그렇게 엘프 주거 지구에 갈 날짜를 생각하던 도중, 막 몸을 뒤집은 마리아가 빵싯 웃었다.
“우리 장녀, 이제 몸도 잘 뒤집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광경이라 슬쩍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 통통한 볼과 아기자기한 손. 도저히 만지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뱌우!”
허나 내 소소한 욕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리아 옆에서 눈을 깜빡이던 세실리아가 내 손가락을 낚아챘으니까.
조금 당황했다. 우리 차녀, 생각보다 손이 빠르구나.
‘좋은 현상이야.’
이윽고 흐뭇함이 몰려왔다. 세실리아가 나를 닮아 검사가 될지, 트릭시를 닮아 마법사가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루트를 택하든 빠른 손놀림이 중요하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역시 우리 딸이다. 벌써부터 고수의 자질이 보여.
“그래도 언니 거를 뺏으면 안 돼. 알겠지?”
“뱌우우우?”
내 작은 훈계에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워.’
가슴에 치명적인 모습이라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래, 이 아이가 뭘 알겠나. 그냥 아빠가 손을 내밀길래 좋아서 잡은 거겠지.
그렇기에 픽 웃으며 반대쪽 손을 마리아에게 뻗었─
“뺘!”
이번에는 카틀레아가 낚아챘다.
“…우으으…”
그리고 눈앞에서 아빠의 손길을 두 번이나 강탈당한 마리아는 웃음 가득했던 얼굴이 어두워지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원통하다. 어째서 사람의 팔은 세 개가 아닌 거지? 나처럼 세쌍둥이가 있는 경우를 대비해서 예비용 팔 한두 개 정도는 달려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인간의 진화 과정이 원망스럽다. 꼬리가 필요 없기에 퇴화한 것처럼, 팔 하나가 더 진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딸, 여기 좀 볼래?”
“후으으…?”
일단 급한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린 아기들은 이런 걸 좋아하더라.
“아우우!”
내 영혼을 담은 안면 예술에 울먹이던 마리아도 다시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내 존엄을 대가로 딸이 행복할 수 있다면 값싼 거래가 아닌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백 번이라도 버릴 수 있다.
“얘들아… 아빠 이제 힘들어…”
“아우!”
“뺘아아아!”
“부아우!”
“알았어, 계속 할 테니 화내지 마.”
하지만 안면 예술을 2시간이나 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역시 딸들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텨야겠지…
페디가 인색과 질투─ 아니, 이제는 자선과 친절이 된 두 짐승과 함께 저택을 질주하고, 세쌍둥이는 내 두 손과 얼굴을 보며 꺄르르 웃는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덧 알록달록 물든 단풍도 그 역할을 다한 듯 바닥에 몸을 뉘고, 추위가 살며시 노크를 하는 계절이 찾아왔다.
“확실히 배가 많이 부르기는 했어.”
“이제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배를 쓰다듬으며 헤헤 웃는 리제를 향해 마주 미소를 지었다.
벌써 가을이 절정에 이르렀다. 아니, 절정을 넘어 겨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는 리제가 만삭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에 돌입했고, 벚꽃이가 우리 곁에 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불편한 곳은 없지?”
“저는 괜찮은데, 벚꽃이가 빨리 나오고 싶은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요.”
그 말에 슬쩍 리제의 배를 매만졌다.
세쌍둥이 때는 애들이 안 나오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벚꽃이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아 다행이다.
“벚꽃이 생일은 페디하고 비슷하겠어.”
“페디는 마르 언니 생일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내년부터 이맘때가 되면 저택이 늘 소란스럽겠어요.”
“그런 소란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그러자 리제도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골치 아픈 일 때문에 소란이 생기면 끔찍하나,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소란은 기쁜 일이다. 아예 한 달을 통째로 ‘생일 축하의 달’로 삼을 의향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12개월 전부가 축하의 달이 될 것 같으니 자제하고 있다. 생일은 1년에 1번이기에 의미가 남다른 거지, 12개월 365일 내내 축하하는 건 좀.
“참, 그런데 오라버니.”
계속 배를 쓰다듬던 리제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곧 어머님도 막둥이를 낳을 때 아닌가요?”
“아, 그렇지.”
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둥이. 지금쯤 어머니 뱃속에서 성장을 마치고, 세상에 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우리 막내의 직관적인 태명.
‘왜 소식이 없지?’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어머니가 막둥이를 가진 시기는 리제가 벚꽃이를 가졌을 때보다 미세하게 빨랐다. 그러니 벚꽃이가 태어나기 전에 막둥이가 먼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슬슬 무언가 조짐이 보여야 정상 아닌가?
“…뭐, 예정보다 늦게 태어나는 경우도 있으니 기다리면 소식이 들리겠지.”
자그마한 불안감을 애써 무시했다.
그래,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다. 임신 기간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 막둥이가 벚꽃이보다 늦게 태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제 태어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도 없었다. 적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
부인의 배가 불러올수록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칼을 가졌을 때도, 에리히를 가졌을 때도 행복을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행복이라는 단어로도 내 심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다. 요즘만큼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것에 후회를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거 참, 크라시우스 가문이 진성 무골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크라시우스의 장손은 자기보다 어린 숙부를 두겠구만. 아니, 숙부가 아니라 고모일 수도 있겠어.”
그리고 나처럼 작위에서 물러나 백수로 지내는 게오르크와 발터는 나를 볼 때마다 놀리기 바빴다.
망할 것들. 친우의 경사를 축하하기는커녕 놀리는 것에 급급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 아닌가.
허나 반대의 입장이었으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 인내할 뿐이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실로 크라시우스 가문의 홍복입니다.”
어차피 가장 치명적인 것은 멀리 있는 친우의 시선이 아닌 가까이 있는 사용인들의 시선이었으니까.
내가 지나갈 때마다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가신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소근거리는 시녀들의 모습은 정신적 고통을 주기에 충분했다.물론 그들이 불충하고 무례하다는 건 아니나,그냥 민망했다. 이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고맙군. 전부 그대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가문의 경사를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가신, 사용인들에게 매정한 답변을 하는 건 귀족의 도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모든 축하에 적절한 답변을 해주었고,
“임산부에게는 두부가 좋다고 합니다!”
“녹색 잎 채소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입이 심심하시면 견과류를 드시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주변인들의 관심과 조언이 더욱 거세졌다.
정신이 없었다. 내 귀는 한 쌍인데 조언을 주는 입은 수십, 수백에 이르렀다. 그중 일부만 반영해도 부인은 하루에 여덟 끼를 먹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이미 자리에서 물러난 옛 주인들을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용인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부인은 그러한 관심에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이 관심이 그동안 크라시우스 가문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증거이며, 막둥이가 사랑을 받으며 자랄 증거라고.
“내 생각이 짧았군. 부인의 말이 맞소.”
그래서 나 역시 관심을 즐겁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면 즐기는 것이 옳으니.
그렇게 하루, 일 주, 한 달이 지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되었다.
“흐으윽…!”
“부인!”
막둥이가 우리 곁으로 다가올 때가 되었다.
“다들 당황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 움직여라!”
부인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자 시녀장이 시녀들과 하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머리가 새하얘진 나와 달리 재빠른 반응이었다. 시녀장이 없었다면 아직도 끙끙거리는 부인을 방치하고 있었겠지.
“비, 빌리…”
“마, 말하시오! 나 여기 있소, 부인!”
“칼과 에리히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괜히 걱정만 할 거예요.”
“뭐?”
예상치 못한 부탁이라 멍하니 부인을 바라봤다.
“처음 낳는 것도 아니고… 금방, 무사히 끝날 거예요. 그 아이들에게는 걱정이 아닌 기쁜 소식만 들려주고 싶어요…”
하지만 희미한 미소를 짓는 부인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
페디와 놀아주는 사이에 막냇동생이 생겼다.
유모의 말을 들어 보니 진통부터 출산까지 딱 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게 뭐야.’
당황스러워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르와 트릭시가 출산할 때는 거의 밤을 새워야 했는데, 고작 2시간 만에 아이가 나왔다고?
‘경험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실로 경이로운 속도다. 혹시 어머니가 노산으로 잘못되시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어.
…
‘막내가 태어나는데 옆에 있지도 못했네.’
뭔가 세상에 둘도 없을 불효자로 전락한 것 같다.
부모님이 고의로 부르시지 않은 거지만, 그래도 기분이 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