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87)
로판 속 공무원 587화(588/945)
황태녀의 돌잡이 과정에서 내 미래가 확정되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돌잡이는 아기의 미래를 엿보기 위한 행사인데, 왜 내 미래를 본 거지?
“황태녀가 장관을 잡았으니 황태녀는 장관의 헌신적인 보필을 받는 황제가 되겠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황제가 돌잡이가 끝난 직후에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존엄한 인간인 나를 돌잡이 물건 취급하던 그 흉악함. 본인은 죽거나 은퇴로 물러났을 시점에 ‘당연히’ 나는 일하고 있을 거라 단정 짓는 무자비함.
원통했다. 황제가 나보다 연장자인 건 맞는데, 그래봤자 몇 살 차이도 안 난다. 황태녀가 황위를 이을 시기면 나도 오늘내일…
오늘… 내일…
‘시발.’
나 자신을 속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수명이 늘어난다면 오늘내일이라는 표현은 쓰지 못한다. 황태녀가 즉위할 즈음이면 내 나이도 대충 70이나 80 정도 일 테니, 트릭시의 혼혈 엘프 계산법에 의거하면 대충 14살에서 16살 정도 아닐까?
와, 16살!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시점보다 어리다!
‘…황태녀만 섬기고 끝나면 선방한 거지.’
사실 천년이나 이어진 뮤노, 트리카, 아펠스 제국이 이상한 거지, 보통 왕조의 수명은 수백 년 정도다. 500년은커녕 300년도 가지 못한 채 단절된 왕조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20대인 내가 400살이나 500살까지 산다? 리브노만 황실이 먼저 몰락하느냐, 내가 먼저 죽느냐 좋은 승부를 낼 수 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옹졸해지네.
‘어떻게든 황태녀 즉위 기간 내에 합법 은퇴한다.’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황실의 마지막과 함께한 충신(강제)가 되기 전에 은퇴하겠다고. 내 남은 수명 전부를 공무원 생활에 투자할 일은 없을 거라고.
물론 나 홀로 은퇴가 아니라 부부 동반 은퇴를 할 것이다. 아내가 일하는데 남편이 노는 건 많이 기둥서방 같잖아.
“짐은 장관이 오래오래 살아서 우리 손주도 돌봐줬으면 하네.”
그렇기에 황제가 했던 저주는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세 명의 황제를 섬긴 신하도 아닌 네 명의 황제를 섬긴 신하가 될 수는 없다.
연이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내 휴가는 약 2년째 이어지고 있다.
공의회 초청이나 레온 왕국 파견 같은 변수 덕에 휴가 중 출장이라는 기괴한 상황과 마주하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내 휴가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길고 긴 휴가를 깨고 감찰성 청사에 출근해야 할 때가 왔다.
“이 서류들이 각하께서 직접 결재하셔야 하는 것들입니다.”
감찰성이 공식 출범하고 약 1년.
그 1년 동안 처리한 업무 중 장관이 직접 결재해야 하는 서류들이 가득 쌓이고 말았다.
“많기도 하네. 선별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는 장관 비서로서 훌륭히 감찰성을 이끌어가는 차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얼굴만 봐도 흐뭇하다. 장관이 부서 창설 이후 단 한 번도 출근한 적이 없는 미친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틴 내 보물.만약 황제가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 명령을 내린다면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할 부서의 기둥.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차장─ 아니, 비서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업무 중 과로사했을 거야.
“각하께서 저를 믿고 모든 권한을 맡겨주신 덕에 수고로울 것도 없었습니다.”
내 토닥임에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겸손을 표했다.
감동했다. 내가 비서였다면 비서에게 모든 걸 맡기고 떠난 장관 새끼 명치 한 번 후려치는 게 소원이었을 텐데.
‘부하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비서와 피네, 5과장을 보면 부하 운이 나쁜 건 아니다.하지만 고개를 돌려 2과장과 3과장을 보면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선녀 같은 부하가 있기에 사탄 같은 부하도 있다. 실로 극강의 황금 밸런스라고 할 수 있다.
…
‘이제 과장이 아니지 참.’
뒤늦게 위화감을 눈치챘다. 5과장을 집행차장으로, 2과장과 3과장을 정보차장, 집행부장으로 승진시킨 장본인이 나다. 그런 내가 아직도 그 녀석들을 과장이라 칭하고 있다.
이게 의식하면 현 직책으로 부르게 되는데, 아무래도 감찰성 창립 이후로 출근을 하지 않다 보니 감찰부 시절 직책이 익숙하다. 이러다 공식 회의 때도 걔네를 과장이라 부르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한창 간부로서 권위를 세워야 할 때에 상사가 직책을 깎아 부르는 건 실례인데.
‘그 녀석들은 오히려 좋아하려나?’
생각해 보니 그 탈주 닌자들은 내가 직책을 깎아 부르면 기회다 싶어 스스로 내려갈 놈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무조건 현 직책을 불러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구쳤다. 내 혀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는 부장이고 차장이다.
“그러고 보니 각하.”
“어, 말해.”
비서의 부름에 상념을 끊고 대답했다.
“신년하례식 전에만 처리하면 되는 것들이니, 급하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말에 슬쩍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적은 양은 아니지만 약 1년 동안 쌓인 분량인 것을 고려하면 양호한 편이다. 며칠 정도만 빡세게 몰두하면 여차저차 수습할 수 있으니 길게 끌 필요도 없다.
“됐어. 미리 처리하는 게 낫지.”
“오늘부터 결재하시는 건 힘들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응?”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하게 되었다.
저 너머에서 우다다다 달려오는 발소리. 노크 없이 거칠게 열리는 장관실의 문.
“장관니이이이임!”
야생의 에리가 쳐들어왔다.
“드디어 장관님이랑 근무 데이트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근무라는 단어랑 데이트라는 단어가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나?
“저 결혼식 전까지 쓸쓸히 일만 하고, 결혼식 당일에야 겨우 신랑 얼굴 보는 신부가 될 줄 알았다고요!”
“아니, 너 퇴근하면 무조건 우리 집에 오잖아!”
예비 남편을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발언이라 격렬히 항의했다.
내가 요 1년 동안 감찰성 청사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건 맞다. 휴가 중에 청사에 발을 들이면 ‘온 김에 일이나 하고 가라.’ 라는 황명이 내려올까 두려웠거든.
하지만 에리랑 피네는 퇴근하면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곧장 저택으로 왔다.비록 막 출범한 부서라 퇴근이라는 개념이 희미할 뿐, 시간이 난다면 언제나 나와 함께 했다.
그러니 예비 아내를 방치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심각한 음해다. 내가 그 정도로 감정도 염치도 없는 새끼는 아니다.
“그치만! 기껏 저택에 가면 저녁 시간이고! 저녁 먹으면 데이트하러 나가자고 하기도 애매하고! 잠깐 대화 좀 하면 금방 잘 시간이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출근이잖아요!”
물론 에리는 내 항의 따위에 물러설 소인배가 아니다. 도리어 빼액 소리치며 그동안 서운했던 것들을 토로하기 바빴다.
“불공평해! 언니들이랑 동생들은 오붓하게 저택에서 데이트하는데! 맨날 나랑 피네만 하루 절반 이상은 따로 지내잖아!”
어느새 바닥에 드러누워 버둥거리는 에리의 모습에 이마를 짚었다.
흉하지만 애잔하고, 안타깝지만 부끄럽다. 에리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저 행동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저 부끄러운 모습조차 내 부인의 일부인데. 남편인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가 받아주겠어.
‘곧 에리랑 식을 올릴 차례기도 하고.’
어느덧 경사에 경사가 겹쳤던 11월이 지나 12월이 되었다. 여기서 한 달만 더 지나면 에리와 결혼식을 할 시기가 된다.
그리고 결혼식을 코앞에 둔 예비 신부가 신랑과의 추억이 너무 없는 건 가혹한 일이다.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준다고 약속해요! 서류에 서명할 때도 나 무릎에 앉히고─”
“같이 제도 데이트라도 하자.”
“…넹?”
내 말에 진심 버둥거리기를 하던 에리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데이트하자고. 정보부장한테는 내가 승인했다고 할 테니, 휴가 1일 치 사용하고.”
“지, 진짜요?”
“거짓말이었으면 휴가 쓰라고는 안 하지.”
내가 휴가에 진심이라는 걸 아는 에리기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오늘은 감찰성 선배로서 처음 출근한 장관님을 도와주려 했지만~ 사랑스러운 연인이랑 데이트가 하고 싶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요! ”
스르륵 몸을 일으킨 에리는 가슴을 내밀며 으스댔다.
그 모습을 보니 ‘사실 거짓말이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랬다가는 내 예비 부인의 밑바닥까지 보게 될 것 같아 참았다.
“야, 잠깐만.”
“왜요? 저 빨리 휴가 신청서 써야 되는뎅.”
“먼지는 털고 가야지.”
장관실을 뛰쳐 나가려던 에리의 어깨를 잡고 등을 털어줬다.
아무리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막 사는 에리라지만, 등으로 바닥 청소를 한 것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돌아다니게 하는 건 좀.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보부 집무실로 달려갔다.
“정보차장님!”
그리고 활기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내가 징그러우니까 님자는 붙이지 말라고─”
“저 휴가 쓸게요!”
고속으로 휘갈겨 쓴 휴가 신청서를 정보차장에게 던졌다.
그러자 차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마 전에 신혼-육아 휴직이 끝나서 업무에 복귀한 사람에게 휴가 신청서를 던지기. 이 얼마나 즐겁고 멋진 행동이람.
“아, 장관님이 승인하신 거니 따로 수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러면 나한테는 왜 준 거야!”
“보고 열받으라고요!”
당당한 대답에 차장이 뒷목을 잡았다.
신기하다. 장관님이 부장이던 시절에도 가끔 저런 모습을 보였는데, 부장급이나 차장급 관료가 되면 저렇게 변하는구나?
‘난 평생 과장으로 지내야지.’
내 남편이 장관이고 언니가 공작인데 직책이 무슨 소용이야. 처음에는 나만 빼고 다 승진시킨 장관님한테 조금, 아주 조금 서운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한 배려였다.
과장이면 적당히 간부 대우를 받되 책임질 건 상대적으로 덜하고, 업무에 갈리는 강도도 약하잖아.
‘과장이 최고야.’
파들거리는 차장을 흡족한 마음으로 보다가 몸을 돌렸다.
휴가 신청서도 제출했으니 이제 정말 데이트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