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88)
로판 속 공무원 588화(589/945)
감찰성 정식 출범 이후로 처음 감찰성에 출근한 장관.
그 장관이 약 1년 만에 행한 역사적인 첫 업무는 무려 부하와의 데이트였다.
‘이게 맞는 건가.’
뒤늦게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비서가 유능하고 믿음직하며 완벽한 공무원이라도 명목상 상사인 내가 부하와 데이트를 즐기는 게 맞는 건가? 그것도 일거리가 쌓인 상황에서?
다행히 비서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이해했는지 신년하례식 전까지 처리하면 된다고 했으나, 상대가 이해해 준 것과 내 마음속 삼각형이 움직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미안하다.’
지금도 열심히 업무 중일 비서를 떠올리며 속으로 사과했다. 나 혼자 꿀을 빨아서 미안하다고.
그러니 돌아가면 꼭 보상을 주자. 휴가─ 는 솔직히 무리지만, 연봉의 배가 되는 보너스는 얼마든지 지갑에 꽂아줄 수 있다. 나중에 비서가 작위를 계승 받으면 꼭 계승식 자리를 빛내주고, 영지 운영 관련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인적,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지원할 용의가 있다.
그래, 휴가만 빼면 모든 걸 줄 수 있다. 비서는 나의 빛이며 희망이니까.
“히힛.”
그렇게 비서에게 줄 선물 꾸러미를 생각하는 사이, 에리가 히죽 웃으며 팔짱을 꼈다.
“오늘 하루는 저랑 같이 노는 거 맞죠?”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비서에게 보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신경 써야 하는 건 에리와의 데이트다. 죄책감에 눈이 멀어 그 당연한 걸 잠시 잊고 말았다.
“자정 지나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알차게 빨아먹어.”
“싫어요! 하루가 아니라 24시간은 같이 있어줘야죠! 내일 출근 전까지 저랑 같이 있어요!”
“입 조심.”
당당한 초과 근무 요구에 입술을 잡아당겼다.
‘아아…’
손가락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그리운 감각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이 촉감을 즐기지 못해 얼마나 서운했던지.
“으브으으읍!”
정작 봉변을 당한 에리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반항했지만, 딱히 진심이 담긴 반항은 아니었다.
얘 아무리 봐도 이거 즐기는 것 같아.
데이트를 시작하자마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장관님.”
“응.”
“저희 이제 뭐해요?”
“그러게.”
나도 에리도 어디를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난관에.
데이트 경험이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모태 솔로인 에리와 달리 나는 아카데미 감찰관 시절에 연인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고, 최근에도 트릭시와 신성교국 관광을 하지 않았나. 횟수가 그리 많지 않을 뿐이지 데이트 경험은 확실히 존재한다.
허나 ‘제도에서’ 하는 데이트는 처음이다. 분명 나와 에리는 집이 제도에 있는 데다 근무지도 제도지만 막상 제도에서 놀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야 퇴근을 하면 집에 가서 쉬기 바쁜데 놀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게다가 정시 퇴근이라는 개념이 희미하고, 재수가 없으면 퇴근 자체를 못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노는 건 사치였지.
덕분에 이 드넓은 제도에서 어디를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수학여행 때는 몇 주 전부터 여행지를 공지했으니 미리 계획이라도 짰었는데.
‘골치 아프네.’
그렇다고 무작정 제도를 돌아다니며 끌리는 곳에 방문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단 귀족이 뚜벅뚜벅 걸어서 데이트를 즐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국의 심장이자 대륙의 중심인 제도를 거니는 것은 무엇보다 귀족다운 행동이니까. 우리를 보고 귀족의 품위를 지키지 못한다며 수군거릴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소속이 감찰성이잖아. 대낮부터 감찰성 장관과 과장이 뽈뽈뽈 돌아다니면 기습 감찰이 아닐까 제도의 상점들이 두려움에 떨 거다.
‘지금이라도 동선부터 짜야 하나?’
이제 와서 동선을 짜면 시간이 낭비되나, 짜지 않고 돌아다니면 하루가 날아간다. 아쉽지만 지금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아, 잠깐만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에리가 품속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 예, 정보차장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차장의 얼굴이 나왔다.
“차장님! 저예요!”
– 이런 씹, 뭔데 또.
급격히 인상을 찌푸리는 차장이었으나, 에리는 언제나 그렇듯 아랑곳 하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저 장관님이랑 오붓~한 데이트 즐기려고 하는데, 왕년 솜씨 살려서 추천 동선 좀 보내주세요.
– 야 이, 내가 지금 한가한 줄 알아!
“부인께서 아직 차장님 전전전전 애인이랑 있었던 일은 모르죠?”
– 너 휴가 신청할 때부터 완벽한 동선 짜느라 바쁘지. 10분만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이 새끼. 카사노바 시절의 업보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구나.
“10분만 기다리면 된대요!”
“응. 잘 됐네.”
해맑게 웃는 에리의 모습에 어색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이 끊기기 직전, 피눈물을 흘릴 기세로 입술을 깨문 차장의 얼굴을 보고 말았으니까.
‘그러게 왜 그랬어.’
여자 관계가 복잡해도 어지간히 복잡했어야지. 그렇게 화려하면 나도 뭐라고 두둔할 수가 없잖아.
그래도 부인인 크리스티나가 정보차장의 화려한 과거를 알면서도 결혼을 택했으니 다행이지만.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미 차장의 과거를 아는 크리스티나인데, 그런 크리스티나에게 들키는 걸 꺼려하는 과거가 있다고?
‘애라도 가졌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털어냈다.
그 새끼가 화려한 여자관계를 자랑해도 선을 넘는 놈은 아니다. 선을 조절하지 못했다면 이미 복부에 칼빵을 맞았거나 가문 차원의 보복이 있었겠지.
그래서 더 궁금하다. 사교계를 헤집고 다녔던 생태계 교란종이 숨기고 싶어 하는 과거는 뭘까.
“에리.”
“넹?”
“무슨 일이 있었길래 쟤가 저렇게 기겁을 하냐?”
그 말에 에리는 히죽 웃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차장이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그 위기를 넘겨서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정신승리 중이기는 한데, 현 부인 앞에서 다른 사람과 결혼할 뻔했다는 말은 하기 힘들죠.”
생각 이상으로 별거 아닌 일이라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걱정했네. 망할 놈.
***
정보차장이 보낸 동선은 숙련된 연애 전문가답게 완벽했다.
가게에서 가게로 이동하는 동안의 풍경, 각 가게의 특성과 분위기, 식당이나 카페에 들르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운 메뉴까지.
‘이래야 열 명이 넘는 사람이랑 어울릴 수 있는 거구나.’
감탄스럽지만 딱히 본받고 싶지는 않다. 나한테는 오직 장관님만 있으니까.
“여기에 이런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네.”
장관님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뻔한 표현이지만 차장이 보낸 동선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가 많았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가게가 그랬다. 우리의 데이트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며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솔직히 놀랍기는 하다. 벌써 세 시간이나 돌아다녔는데 만난 사람이 두 자릿수에 불과하다. 다른 곳도 아닌 백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제도에서.
‘결혼해서 다행이야.’
차장이 기혼자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사람이 아직까지도 사교계를 들쑤시고 다녔다면 얼마나 많은 영애들이 눈물을 흘렸을까.
예전에는 차장에게 홀린 영애들의 책임이라 생각했지만, 나도 장관님과 연인이 되고 나니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장관님이 나를 더 이상 만나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한다면 가슴이 찢어졌을 테니까.
“장관님.”
“응?”
“장관님은 차장처럼 되면 안 돼요.”
그러자 장관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걔처럼 되는 건 작정하고 노력해도 안 돼.”
설득력이 넘치는 말이라 납득했다. 그 경지는 단순히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하늘이 내린 뻔뻔함과 지하에 처박힌 양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장관님은 정보차장과 달리 한 명을 만나다 다른 한 명으로 갈아타는 사람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전부 만날 사람이지.’
내가 잠깐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미 부인만 넷, 예비 부인은 둘인 사람이 차장처럼 변할 리가 없잖아. 오히려 차장이 장관님처럼 되는 걸 경계해야지.
“이제 다음 장소로 갈까?”
“아, 넹! 다음은 극장이에요!”
장관님이 뻗은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장소는 은퇴한 상단주가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들었다는 극장. 상당한 연기력과 스토리를 자랑하나, 딱히 홍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구석에 처박혀서 극소수의 손님을 대상으로 연극을 펼치는 기묘한 곳.
[ 극장은 마지막에 방문할 것. ]그리고 차장이 몇 번이나 강조하며 반드시 마지막에 방문하라고 한 장소.
솔직히 차장이 강조할수록 가장 먼저 방문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상대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걸 뒤엎는 재미도 쏠쏠하잖아.
하지만 이번 제도 데이트는 차장에게 신세를 진 것이니 철저히 차장의 제안에 따를 필요가 있다. 기껏 차지한 장관님과의 하루를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으니.
‘…그래봤자 연극인데.’
의아하면서도 기대된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차장이 마지막의 마지막 일정으로 두라고 신신당부를 한 걸까.
극장에 도착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방.
‘이래서였구나.’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차장의 강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순수한 극장이 아니네.’
넓직하면서도 화려한 내부.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걸 볼 수 있는 거대한 유리창.
그러나 방 안에서 밖은 볼 수 있어도,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는 재질.
한 번 문을 닫으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철저한 잠금 장치까지.
‘그렇고 그런 곳이었어.’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건 오직 연극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지만, 연극에 관심을 끈다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둘만의 공간이 완성되는 거다.
오직 나와 장관님. 오직 둘만의 공간. 오직 우리를 위한 장소.
“허, 참.”
슬쩍 장관님에게 시선을 돌리자 헛웃음을 흘리는 장관님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다. 이미 네 명이나 되는 부인과 깊은 관계를 지닌 장관님이니 싫어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좋아.’
불끈 주먹을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들어올 때는 둘이었지만, 나갈 때는 셋이 될 수 있게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