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89)
로판 속 공무원 589화(590/945)
예정에 없던 외박을 하고 말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연극이 끝난 뒤 적당히 야경을 즐기다 복귀해야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에리의 야망처럼 출근 직전까지 있어주고 싶었지만, 정상 출근을 해야 하는 에리에게 밤샘이라는 부담을 줄 수는 없잖아. 에리가 나처럼 며칠 정도 밤을 새도 문제 없는 체력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저택에 있는 부인들에게는 밤에 돌아간다고 말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거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다가 픽 웃고 말았다.
방에서는 바깥의 연극을 볼 수 있지만, 바깥의 배우들은 절대 내부를 볼 수 없는 구조. 심지어 방 안에 누군가 들어가면 절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는 잠금장치.
혹시 몰라서 방 내부를 살펴보니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기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손님들만의 시간을 위하여 마련된 공간.
‘미친 놈.’
어이가 없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데이트 동선이 완벽한 건 만족스러우나, 설마 상사의 데이트에 이런 장소를 넣어버릴 줄은 몰랐다.
아니, 그보다 여기는 대체 어쩌다 알게 된 거야. 아무리 정보차장이 감찰부 시절부터 정보 담당이었어도 이건 좀.
‘기혼자라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제도의 골목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꿰고 있는 카사노바. 상상만 해도 두려운 존재다. 만약 그 새끼가 여전히 영애들을 건드리고 다녔다면 얼마나 많은 영애들이 눈물을 흘렸을까.
그렇기에 그놈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를 애지중지하는 장관은 제국 영애들의 구세주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될 거악을 봉인한 성검이다.
내가 장관에게 구세주나 성검 같은 극찬을 날릴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그렇다.
“끄으응…”
“깼어?”
침대 쪽에서 들리는 웅얼거림에 고개를 돌렸다.
새벽까지 몇 번이나 기절했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에리다. 지금이 일반적인 기상 시간인 건 맞으나, 더 쓰러져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여, 여기 어디에요?”
그리고 멍하니 눈을 깜빡인 에리는 휙휙 고개를 돌리더니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지. 설마 기억이 날아간 건가?
“아.”
다행히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던 것뿐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리멍덩하던 눈에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정신 좀 들어?”
슬쩍 침대에 걸터앉자 에리는 흠칫 몸을 떨더니 헤헤 웃음을 흘렸다.
“저 아직도 허리 아픈뎅…”
“처음에는 다 그래.”
그나마 하루로 끝나서 바로 몸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거고.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는 말이기에 에리의 허리를 가볍게 주물러줬다. 이게 워밍업에 불과하다는 것 정도는 결혼식 이후에 자연히 깨달을 테니.
“그래서, 어땠어 누나?”
내 놀림 섞인 질문에 에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애처로운 시선 회피지만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누가 먼저 도발하래?
“우리 지금은 장관이랑 과장이 아닌, 연인으로서 데이트하는 거 맞지? 오늘 밤은 이 누나가 알아서 다 할게!”
우리가 들어온 곳이 단순한 극장이 아닌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걸 파악하자마자 도발을 날린 에리. 나보다 작은 주제에 나를 침대로 밀어 눕히려고 끙끙거린 에리.
그리고 자기가 연상의 매력을 보여주겠다며, 트릭시를 자연스레 제외하는 망언을 내뱉었던 에리.
“난 나보다 약한 누나 말은 안 들어.”
실로 건방진 행동이었기에 역으로 에리를 침대에 눕혔었다.
어딜 모태 솔로 주제에 알아서 한다며 까불어. 결혼 경력만 네 번인 스페셜-리스트 앞에서.
“떽! 누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허나 일반인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에리기에 내 위협 아닌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었다.오히려 데이트라는 기회, 둘만 있는 방이라는 환경을 틈타 우리의 관계를 누나, 동생으로 확정 지으려는 것 같았지.
그럴싸한 계획이다. 에리가 나보다 연상인 건 맞고, 지금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도 맞으니까. 에리 나름대로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나온 적절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획만 좋았다.
“누나가 알아서 한다니까! 동생이 왜 말을 안 들어!”
“누, 누나 말 좀 들어주지 않을래? 지금 사과하면 용서해줄게!”
“누나가… 누나가 잘못했어…!”
“흐이이익! 장관니이이임!”
애석하게도 계획이 언제나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건 에리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계획과 정반대로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에리는 추하게 타협을 갈구하였고,
“동생이 알아서 할 테니 누나는 가만히 있어.”
난 마지막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당연히 후회는 없다. 남을 이기려고 했다면 자기가 질 각오도 했어야지.
“장관님.”
“왜 오빠라고 안 부르냐. 섭섭하게.”
“휴가 끝났거든요! 이래 봬도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한다고요!”
삐졌다는 듯 볼을 부풀리는 에리의 모습에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장난처럼 말하고 있지만 정말 에리는 놀라울 정도로 공사구분이 철저하다. 옛날부터 후작가의 영애, 황후의 친한 후배, 감찰부의 간부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지만, 그 직함을 내세워 사리사욕을 채운 적은 없다.
그냥 사리사욕을 채울 시간에 지하실에서 취미 활동을 하거나 나를 놀리는 데 주력했을 뿐.
“으브으으으읍!?”
“미안. 잠깐 짜증나는 일이 생각나서.”
어느새 내 손이 에리의 입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조금 억울한 감정이 들었으니까.
사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지능과 눈치가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렇게 화려한 모습만 보인 건데.
“이제 어떻게 할래?”
씁쓸한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애써 참으며 입술을 놓아줬다.
이제 아침이니 극장(인 척하는 호텔)에서 나가 출근을 준비해야 한다. 빈속으로 출근하기는 힘드니 식사 시간까지 계산해야 하고.
그러니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다. 평범하게 데이트를 끝내고 출근을 준비하거나,
“휴가 하루 더 쓸래?”
휴가를 연장하거나. 이왕 놀기 시작한 거 며칠 정도 더 노는 건 문제 없지.
“으으으음…”
내 제안에 에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의외다. 솔직히 망설이지 않고 휴가 연장을 택할 줄 알았는데.
“그냥 돌아가요. 피네가 일하고 있는데 혼자 즐기기는 미안해서.”
이윽고 머쓱한 미소를 짓는 에리의 머리를 조심스레 토닥여줬다.
얘가 평소에 기행을 저질러서 그렇지 가족이나 친구한테는 상냥한 게 맞다. 마음씨도 은근히 드넓고.
“결혼하면 질릴 때까지 놀자.”
그러니 에리와 합법적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오면 제발 떨어지라고 할 만큼 놀아주자. 넉넉하게 열흘에서 보름이면 충분할 터.
“그래요? 기대할게요!”
내 선포에 에리는 히죽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고작 하루 데이트치고는 나름 괜찮게 끝난 데이트였다.
출근하자마자 어제 비서가 보여줬던 서류를 확인했다.
[ 북방 지역 내 핵심 자원 관리안. ] [ 레온 왕국 주둔군 지원안. ] [ 본토 내 정보원 재배치 및 충원 계획서. ]‘와.’
서류 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은 제목을 달고 있는지라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 정도 되는 사안이면 장관의 직접 결재가 필요하기는 하지.
‘업무 범위도 많이 늘어났네.’
그리고 서류를 읽자마자 감찰부 시절보다 책임져야 할 것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찰부 때는 제국 내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 자원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물량 조작은 없는지, 유통하는 과정에서 밑장빼기가 없는지 감시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제 감찰성 휘하에 정보부가 있어서 그런지, 제국 내의 주요 자원들을 전부 파악하라고 한다. 자원이 어디에 매장되어 있는지, 매장 추정량은 어느 정도인지, 개발권 입찰을 위해 누가 개입하고, 어느 세력이 결합하는지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을.
‘특무성은 이런 일들을 하고 지냈구나.’
갑자기 특무성 장관이 존경스러웠다. 감찰성 출범 이전에는 특무성이 국내와 해외 정보를 담당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걸까. 국내만 담당해도 이렇게 일이 많거늘.
‘내가 아니었어도 언젠가 감찰성이 출범했겠어.’
지금까지는 상황이 나를 알뜰하게 써먹기 위해 감찰성 출범을 명한 거라 생각했다. 인재를 영혼까지 갈아버리는 걸로 유명한 상황이니까 그럴 듯한 추측이기는 했다.
하지만 특무성의 과중한 업무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감찰부가 성으로 승격했을 거다. 나는 단순히 재수 없게, 너무나도 재수 없게 그 시기에 감찰부장이었던 거고.
‘장관이 감찰부장으로 남았어야 했는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장관이 감찰부장, 내가 4과장으로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최선의 인선이었다.
허나 그 최선의 인선은 황제의 기습 승진으로 인해 무너졌다. 부장과 과장으로 그쳐야 했던 인물들이 장관, 부장까지 갔다.
‘황제 개새끼.’
결국 돌고 돌아 황제가 원흉이다. 역시 내 인생 중 꼬인 게 있으면 열에 아홉은 그 새끼 탓이야.
‘…응?’
그렇게 착잡한 심정으로 서류를 결재하던 중, 익숙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차기 성자 타니안 에네스의 성지 순례 호위 및 인파 통제 진행안. ]‘이게 왜 감찰성 관할이야.’
실소가 나올 뻔했다.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영주나 지방관, 제국 영토 전체를 관할하는 국토성, 혹은 호위 전력을 구성하는 전쟁성에서 처리하면 될 일이 감찰성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인력이 부족한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북방이 제국의 영토에 편입되어 북방 방면군의 부담이 대폭 줄어든 이후로 제국 전역에는 나름 여유로운 병력 배치가 가능했다. 고작 호위 업무가 추가됐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다.
“비서.”
“예, 각하.”
“성지 순례 중에 이상한 일이라도 생겼나?”
그렇기에 옆에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혹시 타니안이 무슨 사고라도 쳤느냐고.
“차기 성자께서 단순히 성지 순례에 그치지 않고, 각지의 고아원을 방문하고 계십니다.”
듣기만 해도 호위 병력이 피를 토할 수밖에 없는 일정이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성지만 순례하는 게 아니라 고아원도 순례 중이구나.
‘하여간 종잡을 수가 없어.’
사유를 알았기에 망설임 없이 서명을 했다.
무려 차기 성자가 제국의 고아들을 돌보는 중이니 제국의 공무원으로서 협조해야 한다. 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준 사람이니 아비로서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니 호위나 통제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주자.어차피 현장에서 구르는 건 내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