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91)
로판 속 공무원 591화(592/945)
황태녀가 준 초콜릿에 영구 보존 마법을 건 날로부터 며칠 후. 황제의 소환령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잠깐 움찔했었다. 내가 황태녀에게 초콜릿을 받았던 당시, 원독에 찬 황제의 눈빛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으니까.
하지만 이내 불안한 생각을 털어냈다. 황제가 감정을 담아 나를 굴린 경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해야 하는 일을 만들어서 괴롭힌 적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일거리를 투척해서 문제지.
그렇기에 안심할 수 있다. 황제가 나한테 투척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요 며칠 동안 밀린 서류를 결재하며 국내 정세도 파악했지만 몇 번을 봐도 내가 나설만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외도 별 소란이 없었지.’
그나마 유의할 점이 있다면 타니안의 성지 순례 정도인데, 이건 이미 호위 및 인파 통제 지원안에 서명을 하지 않았나.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황태녀에게 사정사정한 덕분에 초콜릿이라도 하나 받았나 보지. 그걸 나한테 자랑하기 위해 소환했을 거다. 분명 그럴 거다.
“아무래도 장관이 성지 순례단에 합류해야 할 것 같네.”
분명 그래야만 했다.
‘꿈인가?’
순간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왜 거기에 합류해. 난 이미 감찰성 최고 결정권자로서 성지 순례단에 지원 인력을 보냈다고.
“폐하. 귀빈들을 걱정하는 폐하의 마음은 소신도 알기에 이미 용맹하고 유능한 자들을 성지 순례단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니 염려마시고─”
“그것과 별개로 장관이 가야 하네.”
내 말을 단호히 끊은 황제의 모습에 손이 허리춤으로 갈 뻔했다.
참자. 내 앞에 있는 새끼는 적이 아니라 그냥 개새끼다. 반으로 갈라서 죽여야 할 숙적이 아닌 그냥 개새끼야.
애초에 검도 안 차고 있으니 허리춤까지 손이 갔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장관. 진정하고 일단 내 말부터 들어보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빛이 반역자의 눈으로 돌변했는지, 황제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짐이 아니라 나라고 표현하네. 이 개 같은 거.
‘또 감성팔이하려고.’
이미 레온 왕국 파견 때 당한 수법이라 빡침만 몰려왔다.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 놈으로 보이냐.
“원래 나도 장관을 보낼 생각은 없었어. 아니, 정확히는 보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말한 황제는 옆에 있던 서류를 건넸다.
순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기서 급발진을 하면 오히려 황제에게 짬처리를 당할 명분을 주는 거다.
“차기 성자가 연말 예배를 진행한다고 하더군. 신성교국의 고위 인사가 제국 내에서 예배를 연다면 제국도 그에 상응하는 고위 인사를 보내 화답하는 것이 관례일세.”
그건 나도 아는 내용이라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과 교단의 관계는 건국 시기부터 돈독했다. 그래서 성지 순례단의 활동에 불편함이 없게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고, 차기 성자가 진행하는 예배에 제국 고위 인사를 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제국과 교단의 우호를 과시하는 것이니.
“차기 성자와 시성성 성장이 참여한 예배니, 제국 내 최고 사제인 리시우코 추기경을 보내는 것이 맞으나…”
리시우코 추기경을 언급한 황제는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장관.”
“예, 폐하.”
“추기경과 복자 중에 누가 더 높은가?”
“그거야…”
당연히 추기경이라고 대답하려던 입이 그대로 굳고 말았다.
‘누가 더 높지?’
이윽고 머리까지 굳어버렸다. 교황 바로 다음가는 직책인 추기경과 신의 축복을 받아 기적을 일으킨 복자. 과연 둘 중 누가 더 높은가.
교단 내의 실질적 권한을 생각하면 추기경이 더 높기는 하다. 복자는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지, 교단 업무에 관여하는 직책이 아니니까.
허나 권위를 생각하면 한 시대에 수백 명이나 존재하는 추기경보다 복자가 압도적으로 위다. 교황의 임명을 받는 추기경과 달리 복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종. 심지어 그 복자가 고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추기경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진짜 누구지?’
혼란스럽다. 솔직히 복자를 더 위로 취급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여명 교단 내에도 서열이라는 게 있으니 추기경을 아래로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의 축복을 받은 자를 인간의 직책보다 아래로 두는 게 맞나? 교단 내 서열이나 직책도 결국 인간이 만든 거잖아.
아니, 그렇게 따지면 복자도 인간이 만든 개념이기는 한데.
“장관처럼 나도 고민이 많았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더군.”
끊임없이 이어지던 고민은 황제의 목소리 덕분에 끊겼다.
“그래서 성지 순례단 측에 정식으로 문의했지. 추기경과 복자 중에 누가 더 높냐고.”
비전문가끼리 고민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답을 듣자는 말.
실로 정석적이고 깔끔한 방법이다. 우리가 백날 고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차피 교단이 우리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걸로 끝인데.
“그런데 아직까지 답변이 없다네. 아마 순례단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야.”
‘망할.’
다만 전문가들조차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추기경을 보내면 복자가 높다고 지지하는 쪽에서 유감을 표할 테고, 복자를 보내면 추기경을 지지하는 쪽이 아쉬워할 거다. 차라리 묻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상황이 펼쳐져 버렸다.
“장관.”
“예, 폐하…”
“미안하지만 리시우코 추기경은 물론, 장관과 부인도 가야 할 것 같네.”
“…….”
“그렇게 보지 말게. 정말 미안하다니까?”
무려 황제의 사과였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연말에는 저택에서 오붓하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 소소한 야망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해소해야─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민망하지만 연말 예배는 나도 참가할 예정이네. 장관은 자리만 지키면 충분해.”
그 말에 좌절과 분노가 가라앉았다.나만 일하는 게 아니라 저 새끼도 같이 굴러?
게다가 황제가 예배에 참석하면 황제를 따라 무수히 많은 고위직이 참가할 테니, 딱히 내가 현장을 책임질 필요도 없다. 나보다 서열이 높은 양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왕 부부가 예배에 참석하는 거, 가족이 다 같이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장관과 차기 성자 사이의 친분도 있으니 순례단도 반길 거야.”
…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야 말로 장관의 헌신에 늘 고마울 뿐일세.”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숙였다.
나 혼자 구르는 거면 황태녀를 꼬드겨 ‘아빠 미워!’를 말하게 하려 했으나, 같이 구르는 거면 참을 수 있다. 내가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소인배는 아니다.
‘가족 예배도 나쁘지 않겠지.’
덤으로 황제의 말처럼 가족이 다 같이 예배를 드리는 거라면 가족의 오붓한 시간도 사수할 수 있다.
비록 유쾌한 연회가 아닌, 고요한 예배라는 게 아쉽다만… 예배가 끝나고 가족끼리 식사라도 하지 뭐.
***
납득하고 돌아가는 장관의 뒷모습을 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넘겼다.’
다행이다. 장관이 순례단에 합류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장관의 표정은 누구 하나 담가버릴 수준으로 흉악했었다. 본인은 최대한 억누른 것 같지만 수년 동안 장관을 다룬 경험 덕분에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 나도 장관을 보낼 생각이 없었고, 보내는 게 맞나 의문인 사안이다. 명령을 내리는 나조차 그런데 당사자인 장관은 어땠겠나.
그렇기에 추기경과 복자 중 누가 높냐는 희대의 난제를 내세웠고, 여명 교단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피치 못할 사정을 언급했다. 마지막에는 장관뿐만 아니라 나도 예배에 참여하겠다고 하며 장관의 억울함을 달랬다.
‘당분간 바쁘겠군.’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 예배 참가는 예정에 없던 업무다. 심지어 예배라는 게 1시간, 2시간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예배 당일은 통째로 예배에 소모한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 그날을 대비하여 업무를 조금 앞당겨서 처리해야 한다. 당분간 점심은 건너뛰거나 집무실에서 간단히 빵으로 때우는 게 좋겠지.
‘업보가 있으니 원.’
황제가 신하의 눈치를 살피는 건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나, 애석하게도 불평을 표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레온 왕국 사태 때문에 선을 넘은 상태니까.
헌데 이미 선을 넘은 상태에서 꾸준히 장관을 자극한다? 그러다가 눈이 돌아간 장관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머저리 같은 아스투리아 놈들.’
착잡한 심정은 이윽고 레온 왕국의 전 왕가인 아스투리아를 향한 원망으로 변했다.
그 머저리들이 제국을 침공하지만 않았어도, 왕실의 인원이 급감하지만 않았어도, 대가 끊기지만 않았어도 장관을 레온 왕국에 보낼 일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주의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주제도 모르는 소국 왕가의 업보라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이미 망한 것들을 징벌할 수도 없고.’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일단 순례단 측에 예배 참가 인원부터 보내자.
***
연말 예배까지는 아직 몇 주의 시간이 남은 상황. 곧바로 순례단과 합류할 필요가 없기에 지금은 느긋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멍멍이! 가자!”
– 왈!
그리고 오늘도 상황이 기르는 인절미에 올라타 황궁을 돌아다니는 황태녀의 모습에 황실 기사들과 시종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순박한 인절미와 은발 아기의 황궁 나들이는 누구라도 귀엽게 볼 광경이지.
“더 빠리!”
“안 됩니다.”
물론 나는 대부로서 대녀의 안전을 지켜야 하기에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렇게 틈만 나면 인절미에게 빠른 질주를 지시하니 한눈을 팔 수가 있나.
“히잉…”
“그렇게 보셔도 안 됩니다.”
시무룩한 황태녀의 모습에 잠깐 갈등했지만 내 뜻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황태녀가 낙견이라도 하면 여러 사람이 피눈물을 흘릴 터. 대부로서 차마 그 꼴은 볼 수 없다.
“때부, 때부.”
“예, 전하.”
“나 다른 멍멍이. 보고 시퍼.”
황태녀의 빠른 화제 전환에 슬쩍 황태녀가 타고 있던 인절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들이 내 몸에 밴 티티의 냄새를 아는 것처럼, 티티도 내가 묻히고 온 이 녀석들의 냄새를 알아봤다. 덕분에 티티는 격렬히 내 몸에 들러붙었고 그다음 날에는 이 녀석들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멍멍이들, 왜 때부 조아해?”
그 기묘한 현상은 황태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제가 이 아이들의 남매를 기르고 있습니다.”
“나암-매?”
“예, 전하. 이 멍멍이들의 가족입니다.”
“멍멍이? 새 멍멍이?”
시선은 티티를 향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보고 시퍼! 때부 멍멍이! 보고 시퍼!”
덕분에 일이 이렇게까지 흘렀다. 동물을 좋아하는 황태녀에게 있어 새로운 동물 친구가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매혹적이었을 테니.
“때가 되면 데려 오겠습니다!”
“시러! 빨리 보고 시퍼!”
떼를 쓰기 시작하는 황태녀를 보며 머쓱히 웃음만 흘렸다.
유감스럽게도 티티는 내가 데려오고 싶다고 데려올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이미 페디가 주인인 수준인데.’
페디에게서 티티를 떨어뜨리면 페디가 대성통곡을 할 거다.
대녀를 위해 친아들을 울리는 건 좀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