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96)
로판 속 공무원 596화(597/945)
제도에서 열리는 연말 예배.
무려 차기 성자가 직접 주도하고, 황제가 자리를 빛낸다는 정보가 퍼지자 제국 각지의 고위 귀족들이 자연스레 집결하였다. 어차피 며칠 후면 신년하례식 때문에 제도에 와야 하지 않나. 조금 빨리 왔다 생각하면 충분하다.
게다가 양위 이후로 늘 황궁에만 있던 상황조차 이번 예배에 참석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만약 제국의 고위층 중 연말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자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신앙심이 부족한 것이 아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일 터.
‘늙은 상황도 왔는데 불참하면 괘씸죄가 박히겠지.’
물론 그런 최소한의 눈치와 사회성이 없는 자라면 고위층이 되지도 못했겠지만.
“연말에는 좀 쉬려고 했는데…”
오죽하면 ‘눈치 없음’이라는 글자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듯한 에리히마저 순순히 예배에 참석할 준비를 할 정도였다.
“영원히 쉬고 싶으면 집에 있든가.”
“이제 스물인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농담 섞인 조언을 건네자 에리히는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지금은 저렇게 반응하지만 몇 년 정도 구르고 나면 오늘 내가 한 충고를 떠올릴 거다. 차라리 그때 영원히 쉬는 걸 택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고.
“애초에 타니안이 왔는데 불참할 수도 없잖아. 저번에는 의회에 있느라 얼굴도 못 봤어.”
허나 친구가 왔으니 만나러 간다는 상식적인 발언에 추가 조언을 건네지는 않았다. 타국 친구가 자기가 사는 곳까지 왔다면 만나러 가는 게 당연하지.
애석하게도 타니안이 막 제국에 왔을 당시, 아인테르와 나는 타니안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지만 에리히는 그러지 못했다. 제국의회에서 막내로서 갈려나가는 중이었으니 도저히 만날 시간이 없었지. 그러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만날지 장담할 수 없다.
“아쉽네. 조카도 성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형 결혼도 다 안 끝났는데 무슨 조카야. 괜히 족보 꼬일라.”
내 위로 아닌 위로에 에리히는 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페디가 태어난 순간부터 족보가 꼬이는 건 피했다. 내 적장자가 미래에 태어날 조카들보다 나이가 많으니 가주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어그러질 일은 없다.
하지만 에리히는 내가 피네와의 결혼식까지 마친 이후에 결혼을 하고, 여섯 부인이 전부 자식을 한 명 이상 낳은 상태에서 자식을 가질 생각이라고 선언했다.마치 다른 부인들도 마르 같은 정부인으로 봐주는 듯한 배려라 고마울 따름이다.
“이거 제수들한테 원망 받는 건 아닌가 몰라.”
“세라랑 누나한테?”
내 말에 에리히는 잠시 침묵하더니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없을걸? 형 아니었으면 아직 약혼도 못 했을 거라 얘기하더라고.”
‘아.’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 납득하고 말았다.
확실히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셋의 관계는 소꿉친구였을 가능성이 크다.내가 개입함으로서 소꿉친구에 불과한 관계를 약혼자 관계까지 당겨준 것이니, 결혼이 잠시 밀리는 것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내후년이면 우리 차례잖아. 느긋하게 결혼 준비할 수 있어서 좋지 뭐.”
그렇게 말한 에리히는 외투를 걸치더니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가볼게. 셋이 같이 움직이기로 해서 먼저 나가봐야 돼.”
“어, 그래라.”
약혼자끼리 짧은 연말 데이트를 즐기겠다는 말인지라 순순히 보내줬다.
‘이제 내가 나서지 않아도 잘 지내는구나.’
서서히 멀어지는 에리히의 뒷모습을 보며 눈가를 닦았다. 아카데미 재학 중에는 내가 나서서 판을 마련해야 겨우 같이 다녔는데, 이제는 자기가 알아서 데이트 약속도 잡는다.
동생이 사람이 됐다는 증거인지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자라다오.
제발.
어쩌다 보니 이번 연말 예배는 크라시우스 가문 전체가 참석하는 가족 행사가 되어버렸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지에서 푹 쉬고 계셨어야 했다. 황실이 참여하고 나발이고 어차피 두 분은 은퇴하셨잖아. 두 분의 공백만큼 내가 황실 앞에서 재롱 잔치를 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타니안이 테레사에게 축복을 내려준다고 하자 두 분은 기꺼이 몸을 일으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이기로 하셨다. 자식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 부모가 불참할 수는 없지.
물론 그 논리는 나와 부인들에게도 적용되었다. 현 시점에서 우리 가족 중 막내인 프리드리히에게 내려지는 축복. 그 기념비적인 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모든 부인들이 참석하기로 했고, 페디랑 세쌍둥이도 데려갈 예정이다.
“너희도 같이 갈래?”
그렇기에 아이들의 좋은 장난감─ 아니, 친구인 성수들에게도 제안했다. 이왕 가족 행사가 된 거 너희도 같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냐고.
“뭐?”
내 제안에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진 장생이 무슨 헛소리냐는 듯 반응했다.
너무 가녀린 모습이라 잠깐 죄책감이 들었다. 분명 막 봉인에서 풀려난 시절에는 저 녀석이 가장 반항적이고 흉폭했었는데, 저택에 온 뒤로 이래저래 시달리면서 독기가 빠져버렸다.
“아우우-”
“뺘아!”
“부부우…”
아마 주요 원인은 기어다니기 시작한 세쌍둥이지 않을까 싶다.
전(前) 죽음, 현(現) 장생. 흉악한 과거의 이름과 달리 외견은 자그마한 요크셔테리어에 불과한 녀석.
그 귀엽고 하찮은 외견 덕분에 세쌍둥이는 장생을 유독 좋아했다. 도망치면 네 발로 기어서 쫓아다니고, 잠깐 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다리를 잡아당겨 인형처럼 다루었다. 하필 한때는 신이었던 녀석이라 아기들의 격한 손길 속에서도 버티는 중이고.
“빠우!”
“지금 이 꼴을 보고도 날 데려가겠다고?”
막 카틀레아에게 귀를 물린 장생은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봤다.
상상 이상으로 애잔한 모습이라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살기 위해서 내 신발을 물고 버티던 녀석이 이제는 내 아이들에게 물리고 있다. 전직 신치고는 처절할 정도로 몰락한 비참한 광경이다.
“…그래도 너희는 성수니까 성자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좋─”
“내가 왜 성수냐! 나는 이 대륙을 호령했던 악신이다!”
내 말에 골골거리던 장생은 울컥한 듯 네 발로 꼿꼿이 서서 외쳤다.
“아우!”
“뺘아아!”
“그, 그만둬! 꼬리는 잡아당기지 마!”
물론 어딜 감히 움직이냐는 듯한 세쌍둥이의 손에 붙잡혀 도로 주저앉았지만.
“주인. 나는 상관없다.”
“어휴, 새 이름을 주신 분이 예배를 한다는데 당연히 가야죠.”
“가면 먹을 것도 주나? 여명 교단 애들이 음식은 잘 하던데.”
그 처절한 응징을 직관한 다른 성수들은 빠르게 입장을 표명했다.
동료애보다 자기 생존이 우선이라는 듯한 자세. 상당히 속물적이지만 현명한 모습이기에 흡족스러웠다. 적어도 이 녀석들이 돌발 행동으로 내 속을 썩일 일은 없을 테니.
“가면 황태녀도 있을 테니까 잘 놀아주고.”
“엇.”
“황태녀도… 있어…?”
황태녀라는 말에 성수들 사이에 잠깐 동요가 퍼지기는 했지만, 불참 선언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장생이는 마리아에게 깔리고 세실리아에게 꼬리를 유린당했으니까.
“나, 나도…”
“응?”
“나도 갈 테니… 꺼내줘…”
눈물겨운 항복 선언에 장생이를 덮고 있던 마리아를 조심스레 안아올렸다.
“아우?”
“우리 딸은 아빠랑 같이 놀자.”
“아우우!”
그러자 마리아는 빵끗 웃으며 양팔을 나에게 뻗었다.
다행히 아빠보다 장생이가 좋은 단계는 아닌 것 같다.
***
제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신성한 교회인 성 파로나스 대성당.
현 황제의 즉위식과 고문 형제님의 결혼식이 이루어진 곳이자,고문 형제님의 동생, 내 친우의 아들에게 축복을 내릴 곳.
“귀여운 아이들이군요.”
고문 형제님의 어머니 품에 안긴 채 멀뚱히 나를 바라보는 여아, 루이제 자매님의 품에서 자고 있는 남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다. 어머니를 닮았는지 사파이어처럼 푸른 눈을 가진 여아는 낯선 사람과 마주했음에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 고문 형제님처럼 용맹하고 강인한 무인으로 자라겠지.
루이제 자매님처럼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아는 주변이 시끄러움에도 멀쩡히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갈 것 같은 아이다.
“낮에 많이 자면 밤에 잠을 안 잔다고 하던데…”
“응. 그래서 밤마다 재우는 게 일이야.”
내 말에 루이제 자매님은 배시시 웃으며 아이의 볼을 매만졌다.
사랑이 가득 담긴 손길에 품에 안긴 아이도 만족스러운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봤자 잠에 든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아이…’
분홍 머리를 가진 아이를 볼수록 씁쓸한 감정이 올라왔다.
첫사랑의 아이를 본 것에 대한 복잡함 때문은 아니다. 이미 자매님에 대한 감정은 정리한 지 오래니까.
다만 3년 동안 함께 아카데미를 다닌 친우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나는 결혼은커녕 마음이 맞는 상대조차 만나지 못했기에 더더욱.
“이 아이들도 처음 보는 아저씨를 계속 보는 건 지겹겠지요.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굳이 그 심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축하를 위해 온 것이지, 푸념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테레사라는 이름의 여아와 프리드리히라는 이름의 남아에게 축복을 내린 후, 대성당 내의 방으로 들어가 기도문을 다시 확인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배인데 평범하고 지루한 기도를 하는 건 서로에게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해도 기도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이제 자매님 품 안에 있던 프리드리히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분이다.
‘나는 언제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갑자기 고문 형제님이 부러워졌다. 나와 나이 차이가 심한 것도 아닌데 벌써 다섯이나 되는 아이를 보지 않았나.
“형제님?”
내가 멍하니 기도문만 만지작거리자 옆에 있던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친우들을 봐서 잡념이 늘어났군요.”
“죄송하다니요. 그리운 얼굴을 보고 추억에 잠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내 사과에 자매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언제나 관대한 마음으로 내 실수를 이해해 주는 자매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처음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도 교황 성하, 스승님과 더불어 큰 도움을 주신 분이었지.
“자매님.”
“네, 형제님.”
“저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자매님처럼 선량하고 밝은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자매님의 손이 우뚝 굳었다.
실수했다. 아무리 머릿속에 아이 생각만 가득하더라도 미혼인 남자가 미혼인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자매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최대한 참았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예, 예?”
진지한 분위기로 중얼거리는 자매님의 모습에 무심코 몸을 떨었다.
“다 형제님이 나쁜 거예요.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데 자꾸 기대하게 하는 말이나 하고.”
“자매님, 그게 무슨…”
“저도 아이가 생긴다면 형제님 같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내가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왔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붉어진 자매님의 얼굴처럼 내 얼굴도 붉게 물들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