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97)
로판 속 공무원 597화(598/945)
빌어먹을 태양.
빌어먹을 차기 성자.
빌어먹을 주인.
‘빌어먹을 내 팔자.’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앞발로 눈가를 비볐다. 내 신세가 처량한 것은 맞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우는 건 더더욱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눈가를 비빌수록 감정이 가라앉기는커녕 서러움만 몰려왔다.
‘내가 왜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지?’
나는 죽음이었다. 무수히 많은 신들이 난립하던 시기, 수없이 많은 전란과 분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무려 사흉이라 불리던 존재였다. 이 대륙 만인의 공포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같은 신들조차 우리를 두려워하고 피했다. 신도들은 감히 우리 앞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리의 악행을 징벌하겠다며 건방진 소리를 지껄였다가 쓰러진 것들도 한가득이다.
그것이 사흉.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네 개의 절망이었다. 나는 그중 모든 생명에 마지막에 이르는 종착점─ 죽음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런 내가 태양을 찬양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태양의 아들이라 불리는 놈의 예배를 들어야 한다. 실로 굴욕스러운 일이다.
“…이제 그만해.”
그 와중에 축축하게 젖어오는 귀, 꽉 잡힌 꼬리, 쉴 새 없이 펄럭이는 뒷발의 감촉을 느끼며 씁쓸히 입을 열었다.
“아우우!”
“뺘우!”
“부우우-?”
“그만하라고…”
고작 꼬맹이 셋에게 장난감처럼 유린당하는 나. 이런 나를 보니 과거의 영광이 더욱 한스럽게 다가왔다.
그 누가 지금의 나를 보고 죽음이라 부를까. 대륙을 공포로 호령하던 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야, 사랑을 듬뿍 받아서 좋겠네. 집에서 쫓겨날 일은 없겠어.”
“그러게. 아가씨 셋이 총애하니까 사고를 쳐도 혼만 조금 나고 끝나겠지.”
“나도 귀엽게 생겼어야 했는데.”
“득츠르…”
한때 같은 사흉이라 불리던 동포들의 도발에 이를 악물었다.
귀엽다니. 이 죽음을 보고 귀엽다니!
‘이 모습만 보면 벌벌 떨었었는데!’
수백 년에 이르는 봉인 때문에 쪼그라들었지만, 한때 나는 칠흑 같은 털로 지상을 덮으며 필멸자들을 내려다보는 위엄 있는 존재였다. 이런 동네 개새끼 같은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금 몸이 자란다면… 그때는…”
“그때는 덩치 크고 귀여운 놈이 되겠지.”
기근의 말에 역병과 전쟁도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이 빌어먹을 것들. 지들은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비웃기만 하다니.
‘왜 나만.’
순간 억울함과 원통함이 솟구쳤다. 동네 개만도 못한 모습이 된 나와 달리, 저 세 녀석은 크기가 작을지언정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역병은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 전쟁은 산의 왕인 호랑이, 기근은 다소 애매하지만 개보다는 양호한 양의 모습이다.
분명 빌어먹을 태양의 음모다. 내가 다른 녀석들보다 더욱 강대하고 위엄이 넘치니 특히 견제한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곧 예배 시작할 테니까 조용히 하렴.”
그렇게 이를 갈던 중, 흰머리 엘프가 우리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넵.”
“조용히 하고 있겟슴다.”
“…….”
바로 부리를 다무는 역병, 고개를 끄덕이는 전쟁, 아예 몸을 동그랗게 말아 털공처럼 변한 기근.
자존심도 없는지 고작 엘프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는 세 녀석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저것들과 같은 사흉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러니 나라도 정당히 거부하리라. 내가 굴복할 상대는 검은 머리 인간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우리 딸들. 장생이랑 그만 놀고 엄마랑 놀자꾸나.”
내 몸을 가지고 놀던 아기 셋이 엘프의 품에 안겼다.
흐으음.
‘이번만 넘어가도록 하지.’
절대 저 덩어리들이 다시 달라붙을까 이러는 건 아니다.
그저 태양의 추종자들이 모인 장소에서 소란을 피워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자제하는 거다.
‘저렇게 조용한 것들이.’
이윽고 언짢은 기분이 몰려왔다.
나는 그렇게 괴롭혔으면서 자기 엄마 품에 안기니 조용히 손가락이나 빨고 있잖아. 저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주제에 나한테는 왜 그랬냐고.
‘망할 초목의 자식들.’
태양도 짜증 나지만 그 태양과 빌붙은 초목도 싫다. 그리고 저 아기들은 초목의 총애를 받는 엘프의 피가 흐르는 혼혈이다.
태양의 아들에게 괴상한 이름을 받고, 하늘과 연이 있는 인간에게 종처럼 부려지고, 초목의 신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곱씹을수록 억울해서 버틸 수가 없다. 어떻게 봉인이 풀리자마자 노린 것처럼 그 셋하고 얽히는지.
“귀한 시간을 내어 모여주신 신앙의 동포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차라리 봉인이 풀리든 말든 구덩이에 있었어야 했나 고민하는 사이, 망할 태양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저 망할 것이 예배니 뭐니 시끄럽게 굴어서 내 귀한 시간을 낭, 비…?
‘응?’
태양의 아들을 보자마자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분명 처음 봤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외견이나, 풍기는 기운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다고 신성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저 놈은 여전히 빌어먹을 태양을 향한 굳건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비례하는 총애도 받고 있다. 신앙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저 차기 성자 놈에게 중대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하다.
“뭐야.”
“이상하네. 저거 원래 저랬나?”
위화감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역병과 전쟁도 작게 수군거렸다.
“어라?”
그리고 수군거림은 뒷자리에서 자고 있던 음욕에게도 번졌다.
“한 발 나아갔네?”
“응?”
“뭐?”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음욕은 우리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 숙면을 취했다.
이 도움 안 되는 새끼. 말할 거면 끝까지 말하든가.
***
뒷자리에서 성수 녀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거슬릴 정도는 아니기에 애써 무시했다.
정확히는 무시하려고 했었다.
“이상하네. 저거 원래 저랬나?”
“한 발 나아갔네?”
타니안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차기 성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일반인이 말하더라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만큼 차기 성자의 안위는 매우 중요하니까.
그런데 한때 신이었던 것들이 일제히 타니안의 이변을 언급한다?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이상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미 신격을 잃은 전직 신들도 이변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가까이에 있는 여명 교단의 사제들이 모를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사제들 중에는 추기경급 인사도 있지 않나.
추기경들이 보기에 타니안의 몸이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면 절대 예배를 강행할 리가 없다. 저렇게 타니안이 아무렇지 않게 나올 수는 없다.
‘…진짜 문제가 생겼나?’
그렇게 타니안의 얼굴을 살피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충 볼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묘하게 붉어졌다.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혼란스럽다. 아까 축복을 내려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그 잠깐 사이에 감기라도 걸린 건가?
‘멈추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니다. 예배를 진행한 걸 보면 본인이 괜찮다고 판단한 거겠지.
게다가 감기라는 보장도 없다. 고작 감기라면 성수들이 원래 저랬냐느니, 한 발 나아갔다느니 같은 발언을 할 리가 없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예배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혹여나 타니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대응할 수 있게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제국에서 차기 성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최소 반 년은 굴러야 한다.
다행히 예배는 아무런 소란 없이 끝났다.
그러나 무사 종료를 기뻐할 겨를도 없이 한 사제가 다가와 끔찍한 말을 전했다.
“타니안 형제님이 독대를 원하십니다.”
실로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말이다. 단순히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라면 우리 가족 전부를 찾았을 테고,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황제를 찾았을 거다. 굳이 나 하나만 찾는 것은 작별 인사도 업무적 만남도 아닌 제3의 이유 때문이라는 뜻.
그렇기에 떨리는 발걸음으로 타니안에게 향했다. 제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유기를 바라면서. 내 걱정보다 시시한 이유기를 바라면서.
“사랑은… 어떻게 확인하는 겁니까?”
“…예?”
그리고 생각보다 심각하고도 하찮은 이유가 반겨줬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
불경스럽게도 예배를 진행하는 내내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주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
“저도 아이가 생긴다면 형제님 같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으니까.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먼저 아이 운운하며 미혼인 자매님께 실례를 저지른 건 나지만, 설마 그런 반격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단순히 형제님처럼 선하고 현명하고 멋진 아이를 기르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형제님과 함께 아이를 기르고 싶다는 말이죠.”
심지어 내가 오해할까 봐 구체적으로 설명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당혹스러웠다. 자매님이 나를 아껴주신 건 맞다. 나도 자매님을 누나처럼 여기며 좋아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친애의 감정이 가족애가 아닌 이성의 사랑이었을 줄은 몰랐다.
“…놀라셨죠? 10살은 위인 사람이 이런 말이나 하고.”
그러나 내 침묵에 자매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상인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여 말을 아끼는 것이라는 오해와 함께.
솔직히 나이 차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 누가 자매님의 외견을 보고 나와 10살 차이가 나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겠나. 단지 갑작스러운 고백 아닌 고백에 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하지만 참고 있던 사람을 자극한 형제님이 나쁜 거니까요.”
그렇게 말한 자매님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 이 정도는 용서해주세요. 이 다음은 형제님 허락 없이 혼자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뒤의 일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자매님의 체온이 느껴진 이마, 자매님의 미소를 본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 것만이 기억에 남았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혼란스럽다. 누군가 나에게 존경을 표하거나 우정을 보인 적은 있지만 사랑을 언급한 적은 없다. 이성으로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나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루이제 자매님을 사랑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사랑은… 어떻게 확인하는 겁니까?”
“…예?”
그래서 고문 형제님에게 독대를 청하고 진지하게 물었다.내가 아는 사람 중 사랑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형제님이니.
“어느 분의 고백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아, 예…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이 두근거림이 놀라서 그런 건지, 저도 좋아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형제님은 다소 따가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에리히 형제님이 세라 자매님과 함께 있을 때 자주 보냈던 눈초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