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98)
로판 속 공무원 598화(599/945)
타니안의 말을 듣자마자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77년도 시즌, 더 정확히는 77년도 1학기 때 제과 동아리 부원들에게 시달렸던 악몽이.
‘끔찍했지.’
툭하면 펼쳐지던 기행, 서로 견제하느라 누구도 앞서나가지 못한 추함, 입학하기 전에 집에 두고 온 것 같던 눈치.
솔직히 끔찍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심정은 ‘제과 동아리스럽다.’ 라는 고유 문장을 만들어야 겨우 표현이 가능할 정도니까.
그런데 그 악몽이 다시금 재현되려고 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준 은인의 입을 통해서.
‘기절시킬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타니안을 기절시켜서 기억을 날려버리고, 독대를 아예 없던 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그쳤다. 사람을 기절시키거나 기억을 날려버리는 고급 기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아마추어인 내가 그런 걸 시전했다가는 타니안이 에넨 곁으로 가버리거나 야채인간이 되겠지.
아니, 야채인간이 아니라 식물인간.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머리도 맛이 가버렸네.
“형제님.”
“예, 말씀하시지요.”
일단 복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타니안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이 녀석이 짝사랑에 빠졌던 77년도 1학기가 얼마나 절망스러웠던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귀찮을지언정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자신이 평소와 다른 감정을 가졌다는 걸 인식하고, 홀로 끙끙거리는 것이 아닌 지인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눈치는 부족할지언정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지능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두근거림이 놀라서 그런 건지, 저도 좋아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속이 터지는 말이지만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타니안이 나아갈 방향만 제대로 잡아준다면 자기가 알아서 할 확률이 높다.
“형제님은 그 고백을 들었을 때 두근거렸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놀람의 두근거림인지, 사랑의 두근거림인지 헷갈려서─”
“감정은 당장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지금 부인들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 당장 답을 준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대답을 줬으니까요.”
내 말에 타니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부인이 여섯 명인 사람의 사랑 조언만큼 귀중한 조언은 없을 테니.
“그러니 형제님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빨리 대답하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건 그거대로 상대에게 실례입니다. 기껏 고백해 준 분에게 무례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됐습니다. 형제님은 이미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충분히 시간을 가지면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그건 그렇겠군요.”
드물게 말을 더듬는 타니안을 보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눈치는 보지 마십시오. 형제님이 과거의 감정을 깔끔히 털어낸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타니안은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귀중한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형제님께 여쭈어보는 것이 옳았습니다.”
“고작 몇 마디로 도움이 되었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대화가 훈훈하게 마무리될 분위기인지라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처음 타니안이 사랑 운운했을 때는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77년도 시즌에서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타니안은 내 걱정보다 성숙해진 상태였다.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바로 납득하지 않았나.
타니안에게 고백한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같은 성지 순례단의 일원일 터. 그렇다면 타니안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많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 즐거운 연말을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타니안이 직접 문밖까지 배웅해줬다.
‘…살았다.’
그리고 타니안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80년도 막바지에 재앙이 터지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
***
고문 형제님의 조언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감정을 당장 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사랑을 경험한 나이기에 시간만 지나면 지금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하나하나가 맞는 말이라 마음이 편해졌다.
‘역시 조언은 경험자에게 구하는 게 맞았어.’
홀로 고민했다면 이리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거다. 혼자 내 감정을 알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빨리 자매님에게 답을 줘야 한다는 강박감에 쫓겼을 터.
‘여유라.’
의자에 몸을 눕힌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다행히 시간은 충분하다. 겨울 삼국에서 성지 순례를 하다가 급히 제국에 온 것이니, 아직 방문해야 할 국가는 열 곳이 넘는다.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정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미 반쯤 내 마음을 깨달은 기분이기도 하다.
‘사랑 경험.’
고문 형제님의 말처럼 나는 짧게나마 사랑을 경험했다. 그것이 비록 일방적인 짝사랑일지라도 그때의 감정이 가벼웠다는 건 아니다.
헌데 당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 가슴을 조금씩 옭아맸다. 자매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자매님의 고백을 생각할수록 얼굴이 뜨겁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에게 가족을 만들자고 말할 때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익숙한 경험이다. 내가 루이제 자매님을 마음에 품었을 때 이랬으니까.
‘성급하게 굴지 말자.’
허나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치며 상념을 걷어냈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이 감정이 당혹감에서 기반할 걸 수도 있다. 기껏 자매님의 고백을 받았더니 두근거림이 가라앉으면 서로에게 비극이다.
그러니 참자. 짧아도 2주 정도는 심사숙고하는 게 옳다.
라고 생각했었다.
“아, 형제님.”
방을 나가자마자 알렉산드리아나 자매님을 보기 전까지는.
잠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아직 자매님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자매님도 나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에 불과하다.
“예배…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다른 분들이 더 고생하셨지요.”
먼저 고개를 숙이는 자매님을 향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의식하지 말자. 고백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진 덕에 조금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나와 자매님의 관계는 작은 사건 하나로 틀어질 관계가 아니다. 서로 고생했다는 안부와 위로 정도는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사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머리와 달리 가슴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소처럼 대해도 된다는 머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저기, 형제님?”
“네, 자매님.”
“아까 제가 했던 말. 그냥 잊어주세요.”
“예?”
하지만 요동치던 가슴이 자매님의 고백 무르기에 식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당히 고백을 해놓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니.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이상한 말을 한 거예요. 제가 형제님에게 고백을 하다니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딱딱히 굳은 나를 향해 자매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제로서 감히 성자께 불건전한 마음을 품었고,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부담을 줬어요. 마음 같아서는 추기경 직책도 내려놓고 싶지만… 제가 갑자기 물러나면 다른 분들만 힘들어지겠죠.”
혼자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자매님의 모습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람이 놀라면 비명이 나오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던데, 그걸 이렇게 확인할 줄은 몰랐다.
“형제님을 보좌해야 하는 중책을 맡았으면서 도리어 혼란을 준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갑작스러웠던 고백처럼 무르는 것도 갑작스러운 자매님은 그 말을 끝으로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조용히, 동시에 힘없이 걸어가는 자매님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나 당당했던 발걸음은 기가 죽어 있었고, 어깨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 처져 있었다.
“자매님.”
도저히 더 지켜볼 수 없어 자매님에게 다가가 손을 낚아챘다.
“누구 마음대로 없던 일로 하는 겁니까?”
“네, 네?”
“한번 칩을 배팅했으면 아무리 애절해도 무르지 못합니다. 이미 판에 올라왔다면 그건 자매님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형제님…?”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자매님을 끌어안았다.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생각하자는 다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자매님의 가냘픈 미소를 본 순간부터 아무래도 좋아졌다.
만약 이것이 자매님의 노림수라면 정말 뛰어난 사냥꾼이자 계략가이겠지만, 내가 아는 자매님을 그런 술수를 쓸 분이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물러나는 것이다.
“주께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막지 않았습니다. 역대 교황 성하들께서도 사제가 가정을 꾸리는 걸 반기셨지요. 그런데 그 누가 자매님의 마음을 탓하겠습니까.”
“하, 하지만…”
“나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지인만 하더라도 100살 연상인 부인이 있는데 고작 10살 정도가 대수입니까?”
“그건 종족이 다르─”
“자매님은 고작 10년 때문에 남은 수십 년을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그러자 품에서 버둥거리던 자매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만약 자매님이 저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생각해 보니 어린 꼬맹이하고 사랑을 나누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물러서는 거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이유는 변명으로만 들립니다.”
이번에는 자매님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자매님과 함께 방금까지 내가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지나갈 수 있는 복도에서 사랑 싸움을 하는 건 예의가 없는 짓이니.
내 마음을 뒤흔든 사람이 기가 죽어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
예배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 잠만 자고 있던 정결이 스르륵 눈을 떴다.
“했네 했어.”
딱 그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스르륵 고개를 숙여 잠에 빠졌다.
‘뭐야 이 새끼.’
예배 중에도 한 발 나아갔다느니 뭐니 이상한 말을 하던 녀석이 더욱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혼란스럽다. 여우는 털이 두꺼워서 겨울잠도 안 잔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은 하루 15시간은 잠을 자는 데다 잠꼬대까지 화려하게 한다.
하여간 악신 출신이라 그런지 기묘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