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599)
로판 속 공무원 599화(600/945)
차기 성자의 연말 예배. 며칠 후 바로 이어진 신년하례식.
연이은 대형 이벤트로 인해 고위 귀족들은 서로 대화할 주제마저 잃고 말았다. 어쩌다 한 번 만나야 할 말이 많은 거지, 며칠 내내 만나면 더 이상 쥐어짤 화제도 없지 않겠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 예. 물론입니다.”
“실례지만 어떤 걸…”
“저희 같은 거 먹었습니다.”
덕분에 연회장 곳곳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평소라면 만나기 귀한 얼굴이니 대화는 나누어야겠는데, 이미 연말 예배 때 중요한 거래나 약속은 끝마친 지 오래라 안부 인사나 근황 얘기가 전부였다. 그 안부 인사마저 신년하례식 첫날에 전부 털어버렸고.
신기한 일이다. 보통 신년하례식은 황제가 1년 국정 계획을 발표하고, 귀족들의 충성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자리다. 귀족들은 서로 암투를 벌이며 파벌을 재조정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나 올해 신년하례식은 제국 건국 이래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신년하례식이 되었다.
‘차기 성자 대단하네.’
이 모든 것이 차기 성자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덕분이다. 신의 아들이라 그런지 제국에 평화를 선물하고 갔어.
“사위.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샴페인을 홀짝이며 연회장을 훑어보자, 다섯 번째 장인어른(진)인 이오네스 후작이 말을 걸었다.
“근래 들어 이리 평화로운 신년하례식이 있었나 생각 중이었습니다.”
“하하, 사위도 그 생각 중이었군. 요 몇 년 동안 폭풍같은 시간이기는 했지.”
내 말에 장인어른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작년에는 감찰성 정식 출범에 새로운 리시자리우네 기사단원이 임명됐던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이번에도 장인어른은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아시나 보다.
물론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장인어른에게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로 항의하지는 않았다. 곧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딸을 시집보내는 아비의 입장에서 예비 사위가 얼마나 좋게 보이겠나. 그 이미지를 굳이 내 손으로 깰 생각은 없다.
‘일생의 한이 풀린 기분이겠지.’
이미 술을 몇 병 비우고 오셨는지 얼굴이 벌건 장인어른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다섯째 장인어른은 정식으로 결혼한 이후에야 나를 사위라고 불렀던 셋째 장인어른, 넷째 장인어른과 달리 얼마 전부터 나를 사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사위라고 부르지 않으면 내가 어디론가 떠날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애실론 가문의 강등 이후로 후작가 제일을 다투며, 풍요로운 영지 덕분에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고작 딸이 시집을 간다고 활짝 웃고 다니며, 아직 공식적으로는 남에 불과한 나를 벌써부터 사위라며 챙기고 있다.
‘나였어도 그랬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에리와 수년 동안 함께 일한 나는 충분히 장인어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에리의 성격상 지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장인어른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욱 절실할 터. 만일 이번 결혼이 불발된다면 장인어른은 실성하여 울고 웃기를 반복할 거다.
심지어 서른을 코앞에 둔 에리가 다행히 20대의 나이에 짝을 물고 왔다. 그것도 납치혼이 아닌,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물고 온 거다. 후작 입장에서는 가문의 명운을 걸어서라도 붙잡고 싶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장인어른.”
“왜 그러나 사위?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나?”
말만 하면 땅문서라도 던져줄 것 같은 기세라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에리 명의로 남작령 두 개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이상 받는 건 좀.
“아까부터 에리가 안 보입니다만,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그렇기에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분명 1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던 에리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우리 딸 생각은 사위만 해주는군.”
내 질문에 장인어른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콩깍지가 씌여도 단단히 씐 반응이라 제때 입을 열지 못했다. 살다 살다 예비 부인이 아닌 예비 장인어른의 콩깍지를 보게 될 줄이야.
“에리는 황후 폐하의 부름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네. 저녁 전에는 돌아올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대답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입장에서는 노처녀 루트를 밟던 후배의 결혼이 임박한 것이다. 결혼식 전에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둘만의 시간.’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아직도 에리와 황후가 친하다는 것에 인지부조화가 온다.
공작가와 후작가, 은발과 백발. 단순히 배경이나 외견만 보면 친해도 이상하지 않은 조건이나 하필 내면이…
‘피네하고도 친하니 이상할 건 없나?’
사실 황후와 친한 것보다 더 신기한 건 에리와 피네가 친구인 것이다. 그 둘은 정말 사람이라는 것 빼고 공통점이 없는 수준이니까.
그러니 이제 이 생각은 완전히 머리에서 지우자. 얼마 후면 정식으로 내 부인이 되는 사람에게 ‘네 성격에 어떻게 황후랑 친함?’ 이라는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의외인 사람과 친구 관계를 맺었다면 에리의 친화력과 사교성을 높게 평가할 일이지, 절대 이상하게 볼 것이 아니다.
게다가 특이한 걸로 따지면 제국백 후계자면서 평민들과 친구가 되었던 내가 더 특이하겠지.
***
아리아 선배가 찾길래 터덜터덜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러자 선배가 애지중지 안아 키운다는 황태녀도, 황후궁을 지켜야 할 시녀들과 기사들도 보이지 않는 독방으로 안내받았다.
“왔어?”
오직 선배만 있는 독방으로.
“나 나가도 돼? 우리 둘만 있으니 좀 허전한데.”
딱히 듣는 귀도 없으니 편하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선배도 사적인 자리라면 반말과 선배라는 호칭을 허용하니까.
“아니면 황태녀 전하라도 불러줘. 셋이 있어야 분위기가 살 것 같아.”
“안 돼. 좋은 거만 보면서 자라야 할 나이야.”
단호한 거절에 기분이 미묘했다. 그럼 난 안 좋은 거야?
섭섭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배랑 제일 친한 후배인데. 진짜 여동생은 아니더라도 명예 여동생 비스무리한 존재인데. 그러면 황태녀도 내 입장에서는 명예 조카 아닌가? 아니, 애초에 장관님이 황태녀의 대부니까 나도 조금 넓게 보면 대모잖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자리에나 앉아.”
“넹.”
물론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명예 조카니 대모니 그런 말을 운운하면 선배가 너 같은 대모 둔 적 없다고 명치를 후려 갈길 테니.
“술은 어떤 걸로 마실래?”
“아, 난 적와인으로.”
“여기 샴페인.”
“왜 물어본 건데.”
선배가 건네는 샴페인 병을 받으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어차피 손에 잡히는 거 던져줄 거면 왜 물어본 거람.
“오프너가 없잖─”
그 와중에 잔도 오프너도 주지 않는 선배의 만행에 항의하려다, 빈손으로 자리에 앉는 선배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왜 자기 마실 건 안 챙기는 거지?
“선배 술 끊었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뉘렌 공작가가 위치한 하블렘 공작령은 제국 영토 중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영지. 최근에 편입된 북방 수준은 아니지만 겨울에는 제법 추운 곳이다. 덕분에 선배는 겨울이 되면 술을 마시며 체온을 올렸고, 그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식사 중에 간단한 반주는 꼬박꼬박 마실 정도로.
그런 선배가 나에게만 술을 던지고 본인 것은 챙기지 않았다. 선배가 술을 끊은 건 내 기억으로 황태녀를 임신했을 때만…?
“…설마.”
멍하니 선배를 보자 선배는 픽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나 둘째 생겼어. 우리 후배님은 아직 결혼도 못 했는데 유감이네.”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선배의 배만 바라봤다.
이상하다. 나하고 선배 나이 차이가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선배는 벌써 애만 둘이고, 나는 미혼인 거지?
‘조만간 결혼해서 다행이다.’
진심이다. 만약 결혼이 한참 남았거나 아직 장관님에게 고백도 하지 못했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을 거다. 그걸 아니까 선배도 나를 부르며 임신을 자랑하는 거겠지.
“네가 노력하면 우리 둘째랑 네 아이는 동갑이겠다.”
“노력?”
공감할 수 없는 말이라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평범한 부부라면 아이를 가지는 행동에 노력을 해야겠지. 하지만 우리 장관님, 예비 신랑은 다르다.
“나도 결혼하고 열흘 안에 아이 가질걸?”
우리 예비 신랑은 벌써 네 명이나 되는 부인을 전부 임신시킨 희대의 괴물. 내가 노력하든 말든 내 임신은 당연히 찾아올 상수다.
아쉽게도 저번 데이트 때 극장에서는 불발로 끝났지만, 그건 예정에도 없던 짧은 시간이었잖아. 신혼은 시간이 넉넉하니 괜찮아. 응.
“부정할 수가 없네.”
선배도 그 위용을 모를 리 없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의 자식이 많아서 기쁘기는 해. 우리 샤를로테의 친구로 지내 줄 아이가 그만큼 많다는 거니까.”
“그거 내 아이들하고 합의 본 사안이야?”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들을 자기 딸의 친구로 만드는 만행에 항의했다. 친구는 일방적으로 사귀는 게 아니라 쌍방으로 마음이 통해야 하는 거잖아.
“내 딸이면 네 아이들은 금방 동생으로 삼을걸?”
“부정할 수가 없네…”
선배의 말에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미래의 내 아이들아. 이 엄마는 황후라는 권력 앞에 굴복한 못난 엄마야.
그 뒤로 나 홀로 와인을 홀짝이며 선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가끔 통신구로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건 다르니까.
“에리.”
“넹?”
“고마워.”
그 말에 슬며시 와인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선배를 바라봤다.
뭐지. 나 벌써 취한 건가?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눈에 힘 안 빼?”
뒤이은 발언에 안심하고 와인병을 다시 들었다.
제대로 들은 거 맞구나. 귀가 맛이 간 건 아니었어.
‘그럼 진짜 고맙다고 한 거야?’
뒤늦게 소름이 돋았다. 선배가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한다고?
‘왜?’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