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
아무리 파견지에 익숙해져도 원래 근무하던 곳이 더 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비교 대상이 집이 아니라 근무지라는 것이 많이 이상하지만, 불행하게도 집보다 더 오래 머문 곳이 감찰부인데 어쩌겠나.
그래서 이왕 온 김에 편한 곳에서 쉬다 갈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에는 신경 써야 할 높으신 분들이 여럿이지만, 감찰부에는 내 위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같은 청사를 사용하는 장관 정도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새 소문이 퍼졌네.’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통신구를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분명 공무원인 나는 장관만 신경 쓰면 된다. 더 위에 황실이 있기는 하지만, 황실은 적어도 예상하지 못한 일로 연락을 날리지는 않으니까. 다행히 당분간 황실의 연락을 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난 공무원이기 이전에 제국 귀족이기도 하다. 공무원으로서의 내 상관보다, 귀족으로서의 내 윗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막말로 난 작위 소유자가 아닌 후계자에 불과하니까. 당장 공작만 생각해도 윗사람이 다섯이네.
“감찰부장 칼 크라시우스입니다.”
– 칼 군. 나일세.
아무튼 윗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연락을 받으니 단정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온화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크라시우스 가문의 후계자, 재무성 감찰부장 칼 크라시우스가 존귀하신 전승공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강녕하고 말고. 자리만 지키는 놈이 별일이야 있겠는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연락을 넣은 주인공은 다섯 공작 중 하나인 전승공이었으니까. 마종공 다음은 전승공이라니, 오늘은 무슨 날인가.
– 마종공에게 들었다네. 마침 제도에 있다지?
“예, 각하. 잠시 일이 있어 올라왔습니다.”
소문을 퍼뜨린 확성기는 역시 마종공이었다. 어르신, 입이 조금 가벼우시네.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친한 사람 좀 보고 가라는 배려 같기도 하고.
– 파견을 가기 전에 배웅도 못해서 아쉬웠었네. 시간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없어도 만들어야죠.”
– 하하, 고맙네. 난 늘 있는 곳에 있으니 편할 때 오게나.
“알겠습니다.”
통신구의 빛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품 속에 집어넣었다.
‘인사나 드리고 가야지.’
딱히 예정에 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히 연락을 주셨으니 가야지 어쩌겠나. 공작의 초대를 거부하는 미친 귀족이 어디 있을까.
동아리 시간 전에는 돌아가야 하니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다. 편할 때고 뭐고, 당장 움직여야 늦지 않게 아카데미로 복귀할 수 있겠지.
제국군 총사령부 청사. 명목상 총사령관인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군을 이끄는 제국군 부사령관 겸 대원수인 전승공의 본거지. 전쟁성 장관마저 황태자의 장인인 전승공을 감히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에 명실상부한 군부의 수장이 머무는 곳이다.
‘볼 때마다 슬프네.’
그리고 원래라면 내가 근무하고 있어야 할 장소다. 전승공이 군부로 넘어오면 총사령부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했는데, 황태자의 화려한 통수로 인해 총사령부는 근처도 못 갔다. 그때 통수만 맞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전승공의 후광으로 총사령부에서 2년이나 지냈다면 지금쯤 무슨 직책에 있었을까 궁금하긴 하다. 적어도 감찰부장 같은 기괴한 자리까지 솟구치지는 않았겠지.
씁쓸한 마음에 청사로 진입하자 경비병이 경례를 하며 반겨줬다. 아카데미 파견 전까지 워낙 들락날락해서 이제 외부인이 아닌 반쯤 군부 사람으로 취급받는 느낌. 총사령부로 탈출하는 것에 실패한 내 마음 속 미련의 결과 같기도 하다.
“수고해라.”
적당히 경례를 받아주며 부사령관실로 향했지만,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알아보기에 인사를 나누는 것도 일이었다. 2년 전의 나는 당연히 총사령부로 건너갈 줄 알고 총사령부 사람들과 만남도 자주 가지며 미리 친해졌었으니.
‘황태자 그 개새끼 진짜.’
2년이나 지났어도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감찰부장으로 승진한 직후, 총사령부 사람들이 승진을 축하해주면서도 ‘이 새끼는 뭐하는 새끼지.’ 라는 눈으로 바라본 것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승진이 내정된 놈이 군으로 오겠다며 블러핑을 친 셈이니까.
하지만 억울했다. 내가 승진하는 건 나도 승진 통보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된 사건이었다. 보통 부장급 이상 인사 이동은 내정자에게 미리 알려준다던데, 황태자 그 새끼는 기습적으로 나와 장관을 승진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도착했네.’
속으로 황태자를 씹는 사이 눈 앞에 보이는 부사령관실. 역시 아무도 모르게 하는 높으신 분 욕만큼 시간이 잘 가는 것도 없다.
– 똑똑
“각하, 칼 크라시우스입니다.”
“아, 빨리 왔군. 들어오게.”
문을 열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전승공이 보였다. 아니, 앉아 계시지 굳이.
“어서 오게, 칼 군. 오랜만일세.”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전승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작인 것을 떠나서, 이 분에게는 신세를 진 것이 너무 많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강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뭘 안부를 두 번이나 확인하는가. 그리 날 생각하면서 말도 없이 떠나다니, 많이 섭섭했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었던지라…”
“하하! 농담일세. 당연히 이해하지.”
그러면서 내 어깨를 잡아 끌고 직접 자리에 앉히는 것은 많이 황송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구석에 있는 다기로 향하길래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앉아있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런 악의 없는 배려가 제일 무서운 법인데.
“이미 마종공과 마셨겠지만 나하고도 한 잔 하지. 괜찮은가?”
“영광입니다.”
빙긋 웃으며 차를 타는 전승공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예전에 대신 하겠다고 일어섰다가 정말 힘으로 짓눌려 앉혀진 이후로는 이 모양이다. 와, 공작이 직접 타주는 차. 너무너무 영광이다…
“오늘 꿈자리가 좋더니, 귀한 손님이 올 징조였군.”
“각하께서도 꿈을 신경 쓰시는군요. 의외입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같네. 아, 방금 말은 마종공에게는 비밀일세.”
“하하. 물론입니다.”
차를 가져오며 말하는 전승공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몇 년 전부터 마종공이 해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알 사람은 아는 사실. 그런 상황에서 ‘나이 먹어서 꿈에 신경 쓰게 된 듯’ 이라는 말을 전승공이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마종공이 쳐들어 올 것이다.
주어가 전승공인 것은 상관없다. 아무튼 나이로 저격당한 건 맞으니까. 사실 아무도 마종공이 120살인 것에 신경 쓰지 않는데, 하필 본인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다른 사람들도 신경 쓰게 된다. 이게 그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는 그런 건가.
“아카데미에 고귀한 혈통이 여럿 모였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마음 고생이 심하겠군.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울 정도야.”
“제가 맡은 일에 어찌 각하의 도움을 바라겠습니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나와 전승공은 동시에 찻잔을 입에 댔다. 잠깐의 침묵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전승공이었다.
“그래, 칼 군이라면 잘 해내겠지. 황태자 전하께서도 칼 군에 대한 신뢰를 보이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쩐지 갑자기 부르더니, 역시 단순히 차나 마시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현상 유지인가.’
아카데미에 모인 고귀한 혈통. 류티스와 라테르, 타니안을 이르는 말이지만 제국 입장에서는 아인테르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전승공이 한 말은 간단하다. 황태자의 아인테르 주시 명령으로 고생하고 있는 건 유감이지만, 황태자의 뜻을 돌릴 수는 없었다고. 그래도 황태자가 그 이상 나아갈 생각은 없으니 지금처럼 내 주관으로 아인테르를 주시하면 된다는 말.
그나마 다행이다. 언제 황태자가 미쳐서 아인테르를 처리하라고 말할지 걱정이었는데, 전승공이 현상 유지로 굳히는 것에 성공했다. 일방적으로 사위인 황태자의 편을 들지 않고 내 상황을 신경 써준 것.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무얼. 다 칼 군이 쌓은 것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내 감사에 전승공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도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이렇게 자잘하게 빚이 쌓여가니 마음이 편치는 않다.
전승공은 황태자가 현상 유지를 택했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다른 업무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전달해야 하는 사안이 있다면 그게 더 큰일이기는 하지.
그렇게 차나 마시며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던 중,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 강녕하십니까?”
“아마 그럴 걸세. 나와 마종공을 제외하면 영지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잘 지내는지 알 수가 있나.”
다행이다. 혹시 다른 공작에게도 소환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제도에 없다면 그럴 걱정도 없다. 하긴 제도에 일이 있는 전승공과 마종공이 특이한 거지, 공작들은 보통 영지에 머물다가 황제가 부르면 달려가는 경우가 잦다.
사실상 은퇴 상태인 철혈공, 사업에 몰두하는 황금공, 영지에서 심시티를 즐기는 것 같은 현명공. 제도에서 보기 드문 공작들이란 건 잘 알지만, 제도에 없다는 확답을 들으니 마음이 좀 놓인다.
가슴을 채우는 편안함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전승공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철혈공 소식은 내가 칼 군에게 물어야 하지 않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런, 늙었더니 실언을 했군. 내 말은 잊게.”
그러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누가 봐도 의도적인 발언.
‘어디까지 퍼진 거지.’
대충 짐작되는 것이 있어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마 마르게타가 철혈공에게 연회에 대해 말하고, 철혈공은 그걸 또 전승공에게 말한 모양이다. 춤이라고는 춰본 적이 없던 내가 갑자기 마르게타와 춤을 췄다고 하니 흥미로웠겠지.
‘부담스럽네.’
전승공은 내가 혼인은 커녕 약혼도 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러니 이렇게 실언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은근슬쩍 마르게타를 언급하며 떠보는 것이겠지.
다른 의도 없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발언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잊을만하면 언급하는 것이 조금은 무서울 정도다. 명절에 인사드리러 가는 어르신도 아니고.
내가 분명 가주에게도 이런 압박은 안 당했는데. 누가 보면 내가 전승공의 아들인 줄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