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0)
로판 속 공무원 600화(601/945)
눈을 끔뻑이는 에리의 모습에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줄까 고민했다.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 그냥 그렇게 알아들을 것이지, 왜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거지?
괘씸하다. 대체 뉘렌 공작가의 공녀이자 이 나라의 국모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비록 아카데미 시절에는 조금 특이한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젊은 날의 혈기였을 뿐이다. 게다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에리랑 같이 한 거였잖아.
물론 에리가 입학하기 전에는 나 혼자 아카데미를 누비고 다녔었지만.
‘참자.’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언짢음을 가라앉혔다.이 자리는 둘째가 생긴 것을 자랑하기 위해, 곧 결혼을 할 에리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다시피 나와 폐하의 결혼을 축하해 줬던 에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자리다.
“축하해요, 선배!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최고죠!”
가족들과 가신들조차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을 했던 결혼. 황자와 공녀의 결혼이기에 최소한의 구색은 맞추었지만 썩 화려하지는 않았던 결혼.
그 결혼식 속에서 에리는 우리보다 밝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아카데미 재학 내내 나를 언니처럼 따랐던 아이가 정말 내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기뻐해 줬다.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감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없는 거다. 나와 폐하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결혼을 밀어붙였으나 진심 어린 축하와 축복은 포기했었다. 그런 것 따위는 폐하가 황태자가 되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
‘스스로를 속인 거였지.’
허나 에리의 축하를 받은 순간 깨달았다. 나는 정말 축하와 축복을 포기한 게 아니라고. 받을 수 없으니 애써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한 거라고.
그렇기에 에리의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했었다. 내가 원하던 말을 가까운 동생에게 들을 수 있었으니.
“좋은 인연을 두었소, 비.”
당시의 폐하도 에리의 축하 인사에 미소를 지었을 정도였다. 정치 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축하해 주는 하객이자 부인의 친한 후배. 남편으로서 기뻐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날 이후로 에리는 우리 부부의 은인 아닌 은인이 되었다. 에리가 결혼할 상대를 물어온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남 부럽지 않은 결혼식을 열어줄 거라 다짐했다.
…결혼할 상대를 물어오는 단계부터 고난일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기에 외면하지도 못했다. 아직도 에리가 장관에게 고백도 못 하고 쩔쩔매던 걸 생각하면 속이 터져.
‘잘 풀려서 망정이지.’
조심스레 와인을 홀짝이는 에리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왜, 왜 웃어?”
“하객석에서 박수나 칠 줄 알았던 애가 신부 자리에 선다고 하니 신기해서.”
그 말에 에리가 잠시 울컥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양심이 있다면 반박할 수가 없지.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럴 수 없어.
“에리.”
“넹…”
“축하해. 이걸로 빚은 갚은 거다?”
빚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에리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더니 이내 히히 웃음을 흘렸다.
“그거 몇 년 전이라 이자 많이 쌓였는─”
상상을 초월한 망언이 튀어나오자마자 에리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낀 채 졸랐다.
최대한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건 못 참겠다.
“으게에에에엑!”
“우리 도련님도 결혼해야 하는데, 네 결혼식 날짜하고 겹치게 진행해 줘?”
“미, 미아아아안…!”
내 은근한 협박에 에리는 양팔을 버둥거리며 사과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 섞인 협박이다. 도련님 결혼식은 내년으로 생각 중이라, 지금부터 아무리 서둘러봤자 올해 가을에야 가능할 거다.
“나는 은혜도 모르는 하얀 머리 짐승입니다. 복창.”
“나는 은혜도 모르는 하얀 머리 짐승입니다…!”
“지금 내 머리색 가지고 트집 잡는 거야?”
“서, 선배가 하라고 했잖아!”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에리의 말을 무시하며 더욱 강하게 졸랐다.
감히 뉘렌 공작가의 상징인 은색 머리카락을 모욕하다니. 우리 황태녀와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님도 은발이신데.
‘괘씸한 것.’
부디 장관이 이 철없는 녀석을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
에리와의 결혼식은 이오네스 후작령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서른이 가까워지는 딸의 결혼식. 실로 경사스럽고도 축복해야 할 행사라 마살로 후작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어 결혼식 준비가 이루어졌다. 오죽하면 현 후작인 장인어른, 후작위를 물려받을 예정인 소가주의 결혼식보다 많은 예산이 투입됐을 정도겠나.
그러나 마살로 후작가의 그 누구도 질투나 언짢음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 돈을 써서 에리를 시집 보낼 수만 있다면 세 배는 쓸 수 있다는 기세를 풍겼다.
“너도 어지간히 불효녀였네.”
결혼식에 투입된 물자, 인력 목록을 확인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배려 덕분에 황실의 재산도 제법 투입되었으나, 마살로 후작가는 황실의 재산을 받았다고 자신들의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저 더 많은 돈, 더욱더 많은 돈을 투자할 뿐.그동안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을지 알 수 있는 영수증이었다.
“결혼을 천천히 한 덕에 장관님 같은 신랑을 찾은 건데요?”
허나 에리는 뭐가 잘못이냐는 듯 가슴을 펴며 우쭐거렸다.
그냥 불효녀가 아니라 인페르노 효녀였다. 그 천천히라는 짧은 단어에 얼마나 많은 마살로 가문의 눈물이 담겨있을까. 눈물을 마시는 효년 같으니라고.
“그러고 보니 에리야.”
“넹?”
“나 언제까지 장관님이라 부를 거냐?”
그 말에 에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순간 내가 이상한 말을 한 건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예비 신부가 예비 신랑을 직책으로 부르는 게 말이 되냐.”
짧은 침묵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하다못해 리제랑 린도 오라버니, 오빠라는 부드럽고 풋풋한 단어로 불러줬다. 장관님은 너무 공적인 칭호잖아.
“그치만 이게 애칭 같아서 좋지 않아요?”
“자기 이름은 에르제베트라고 펑펑 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몇 년 전, 제도 길바닥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에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역시 멘탈이 튼튼한 에리한테도 그 일은 흑역사구나.
‘다행이다.’
혹시 에리가 감정과 수치를 모르는 괴물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어-기,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얼굴이 붉어졌던 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멀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장관님을 이름으로, 장관님은 절 누나라고 부르면 완벽할 것 같은데.”
“난 나보다 약한 사람은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얘가 나보다 연상은 맞지만 차마 누나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감정과 본능의 문제야.
“누나라고 불리고 싶으면 신혼 때 노력해보든가.”
그러나 이대로 넘어가면 에리의 입술이 하루 종일 삐죽 튀어나올 터. 에리가 승리할 수 있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언급해줬다.
강하고 약한 게 꼭 무력으로 결정나는 건 아니다. 어느 장소에서든, 어느 방법으로든 강약을 나눌 수 있다.
‘신혼 때도 내가 이기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0인 것과 0.001이라도 존재하는 건 다른 법.내 깊은 뜻을 에리도 알아 들었는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럼 저랑 하기 전에 미리 몇 발 빼고 오─”
“아가리!”
결국 오늘도 에리의 입술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얘도 감정과 수치가 있다고 좋아한 게 방금 전의 일인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여차저차 결혼식 날이 밝았다.
“부하가 부하와 결혼하는 날이 다 오는구만.”
그리고 장관은 이번 결혼식도 오픈런 수준의 시간에 참석했다.
장관이 할 일도 없냐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이 제국에서 재무성 장관과 감찰성 장관 중 더 한가한 사람을 고르라면 명백히 후자지 않나.
“며칠 후면 페디 동생이 하나 더 생기는 거냐?”
“뭐, 그건 하늘만 아는 일이죠.”
이번에도 허니문 베이비냐는 말에 머쓱히 머리만 긁적였다. 알 거 다 아는 양반이 왜 굳이 몰어보실까.
“동- 생?”
머쓱한 아빠와 달리 장관의 품에 있던 페디는 동생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페디는 황태녀 덕분에 동생이라는 단어에 익숙하다. 아마 티티, 엄마, 아빠, 대부 다음으로 자주 듣거나 말하는 단어가 아닐까? 페디는 누군가의 동생이고, 또 넷이나 되는 동생을 가진 장남이기도 하니까.
“그래, 동생. 우리 페디에게 새 동생이 생길 거란다.”
“도옹- 생!”
장관의 확언에 페디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미묘한 기분이다. 이미 동생이 잔뜩 있는 페디가 새 동생이 생긴다는 말을 반기다니. 페디가 이럴 정도면 황태녀는 얼마나 황제와 황후에게 동생을 졸라댈까.
‘…황실이 번창하면 좋은 거지.’
구성원이 상황, 황제, 황후, 황태녀, 아인테르뿐일 정도로 쪼그라 든 황실이다. 황제는 황실의 가주로서 많은 자식들을 볼 의무가 있으니, 황태녀가 동생을 보챈다면 실로 제국의 홍복이다.
우리 황제. 조만간 황금공도 즐겨 먹는다는 아티니 장어를 보내줘야겠어.
“흐으음.”
“왜 그러십니까?”
저택에 쌓인 장어가 얼마나 되나 계산하던 중, 장관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침음을 흘렸다.
“1과장의 나이가 28살이었지?”
“이제 29살입니다. 1년 지났잖아요.”
“그럼 너는 25살이고.”
“예, 뭐. 그렇죠?”
그러자 장관은 더욱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뭔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러는 건데.
“…왜 네가 연상 같지?”
이어지는 말에 의문이 풀리고 말았다.내가 에리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장관이 느끼는 감정이 비슷한 모양이다.
“연상이고 연하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서로 마음만 맞으면 그만이지.”
“마음이 너무 잘 맞아서 문제 아니냐.”
“그건 그렇죠.”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하고는 너무 친밀하고, 너무 마음이 잘 맞아서 문제기는 하다. 그것 때문에 에리를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을 정도니.
“뭐, 첫 연상 부인 축하한다.”
“추- 하-”
장관이 내 어깨를 토닥이자 페디도 내 쪽으로 손을 뻗어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장관도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