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3)
로판 속 공무원 603화(604/945)
시종에게 황태녀가 저택에 온다면 성심을 다해 모시겠다고 한 다음날.
“때부! 때부!”
황후궁 시녀장의 품에 안긴 황태녀가 네 마리의 인절미와 함께 강림했다.
생각보다 빠른 방문이라 조금 놀랐다. 황제가 신혼 중인 나에게 사람을 보내서 ‘시간 괜찮냐?’ 라는 문의를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설마 황위 계승 서열 1위인 황태녀의 외출이 하루 만에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꽤나 시달렸구나.’
같은 아비로서 황제에게 애잔함을 느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터졌다면 그것은 황제의 결정이 아니다. 그저 자식을 이기지 못한 한 아비의 가련한 결단일 뿐.
“전하. 어서 오십시오.”
“웅! 나 와써!”
아무튼 눈을 반짝이는 황태녀에게 고개를 숙이자, 황태녀는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가 지나서 그런지 말도 더 유창해지고 목소리도 또렷해졌구나. 저 목소리로 황제에게 떼를 썼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하다.
“시녀장! 내려져!”
“예, 전하.”
황태녀의 말에 시녀장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황태녀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엎드리는 네 인절미.
“2호!”
– 왈!
황태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그중 한 녀석의 등에 올라타려고 했다.
“안 됩니다.”
“으에?”
– 멍?
그런 황태녀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 넣어 들어올렸다.
인절미에 타는 건 상관없다. 이미 인절미 라이더가 되어 황궁을 누빈 황태녀니 말릴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푹신한 풀이 깔린 황궁의 정원이 아닌, 성인이어도 넘어지면 피를 볼 수 있는 돌바닥이다. 혹여나 황태녀가 떨어지면 경상이 아닌 중상─ 혹은 그 이상으로 다칠 가능성이 높다.
“때부! 내려져!”
버둥거리기 시작한 황태녀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대녀가 대부 앞에서, 손님이 주인 앞에서 다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으니.
“오늘은 다른 걸 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황태녀를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존재한다.
“다른- 거?”
내 말에 황태녀도 흥미가 갔는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다른 거. 늘 인절미를 타고 다닌 황태녀가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
“잠깐만 가만히 계신다면 바로 태워드리겠습니다.”
“…웅!”
잠시 고민하던 황태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녀가 무작정 떼를 쓰는 아이가 아닌 타협이 가능한 아이라는 건 황실과 제국의 홍복이다.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자 차기 황제가 고집이 강하다면 여러모로 힘들 테니.
페디가 두 발로 걷기 전, 티티와 함께 저택을 누비면서 타던 탈것.이제 티티를 애용하는 페디기에 한동안 휴업 상태에 돌입했던 쌍두마차.
자선과 친절이 꼬리에 매단 상태로 이끄는 보자기 마차가 다시 개업을 시작했다.
“와아! 와아!”
보자기에 탄 채 저택 복도를 누비는 황태녀는 만세까지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흐뭇하다. 동물을 좋아하는 황태녀라면 이 보자기 마차도 좋아할 줄 알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웅!”
“다행입니다!”
자신들이 놀아주고 있는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걸 명확히 알고 있는 두 성수는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달렸다.
그 와중에 혹여나 황태녀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속도를 조절하고, 코너를 돌 때는 영혼을 갈아가며 감속하는 것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고맙다. 너희 덕분에 차기 황제가 웃을 수 있어.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세상에 말하는 짐승들이 있다니.”
그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자 옆에 있던 시녀장이 작게 입을 열었다.
“평범한 짐승은 아니니까요. 차기 성자에게 이름을 받은 일종의 성수 같은 녀석들입니다.”
“성수라.”
내 말에 시녀장은 사슴과 망아지의 형태를 한 자선, 친절을 바라봤다.
“성수와 어린 시절을 함께 한 황제. 마치 동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말하는 동물, 성수들과 함께 자란 제국의 황제? 시녀장의 말처럼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드래곤 로드를 타고 전장을 누빈 에이만카 대제와 맞먹는 일화다.
“누우- 나!”
– 왈!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자, 페디를 태운 티티가 위풍당당히 걸어오고 있었다.
‘누나…’
제국백 후계자가 황태녀에게 쓰기에는 너무 가벼운 호칭이나, 황제도 황후도 허락한 호칭이라 황실의 충복인 시녀장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직 어린 페디에게 전하라는 호칭은 너무 어려운 편이다. 잘못 가르치면 황태녀의 이름을 전하 리브노만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린아이들끼리 누나, 동생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데…
‘왜 불안하지?’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이 사소한 칭호가 평생 페디를 속박할 족쇄가 될 거라고.이 누나, 동생 관계가 평생 이어져 차기 황제와 차기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고.
너무 과한 걱정 같지만 황제와 아무런 연도 없는 나도 황제의 일등 노예로 구르고 있지 않나. 그런 판국에 일등 노예의 적장자, 황태녀의 소꿉친구는 오죽할까.
“뻬디!”
그 와중에 페디의 목소리에 반응한 황태녀는 활짝 웃더니 두 성수의 꼬리를 꾹꾹 잡아당겼다.
“뻬디한테! 뻬디한테!”
“알겠습니다!”
황태녀도 페디를 동생처럼 여기고 있기에 흐뭇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페디의 돈 많은 백수 라이프를 위해서라면 황태녀와 과도하게 친해지는 건 지양해야 한다. 허나 아직 먼 미래의 일 때문에 사이좋은 두 아이를 떨어뜨려 놓는 건 어른의 행동이 아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어떻게든 될 거다. 애초에 친하다고 무조건 노예로 삼는 건 황제의 행동이지, 저 작고 사랑스러운 황태녀의 행동이 아니다. 그런 흉악한 짓은 황제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우리 페디는 꼭 돈 많은 백수로 지낼 수 있을 거다.
“때부!”
“예, 전하.”
“뻬디! 이제 쪼콜릿 먹을수이써?”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황태녀를 향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대녀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온 날이고, 기분 좋게 놀고 있는 날이다. 이왕 기분이 좋은 거 더 좋게 해줘야지.
“예.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와!”
그러자 황태녀가 품에서 주섬주섬 초콜릿을 꺼내 포장지를 벗겨냈다.
이제는 기특할 정도다. 동생에게 맛있는 걸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매일 초콜릿을 품에 안고 다니다니.
“뻬디! 선물!”
“우웅?”
고개를 갸웃거린 페디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맛있는 거야. 먹어 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뻗어 황태녀의 초콜릿을 잡─
“으에?”
“이런.”
으려다가 놓치고 말았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무언가 꽉 잡고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바닥이 아닌 티티의 머리에 떨어져서 다행이다. 털만 조금 털어내면 충분히 먹을 수 있지.
“우리 페디. 아~ 하렴.”
자기 머리에 초콜릿이 떨어졌든 말든 해맑게 헥헥거리는 티티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초콜릿을 들어 페디의 입 쪽으로 들이밀었다.
“마시-써!”
그리고 황태녀가 간절히 바랐을 반응이 돌아왔다.
초콜릿을 입에 넣은 페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연신 맛있다는 말을 쏟아냈다. 황태녀의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마침내 보답받은 것이다.
“아웅!”
– 멍?
“페, 페디야! 그건 먹는 거 아니야!”
다만 너무 마음에 들었는지, 초콜릿이 잠깐 머물렀던 티티의 머리털까지 물고 말았다.
“벹어! 지지야, 지지!”
– 끼이잉…?
지지라는 말에 상처를 받은 듯 티티가 애잔한 울음소리를 냈지만 다독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매일매일 씻기고 있어서 티티의 털이 더러운 건 아니나, 개털이 어린아이의 호흡기를 타고 들어가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뻬디! 떽!”
심지어 황태녀도 그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황태녀 기준으로 엄하다는 거다. 내 기준으로는 화가 난 뱁새가 무섭게 적을 위협하는 걸로 밖에 안 보여.
“친구! 개롭히면 안대!”
“도련님. 아무거나 입에 넣으시면 안 됩니다.”
나와 황태녀, 시녀장의 필사적인 만류 덕에 티티의 털은 페디의 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대신 입안에 있던 초콜릿 일부가 털에 묻어버려서, 황금색을 자랑하던 티티의 털이 갈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브라운 리트리버…’
애완견의 종이 바뀌는 것을 직관하는 건 제법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페디와 신나게 저택을 누비던 황태녀는 지쳤는지 낮잠에 빠졌다.
“왜 또 나인 거냐…”
세쌍둥이의 원픽인 장생을 끌어안은 채로.
아무래도 장생의 외견이 요크셔테리어라 그런지 어린아이들에게 유독 사랑을 많이 받는다. 죽음이라 불리던 과거를 생각하면 조금 묘하지만, 현재 모습 자체는 순하고 귀여운 애완견 그 자체지 않나.
– 멍!
“그만 핥아라! 이 노란 것들!”
그리고 황태녀 곁에 오밀조밀 모여 앉은 인절미들은 황태녀의 품에 안긴 장생이가 신기했는지, 얼굴과 몸을 핥으며 관심을 표했다.
“우우웅…”
“전하가 깨면 일주일 내내 세쌍둥이 침대에 넣어둔다.”
그 말에 격렬히 발악하던 장생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막상 저러니까 열받네. 우리 세쌍둥이가 뭐 어때서.
“전하께서 저리 곤히 주무신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생의 발악이 진압되자 시녀장이 감동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황궁의 상황은 잘 모르나, 시녀장의 말을 들으니 대충은 알 것 같다. 황궁에서는 체력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뽈뽈뽈 돌아다니는 황태녀를 보호하느라 벅찼을 테지.
그러나 우리 집에는 무려 열하나나 되는 성수들이 존재한다. 황태녀의 체력 정도야 충분히 뺄 수 있다.
“앞으로 자주 황궁에 방문해야겠습니다.”
“그래주신다면 저희가 감사할 따름이지요.”
내 상습 입궁 발언에 시녀장이 냉큼 고개를 숙인 걸 보면 확실하다.
황태녀는 황궁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체력 괴물이다.
“칼.”
“응?”
“저기 좀 보세요.”
크라시우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황태녀의 낮잠을 구경하던 마르가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핫.”
마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페디가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 채 아장아장 황태녀에게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페디도 피곤했나 보네.”
“후후, 전하랑 같이 놀았잖아요.”
이윽고 황태녀 옆에 누운 페디를 보며 나도 마르도 미소를 지었다.
공교롭게 담요마저 검은색 바탕에 은색 자수가 그려진 담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