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4)
로판 속 공무원 604화(605/945)
신분의 벽은 드높고도 드높다.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크다면 그 둘은 대등한 존재라고 할 수 없고, 신분이 더욱 높은 쪽이 낮은 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신분이 완전히 동급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이면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바로 나이라는 강력한 변수가.
‘상황도 트릭시는 함부로 못 대했지.’
황제─ 그것도 망해가던 제국의 멱살을 잡고 제2의 전성기를 열어버린 명군과 다섯 공작 중 하나. 둘 중 누가 더 높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인 공작이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라면? 제2의 전성기를 연 황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공작으로 군림한 존재라면?
여러 황제를 섬겼고 다른 공작들의 존중을 받는 최연장자 공작이라면 아무리 황권이 강한 황제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다못해 평민도 장수를 하면 존중을 받는데, 그것이 공작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나이는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변수다. 나이 차이가 압도적이라면 다소의 격차는 가뿐히 메울 수 있다.
“와아! 예뻐! 신기해!”
그리고 그건 황태녀도 마찬가지였다.
페디와 함께 새근새근 잠들었던 황태녀는 그 사이에 체력을 회복했는지 번쩍 눈을 떴고, 마침 근처에 있던 트릭시의 길고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물론 마종공을 편히 대하는 것, 트릭시의 머리카락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는 건 상황과 황제여도 불가능한 행동이다. 하지만 최연장자로서 군림하는 트릭시처럼 황태녀는 최연소자로서 군림하는 존재.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하면 봐주는 분위기가 암암리에 있다.
덕분에 황태녀는 트릭시의 머리카락 위에서 방실방실 웃으며 놀 수 있다. 황태녀는 아직 어린아이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웅!”
트릭시도 자그마한 아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놀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마침 황태녀의 머리카락은 은색. 트릭시가 직접 낳은 세쌍둥이의 백발과 비슷해서 자식과 겹쳐보는 걸 수도 있다.
“냄새! 조아!”
“후후, 다행입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백발, 바닥에 질질 끌려다님에도 냄새는커녕 포근한 향기만 풍기는 머리카락.
황태녀 입장에서는 신세계를 보는 기분이고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기분이겠지. 저렇게 환장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히히.”
격렬하게 트릭시의 머리카락 위에서 데굴거린 황태녀는 머리카락 일부를 이불처럼 덮었다.
“저, 전하. 공작께서 불편해하실 겁니다.”
그 모습을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지켜보던 시녀장이 급히 황태녀 앞에 쪼그려 앉아 사정했다.
하늘 같은 황태녀를 시녀장이 무단으로 들어 올릴 수는 없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트릭시의 머리카락을 둘둘 감고 있는 황태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트릭시의 머리카락도 덩달아 뜯길 가능성이 있다.
“본작은 괜찮다네. 우리 아이들도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자주 노는데, 황태녀 전하라고 안될 게 어디 있겠나.”
그런 시녀장을 향해 트릭시는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트릭시의 말처럼 이미 트릭시의 머리카락은 우리 아이들의 공공재로 변모한 지 오래다. 페디는 저택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지치면 트릭시의 머리카락을 이불 삼아 휴식을 취하고, 기어다니기 시작한 세쌍둥이는 침대보다 트릭시의 머리 위에 누워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지어 프리드리히도 트릭시를 볼 때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중이다. 거의 고양이 앞에 캣닢을 흔드는 수준이지.
“아우?”
“뱌우우…”
“뺘!”
지금도 세쌍둥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트릭시의 머리카락을 둘둘 감거나 입에 넣어 오물거리고 있지 않나.
그러니 황태녀 하나 추가되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황태녀는 완전히 남남도 아니고 내 대녀니까.
“우웅?”
“페디도 이리 오렴.”
이윽고 페디도 눈을 뜬 덕분에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이 오밀조밀 트릭시의 머리에 몸을 뉘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한 광경에 시녀장이 멍하니 입을 벌린 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때부! 부러어! 나도 여기서 살고시퍼!”
그렇게 한참이나 트릭시의 머리, 페디의 볼따구, 세쌍둥이의 손을 매만진 황태녀는 양팔을 버둥거리며 칭얼거렸다.
인정한다. 솔직히 내가 봐도 이 저택은 어린아이가 놀기에 최적인 환경이다. 페디가 낙견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돼서 복도에 매트를 깔아뒀고, 말하는 동물들이 놀아주며, 대륙에 둘도 없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
그리고 아직 황태녀의 관심이 머리에 쏠려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이종족 보호 구역에만 있는 엘프도 넷이나 머무르고 있다. 거의 환상의 나라 크라시우스 랜드다.
“언제든 놀러 오십시오. 전하라면 언제든 환영하겠습니다.”
“지인- 짜?”
“물론입니다.”
내 말에 빵긋 웃는 황태녀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황제가 황태녀의 외출을 허락한 것은 내가 신혼이라는 특수 사항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절대 황태녀를 황궁 밖으로 보냈을 리 없다.
그런데 내 허락을 들은 황태녀가 다음에도 대부의 집에 가고 싶다고 조른다? 황제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터.
‘알 게 뭐냐.’
허나 그건 내가 고려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딸의 고집을 달래는 건 아비의 역할이지 대부의 역할이 아니지 않나.
그렇기에 황제를 배려하여 ‘오시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황태녀의 미움을 받더라도 황제가 받고, 원망을 받더라도 황제가 받는 것이 맞다. 그것이 아비의 역할이니까.
“다음에도! 뻬디 줄 초코릿! 가져올께!”
“하하, 기대하겠습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황태녀를 보니 나도 기뻤다.
황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 장관. 대체 황태녀에게 무슨 말을 한 건가.
씁쓸하고도 한이 서린 얼굴로 연락을 건 황제.
그 모습을 보자 뿌듯함이 몰려왔다. 황태녀가 내 예상대로 황제에게 떼를 썼구나.
“전하께서 소신의 저택에서 노는 것을 즐거워하셨기에,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오시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 아니, 왜 그런 말을.
“전하께서는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되실 분이십니다. 일개 신하이자 대부의 저택에 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나이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황제는 침통히 입을 다물었다.
차기 제국의 주인에게 가지 못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녀가 대부의 저택에 방문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아가리의 마술사인 황제여도 저 두 가지는 반박할 수 없다.
– 장관이 황궁에 와도 크게 다를 건 없거늘, 황태녀가 어찌 장관의 저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소신에게도 전하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혹여나 넘어져서 다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복도에 푹신한 매트를 깔아두었습니다. 색깔도 알록달록하니 그것이 마음에 든 건 아닐는지.”
그러자 겨우 입을 열었던 황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저택은개인 저택이라 복도를 매트로 도배하는 광기를 실현할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황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황궁은 제국을 이끄는 고위 관료와 귀족들, 중대사를 논하기 위한 타국 사절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그런 곳을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매트로 도배하는 건 황실의 권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결정적으로 황궁은 내 저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건물들 사이사이의 간격도 넓다. 그 공간에 전부 매트를 깔 바에는 황태녀를 위한 건물을 새로 짓는 게 빠를 거다.
– 별궁을 새로 만들어야 하나…”
황제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앞으로 황태녀가 자주 방문할 걸세. 내 장관을 믿고 보내는 것이니 황태녀가 원하는 만큼 놀아주게나.
“예?”
이윽고 예상치 못한 항복 선언에 절로 반문이 나왔다.
황제가 황태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는 건 당연한 미래다. 이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며, 이는 황제여도 다를 것이 없다. 굴복 시점이 문제지 굴복 자체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일에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무슨 황제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지는 건데.
‘나약한 녀석.’
부끄럽다. 자식에게 너무 오냐오냐하는 건 도리어 교육에 좋지 않거늘. 너는 크펠로펜의 아비라 할 자격이 없다.
– 짐이 어지간한 건 달랠 수 있었으나, 마종공의 머리카락을 다시 보고 싶다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
‘아.’
이어지는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확실히 트릭시의 머리에 홀린 거라면 답이 없지. 그걸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따라할 건데.
– 심지어 황태녀가 황후에게 머리를 바닥까지 기를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네.
“…….”
– 할 말 없나?
“죄송합니다.”
황제의 따가운 눈초리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황궁에 독을 풀어버렸다.
***
“때부! 뻬디! 나 와써!”
오늘도 황태녀가 저택에 방문했다.
해맑은 미소, 똘망똘망한 눈빛, 또렷한 목소리.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마죵공! 안녕!”
“예, 전하. 어서 오십시오.”
나를 향해 오도도 달려온 황태녀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귀엽다. 아직 어눌한 발음으로 마종공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다니. 우리 아이들도 조금만 더 자라면 저렇게 되겠지?
‘부디 지금처럼 순수하게 자랐으면.’
내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는 황태녀의 모습에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이 아이는 순수하게 자라 달라고.
죽은 2황자 도르고스도 한때는 해맑은 아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성장 과정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상하게 변해버렸고, 2황자가 황위에 오르면 기껏 부흥한 제국이 다시 휘청이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황제 폐하를 닮았다면 멀쩡히 자라겠지.’
머리카락 끝자락을 황태녀에게 건네며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냈다.
그래, 황태녀는 멀쩡히 자랄 것이다. 상황 폐하와 황제 폐하, 이드라펜 후작은 전부 멀쩡하지 않았나. 도르고스가 이상한 것이니 황태녀도 정상적으로 자랄 것이다.
만약, 아주 만약이지만 황태녀가 2황자처럼 어긋날 것 같다면─
‘엄히 다스려야지.’
칼의 대녀가 올바른 아이로 자라기 위해.
내 아이들이 섬겨야 할 황실과 제국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