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6)
로판 속 공무원 606화(607/945)
황태녀가 우리 저택에 놀러 오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열흘째.
“오늘도 왔어요?”
“응.”
마침내 방 안에 있던 에리가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부인 중 최약체인 에리는 신혼 당일에 기절을 겪었고, 1주 만에 신혼이 끝나버릴 만큼 연약했기에 그 여파도 오래갔다. 오붓했던 1주의 시간을 보낸 대가로 열흘이나 끙끙거리지 않았나. 어떤 부인도 보이지 못한 진귀한 광경이었다.
‘신기록이 이런 신기록을 말한 거였나.’
겨우 평온한 안색을 보이는 에리의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른 부인들은 부부의 시간을 보낼 때 힘들어했을지언정,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골골거리지는 않았다. 허리가 아파도 식당까지 가서 다 같이 식사가 가능했다.
허나 에리는 자기 방에 드러누워 혼자만의 휴식을 취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왜 그렇게 봐요?”
“툭 건드리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 말에 에리가 히죽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제가 그렇게 가련하고 청순하게 보여요? 옆에 두지 않으면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이?”
“휙 날아가는 게 아니라 픽 죽을 것 같은데?”
내 정정에도 불구하고 에리는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틀렸어. 이미 내 말은 귀에 담고 있지 않아.
“그건 그렇고.”
여전히 내 옆구리를 찌르는 에리의 볼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대답을 들어야 하기에 입술을 잡을 수는 없지.
“이제 움직이는 데 문제 없지?”
“녜, 녜헤에…”
만족스러운 대답이라 금방 볼을 놓아주었다.
그럼 됐다. 에리가 언제 방에서 나오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거든.
“황태녀 전하가 너 찾더라. 아프다고 하면 걱정할 것 같아서 잠깐 다른 곳에 갔다고 했어.”
“잉? 전하가요?”
“어.”
덤덤히 대답하자 에리는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히히, 전하도 제 매력에 빠지셨나 봐요!”
“세상이 말세네.”
가장 엮여서는 안 될 인물과 엮여버린 황태녀가 안타까웠다. 어린 나이에는 좋은 것만 보고 자라도 부족하거늘.
‘…엄마 친구라 찾는 건가?’
이윽고 황태녀가 에리를 찾는 이유를 추측했다.
일단 가장 그럴 듯한 추측은 에리가 황후의 친한 후배라 찾는 것이다.엄마의 친한 후배면 황태녀 입장에서는 이모라고 할 수 있잖아.
‘얘가 차기 황제의 이모.’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아찔해진다. 황후의 온화하고 똑 부러지는 교육을 받던 황태녀가 에리라는 매운맛 이모를 버틸 수 있을까?
순간 황태녀와 제국의 미래가 걱정됐다. 부디 황태녀가 에리에게 이상한 걸 배우지 않기를.
평소처럼 페디랑 복도를 누비던 황태녀는 에리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기수를 돌렸다.
“멍멍이! 이모한테 가!”
– 멍?
이모라는 말에 잠깐 혼란에 빠진 것 같던 인절미는 눈치껏 에리에게 다가갔다.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녀석이다. 이모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봤을 텐데.
“이모! 안녕!”
“전하도 안녕하세요!”
황태녀의 당찬 인사에 에리도 무릎을 구부리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모! 보고시펏써!”
“저도 전하를 엄~청 보고 싶었어요!”
“근데 왜 나 안 보러왓서?”
삐졌다는 듯 볼을 부풀리는 황태녀의 모습에 슬쩍 에리를 바라봤다.
에리와 황후 사이에 친분이 있는 만큼 황태녀와도 연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 황태녀에게 이모 대우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름만 이모인 게 아니라 제법 친한 이모로.
“히히, 죄송해요. 저도 우리 전하 보고 싶었는데 일이 있어서요!”
“몰라! 이모 나빠! 나 드래곤 태워준대쓰면서!”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황태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머리가 굳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드래곤을 태워준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하필 황태녀는 드래곤과 연이 깊은 리브노만의 일원이고, 드래곤을 태워주겠다고 한 사람은 기행의 상징인 에리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믿으나, 만약 황태녀가 말한 드래곤이 진짜 드래곤이면? 에리가 나도 제국도 모르는 사이에 새끼 드래곤을 몰래 기르고 있는 거라면?
‘이딴 걸로 불안하면 안 되는데.’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다.
“그럼 그동안 못 해드린 만큼 잔뜩 해드릴게요!”
“와아!”
그 와중에 에리와 황태녀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를 진행 중이었다.
“우리 전하! 날아라! 날아라!”
“우와아아!”
그리고 에리는 황태녀의 허리를 잡은 채 양팔을 위로 올리며 황태녀에게 윗공기의 맛을 느끼게 해줬다.
‘저거였구나.’
급속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드래곤이 뭔가 했는데 비행기 놀이의 판타지 버전이었다.
이 세계에 비행기라는 이동수단이 없으니 현지화가 되는 건 이해하나, 애들 놀이에 쓰기에는 너무 살벌한 이름 아닌가. 차라리 나비나 독수리로 순화했다면 얼마나 좋을─
“날아라!”
“와아아아아!”
에리의 손과 황태녀의 몸이 분리되었다.
황태녀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날았던 몸이 다시 에리의 손에 안착했다.
…
“야 인마!”
1초 정도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황급히 달려갔다.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아무 이유 없이 붙은 게 아니었다. 정말 드래곤처럼 흉악한 놀이였잖아.
“아잇,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마자! 때부 시끄러워!”
허나 내 상식적인 반응에도 에리와 황태녀는 툴툴거릴 뿐이었다.
“이모! 한번더!”
“좋아요!”
“안 됩니다!”
거대한 광기와 광기에 물들어가는 자그마한 순수에 기겁했다.
‘좋기는 뭐가 좋아.’
그러다 잘못되면 내 모가지가 드래곤 타!
두 번 봤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은 드래곤 태우기를 강제 종료한 후, 치사하다며 울먹이는 황태녀를 등에 태운 채 저택을 돌아다녔다.
단순히 아이들과 함께 기어다니는 수준을 넘어 인간 말이 되는 건 조금 씁쓸한 심정이나, 귀중한 황태녀의 옥체가 허공을 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때부! 멍멍이보다 푹씬해!”
“영광입니다.”
그야 등과 옷 사이에 방석을 깔아뒀으니 푹신할 수밖에 없다. 나한테는 인절미들처럼 보슬보슬한 털이 없으니.
“장관님.”
“왜.”
“저 오늘 방에서 나온 환잔데…”
그리고 내 옆에서 나란히 기어 다니던 에리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전하. 이모도 전하를 태우고 싶다고 합니다.”
“진짜!?”
물론 그 불만을 받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에리를 팔았다.
어딜 괘씸하게 불만을 표해. 내가 누구 때문에 사족보행 중인데.
“이모! 나 이모 타도대!?”
“어… 그…”
“안대…?”
초롱초롱한 황태녀의 눈빛에 에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켄타우로스 놀이예요!”
“와! 죠아!”
황태녀의 표정을 보니 켄타우로스가 뭔지 모르는 것 같지만, 아무튼 놀이라는 말에 기뻐하는 것 같다.
그래, 이모라면 모름지기 저렇게 놀아줘야지. 소중한 조카를 허공에 던지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이모가 조카를 허공으로 쏘아 올리냐고.
‘좋아하는 황태녀도 정상은 아니지만.’
저 멀리 사라지는 에리와 황태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게 되면 무서워하는 게 보편적이다. 이건 성별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보일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황태녀는 무서워하기는커녕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리브노만과 뉘렌의 피가 결합되어 엄청난 강심장을 타고난 것처럼.
“주인.”
다시 두 발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터는 사이, 겸손이 쪼르륵 다가왔다.
“왜?”
“장생이 더 이상 자기를 찾지 말라며 어딘가로 숨었다.”
세쌍둥이에게 물고 빨리던 장생이가 자유를 찾아 떠났다는 말에 픽 웃음이 나왔다.
세쌍둥이 침대에 던져둔다는 협박이 통할 정도로 화려하게 시달리는 장생이다. 귀여운 우리 딸들과 놀아주는 게 뭐가 불만인가 싶지만, 시달리는 강도를 보면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계에 도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택 안에는 있지?”
“당연하다. 그 덩치로는 어디 나가지도 못해.”
“그럼 됐어. 오늘은 쉬게 놔둬.”
참다 참다 도망친 녀석을 곧바로 잡는 건 잔인한 일이다. 하루 정도는 쉬게 두는 것도 괜찮겠지.
“흠.”
“왜 그러나, 주인?”
“너 좀 커진 것 같은데?”
그 말에 겸손이 아담한 날개를 펼치며 부리를 열었다.
“눈치챘나? 요즘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그런지 덩치가 커졌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살이 쪘다는 뜻이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망칠 수는 없으니.
“그런데 장생이가 도망갔으면 애들하고는 누가 놀아주고 있냐?”
날개를 퍼덕이는 겸손에게 쌍따봉을 날려준 후,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장생이는 세쌍둥이의 원픽 성수다. 그 원픽이 사라졌다면 애타게 찾고 있거나, 새로운 픽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풍요한테 관심을 보이는 중이다. 양이라 털이 많지 않나.”
‘풍요라.’
기근이었다가 풍요로 전직한 성수를 떠올렸다.
복슬복슬한 털, 순한 눈매, 몸을 말면 털공처럼 보이는 아기자기한 사이즈.
“괜찮네.”
나쁘지 않다. 세쌍둥이와 놀아주기에는 딱인 성수다.
적어도 장생이가 마음을 다스릴 시간은 충분히 끌 수 있는 성수기도 하고.
***
명예 조카를 등에 태우고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힘들어…!’
찔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나, 오늘 막 방에서 나온 환자인데! 장관님의 사랑을 막 소화하고 나온 가련한 부인인데!
그런 예쁘고 안타깝고 막 지켜주고 싶은 부인에게 육체 노동을 시켜? 진짜 치사해!
“우웅?”
“전하?”
그렇게 이를 악물며 네 발로 기어다니던 중, 등에 올라타있던 명예 조카가 무언가를 본 듯 관심을 보였다.
“이모! 쩌기!”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복도에 깔아두었던 매트가 부자연스럽게 올라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뭐지?’
뛰어다니다가 매트가 들렸나?
아니, 그렇다고 치기에는 사용인들이 걸어 다니는 부분이 아니라 벽 쪽이잖아.마치 누군가 매트를 억지로 들어 올려 비집고 들어간 것처럼.
…
“전하.”
“웅?”
“저 아래 뭐가 있는지 봐볼까요?”
“웅!”
내 말에 명예 조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맑은 대답을 돌려줬다.
역시 우리 명예 조카는 내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렇게 잘 따르는데 선배는 나랑 조카님이 만나는 걸 왜 막는 거람?
“오, 오지 마라!”
아무튼 조카와 함께 매트 쪽으로 다가가자, 매트 아래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나 좀 쉬게 둬라! 이러다 과로로 쓰러진다!”
장생의 목소리였다.
“너 왜 거기 있어?”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 쟤 세쌍둥이 전용 애완동물 아니었어?
“와! 까만 멍멍이!”
“그아아아앗! 오지 마라아아앗!”
내 의문과 별개로 조카는 장생의 목소리에 눈을 반짝이며 도도도 달려갔다.
참. 세쌍둥이 말고 조카도 쟤 좋아했지?
‘인기 많네.’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외견이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