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vil Servant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608)
로판 속 공무원 608화(609/945)
외조모님의 댁에 도착하자 무수한 환영의 인사가 쏟아졌다.
특히 세계수 꼭대기에 앉아있던 불의 정령왕은 우리를 보자마자 급강하를 하며 날아왔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까지 들려서 전투기가 오는 줄 알았어.
– 오랜만이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자랑하는 정령왕이 고작 몇 개월의 시간을 두고 오랜만이라 하는 것도 신기하나, 불의 정령왕의 시선은 내가 아닌 세쌍둥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은근슬쩍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대놓고 고개를 45도 돌리며 세쌍둥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예, 오랜만입니다.”
떨떠름히 입을 열자 불의 정령왕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늦었다, 이 불닭 새끼야. 기껏 불러서 왔더니 이런 홀대라니. 왕이면 다냐?
‘다긴 하지.’
우리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예정인 왕이다. 홀대가 아니라 아이만 두고 돌아가라 해도 잠깐은 망설일 수 있을 정도다.
– 미안하다. 어린 엘프는 오랜만에 봐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왕께서 저희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오히려 기쁜 일입니다.”
게다가 순순히 사과도 했기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미안한 줄 알면 굳이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
– 음. 귀여운 아이들이군. 역시 새로운 생명은 언제 봐도 경이로운 법이야.
– 세계수가 불에 탄 사이에도 엘프들의 명맥이 꿋꿋하게 이어졌다는 증거지요. 흐뭇할 따름입니다.
이윽고 등에 요정을 잔뜩 태운 물의 정령왕과 바람의 정령왕도 자연스레 다가왔다.
기분이 묘하다. 사족 보행 생물이면 등에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숙명이라도 있는 건가? 어째서 우리 저택에서도, 황궁에서도, 이곳에서도 동물들의 등은 아이들이 점령한 상태일까.
“은인! 은인!”
“오랜만! 안녕!”
아무튼 정령왕들과 함께 나타난 요정들은 날개를 파닥이며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응! 잘 지냈어! 잘 지냈어!”
“엄마랑! 매일 같이 지내! 행복해! 행복해!”
“세계수! 포근해! 좋아!”
“땅 아줌마도 맨날 놀아줘! 땅 아줌마 재밌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요정들의 말을 듣다가 땅 아줌마라는 말에 다시 정령왕들을 훑어봤다.
매의 형상을 한 불의 정령왕. 거북이의 형상을 한 물의 정령왕. 호랑이의 형상을 한 바람의 정령왕.
“…땅의 정령왕은 어디 계십니까?”
요정들의 원픽인 말하는 뱀, 땅의 정령왕이 보이지 않는다.
– 그 녀석이라면.
내 질문에 부리를 달싹이던 불의 정령왕이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아.’
불의 정령왕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마자 탄식이 나왔다.
땅의 정령왕은 죽은 것처럼 축 늘어진 채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정령왕이 자기 스스로 날아오는 게 아니라, 여러 요정들이 합심하여 땅의 정령왕의 몸을 붙잡은 상태로 날아오고 있었다.
‘짐짝이냐고.’
너무 애잔한 모습이라 눈물이 나올 뻔했다.
누가 저 존재를 신의 친우이자 정령들의 정점인 정령왕이라 생각할까.
세쌍둥이를 보자마자 축복을 날릴 기세였던 정령왕들이었으나, 예상 외로 바로 축복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자. 이분이 너희 외증조할머니란다.”
“아우우?”
“후후, 지금은 어렵겠지. 너희를 매우 사랑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렴.”
“뺘아!”
축복보다 외증조모와 외증손녀들의 오붓한 시간이 먼저였으니까.
바닥에 나란히 앉아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세쌍둥이들. 낯선 환경에 떨어졌으니 울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자기 가족의 집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트릭시의 말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뱌우우!”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외조모님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도 알 건 아는 존재다. 외조모님은 머리카락과 귀 길이, 주름 조금을 제외하면 트릭시와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사랑하는 엄마와 똑닮은 존재에게 흥미와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뺘우!”
그렇게 한참이나 외조모님께 손을 뻗던 세쌍둥이 중 카틀레아가 노여움을 표했다.
자기가 친히 안아달라며 손을 뻗고 있는데 감히 안아주지 않아? 카틀레아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할머니. 저 아이들은 품에 안기는 걸 좋아합니다.”
“내, 내가 안아도 괜찮겠니?”
카틀레아의 매서운 분노와 트릭시의 권유에도 외조모님은 여전히 갈팡질팡하셨다. 애초에 망설임이 없었다면 저 아이들을 보자마자 바로 안으셨겠지만.
“그럼요. 외증손녀가 외증조할머니 품에 안기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뺘아!”
트릭시의 말에 카틀레아도 맞는 말이라는 듯 옹알이를 내뱉었다.
저 옹알이가 알아들어서 내뱉는 옹알이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외조모님의 마음을 자극하기는 충분했다.
“내가… 아이를…”
그제서야 외조모님은 떨리는 손으로 카틀레아를, 세실리아를, 마리아를 품에 안았다.
“…아리아드네가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구나…”
이윽고 외조모님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외손녀의 아기 시절을 보지 못했던 외조모님 입장에서는 수백 년 만에 느끼는 온기일 거다.
“아우, 아우애.”
“얘, 얘야?”
똘망똘망한 눈으로 외조모님을 보던 마리아가 외조모님의 팔을 토닥였다.
“아우, 아… 애.”
그렇게 옹알거리며 연신 토닥였다. 내가 세쌍둥이가 울 때 등을 토닥이며 달래던 것처럼.
“아캐… 아앳…”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 듣던 마리아의 옹알이하고는 미묘하게 다르다.
마치 무언가 말하려는 듯─
“차… 캐, 차캐애…”
“마, 마리아?”
“허어.”
기어코 마리아의 입에서 옹알이가 아닌 어눌한 단어가 나오자 트릭시도 나도 놀라고 말았다.
우리 장녀. 좋은 의미로 아빠를 울게 만드는구나.
***
장로의 집에서 느껴지는 소란을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 의외로군. 아이들이 오자마자 축복부터 내릴 줄 알았는데.
내가 땅에 널부러져 하늘만 바라보자 물의 정령왕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축복은 목표가 아닌 과정이지 않나. 가족 상봉을 방해하며 축복을 내려봤자 정작 가족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 의미가 없지.
– 하여간 불 아니랄까 봐 은근 마음이 따뜻하군.
그럼 넌 물이라서 차갑냐, 라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그런 논리라면 매일 요정들에게 시달리는 땅의 정령왕은 언젠가는 땅에 묻힐 운명이라는 거니까.
– 그보다, 직접 보니까 어떻던가?
물의 정령왕의 말에 고개를 장로의 집 쪽으로 돌렸다.
직접 보니 어떻냐라.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 내가 느낀 건 물의 정령왕도 느꼈을 테니.
– 최고다.
그럼에도 입을 열었다. 이 두근거리는 고양감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기에.
– 카틀레아라고 했나? 셋 중 막내의 자질이 상당하다.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이야.
– 역시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군. 다행이다.
두 왕의 의견이 일치했다. 하나의 주장은 착각일 수 있어도, 둘의 주장은 진실인 법.
그리고 인간 황제의 자식과 놀아주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과 땅의 정령왕도 같은 의견을 낸다면 그 진실은 더욱 확실해질 거다.
“와! 와!”
– 꽉 잡으세요. 그러다 떨어집니다.”
“웅! 조심하께!”
– 끼에에에에엑!
흐음.
– …나중에 물어봐도 되겠지?
– 그러도록 하지. 저 사이에 끼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생명체를 사랑하기에 온화한 표정으로 인간 황제의 자식을 태우며 돌아다니는 바람의 정령왕, 꼬리를 붙잡힌 채 허공에 휘날리는 땅의 정령왕.
난 뱀으로 형상을 정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다행이야.
***
외증조모와 외증손녀의 상봉을 위해 잠시 황태녀를 방치했으나, 다행히 황태녀는 시녀장의 감독 하에 혼자서도 잘 놀았다.
엘프, 요정, 정령, 세계수. 황태녀가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 우르르 몰려있으니 잘 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
“때부! 때부!”
내가 외조모님 집에서 나오는 걸 본 황태녀는 바람의 정령왕과 함께 달려왔다.
아, 땅의 정령왕도 같이 있구나. 너무 자연스럽게 휘두르고 있어서 밧줄 같은 건 줄 알았네.
“여기! 신기해! 신기한거! 많아!”
“즐거우십니까?”
“웅!”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인간 사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종족 사회. 그런 곳을 어린 황태녀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향후 인간과 이종족 사이의 관계에도 청신호일 수밖에 없다.
“모습은 다르지만, 이곳도 전하가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입니다. 황궁이나 저의 저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웅! 마자! 전부 재밋써!”
“그렇다면 됐습니다.”
‘이종족 보호 구역 = 황궁과 다를 거 없는 곳’이라는 인식이 박혔다면 충분하다. 아직 어린 황태녀에게는 그걸로도 좋은 가치관이 될 테니.
– 훌륭한 교육이군요. 겉모습만 다를 뿐 본질은 다를 게 없다는 것. 수많은 군주들이 인정하지 못하여 여러 종족이 피를 흘리게 한 진리입니다.
나와 황태녀의 대화를 들은 바람의 정령왕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가 미소를 짓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분위기가 그랬다. 대충 웃는 얼굴 같아.
“대부로서 대녀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 후후, 그 당연함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평화롭게 이끌어가는 기반이지요.
그렇게 말한 바람의 정령왕은 황태녀가 내려올 수 있게 몸을 낮췄다.
– 샤를로테. 잠시 내려오겠습니까?
“히잉… 더 놀면 안대?”
– 줄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황태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려왔다.
우리 대녀. 욕망에 충실한 편이구나.
– 여러 종족의 화합과 번영을 이끌어 갈 미래의 황제에게 광명이 있으리.
그런 황태녀의 이마를 가볍게 핥은 바람의 정령왕은 앞발로 황태녀의 양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방금 말씀은…”
– 축복입니다. 이 아이가 이곳까지 온 것도 인연이니까요.
놀러 왔다가 졸지에 정령왕의 축복을 받게 된 황태녀는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선물은!?”
그리고 자신이 무엇보다 귀한 걸 받았다는 것도 모른 채 격렬히 항의했다.